[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차라리 지방자치제를 폐지하라] [인구 소멸·지방 소멸… ]

뚝섬 2024. 5. 3. 07:53

[차라리 지방자치제를 폐지하라] 

[인구 소멸·지방 소멸… 역발상으로 넘자]

 

 

 

차라리 지방자치제를 폐지하라

 

[朝鮮칼럼]

경기북도 새 이름 공모 결과 ‘평화누리 특별자치도’ 1등… 이 무슨 웃지 못할 희극인가
美日의 지방자치 성공 이유는 원래 각 지방, 별도 국가였기 때문… 반면 우리는 왕건 이래 중앙집권
저성장 고령화 국가적 난국… 지금 필요한 건 담대한 혁신이다
 

 

외신 칼럼을 읽다 보면 종종 접하게 되는 표현이 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요술 막대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이다. 현실에서 달성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 상상의 힘을 빌려서라도 공유하고픈 의제를 강조하기 위한 화법이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평화누리특별자치도’ 때문이다. 지난 1일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발표한 ‘경기북도’의 새로운 이름 공모 결과다. 그 웃지 못할 희극을 보며 필자의 소망은 염원으로 바뀌었다. 내게 요술 막대가 있다면 지방자치제를 폐지할 것이다.

 

곧장 돌아올 반론.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의 초석 아닌가? 미국, 독일, 일본 등 민주주의 선진국을 봐도 모두 지방자치제를 충실히 지키고 있는 나라 아닌가? 이는 1987년 직선제 개헌 당시 지방자치제를 추진한 표면상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보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듯, 지방자치 선진국은 근대 국가 건설 이전부터 각 지방이 별개의 나라(state, )를 이루고 살던 문화적, 역사적, 지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지역민이 스스로의 일을 알아서 처리하되, 중앙정부가 필요한 사안에서 연방을 이루는 ‘상향식 지방자치’가 탄생한 이유다.

 

반면 우리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후 지금껏 천 년의 역사 동안 중앙집권 체제로 살아왔다. 일제의 식민 통치 및 해방과 분단을 겪은 후에도 중앙집권 체제는 고스란히 유지됐다. 그러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 우리는 각 지역에 맞는 산업을 국가가 특정해 육성하는 수출 주도 경제 체제를 갖추었고 오늘에 이르렀다. 선진국의 지방자치와 달리 우리의 지방자치는 ‘국가 주도형 지방자치’, ‘하향식 지방자치’라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일본이나 미국의 지방자치와는 전혀 다른 단어다. 각 지역이 스스로의 일을 자신의 예산 내에서 알아서 처리한다는 뜻이 아니다. 중앙의 예산을 타내기 위해 무한 경쟁을 벌인다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선거철마다 예타 평가를 무시하는 온갖 의제와 특별법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 그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공항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대신 고추를 말리고 있는 이유, 직선으로 달리며 진짜 ‘거점’에만 서야 할 KTX가 오송분기점에서 굳이 한 번 꺾고 내려가는 등등의 이유다.

 

지방자치제는 대한민국을 ‘원 팀’이 아니도록 갈가리 찢어놓고 있다. 소위 ‘잘사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내가 내는 세금을 저 ‘못사는 동네’에 쓴다며 못마땅하게 여긴다. 반대로 ‘못사는 동네’ 사람들은 너희가 혜택을 독식해서 ‘잘사는 동네’가 된 것 아니냐며 고까워한다. 불필요하게 큰 시청, 도청, 구청을 지어가며 예산을 펑펑 낭비하는 건 그러한 심리의 반영이다. 서로 밥그릇을 힐끔거리며 남 주기 아까우니 내가 다 먹어치워야겠다는 놀부 심보로 나라가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다른 나라가 어찌 됐건 우리의 지방자치제는 그런 제도다. 이제는 그 누구도 국가적 차원의 어젠다를 떠올리거나 추진할 수 없다. 홉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자체의 지자체에 대한 투쟁’만 남았다. 게다가 그러한 ‘국가 실종’은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지방 소멸을 막고 인구를 분산하여 출산율을 회복하려면 서울·수도권과 별도의 메가시티 광역권을 만들어야 한다. 지역별 산업 플랜, 중소도시의 통폐합, 인프라의 재구축을 해도 이룰까 말까 한, 제2의 건국에 버금가는 사업이다. 지방세 수입과 지출을 둘러싼 갈등이 ‘경기북도’ 분도로 치닫고, 그 위에 특정 연령대의 정치 세력이 북한을 향한 기괴한 집착을 담아 ‘평화누리특별자치도’라는 이상한 이름을 붙이려 드는 이 나라에서, 과연 그게 가능할까?

 

지방자치제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랜 군사정권 시기를 마무리 짓고 민주화의 첫발을 내딛는 과정에서 여론의 상향식 창구 역할을 어느 정도 해냈다. 하지만 이제는 온 국민이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시대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지자체, 기초의회 의원 선거 따위가 아니다. 저성장 고령화의 시대를 돌파할 수 있는 신중하고 대담한 국가적 플랜이 절실하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요술 막대를 흔들어 지방자치제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조선일보(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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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소멸·지방 소멸… 역발상으로 넘자

 

[朝鮮칼럼]

적은 인구 얇고 넓게 펴지 말고 高密化로 규모 경제·혁신 엔진
전국 6대 메가시티는 허상… 서울은 국가 경쟁력, 나머지는 域內 경쟁력
수도권 집중 기정사실화하고 오히려 국가 발전 원동력으로
 

 

유동인가가 없어 적막한 전남 영암군 영암읍 군청 앞 중심가. 2023.4.21./김영근 기자

 

연말을 맞아 올해의 인물, 올해의 단어, 올해의 한자 등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2023년 대한민국을 생각하며 올해의 한자를 개인적으로 꼽으라면 ‘꺼질 멸(滅)’이다. 인구 소멸, 지방 소멸이 국가 소멸 담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자초한 일종의 자멸이다. 인구 감소와 지방 붕괴에 맞섰던 모든 대책은 올해에도 ‘희망 고문’으로 끝나가고 있다.

 

인구와 지방 문제는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다. 지방 탈출의 주역은 젊은 층이고, 이들이 몰려가는 수도권이란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만 생존 경쟁이 가일층 치열한 곳이다. 출산 적령 세대의 자녀 생산 기피 현상이 서울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도 이 때문이다. 인구 및 지방 정책의 실패가 국가적 비극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지금은 발상 자체를 바꿔볼 때다.

 

우선 지방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 지방은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지역 기반의 분권 사회였던 유럽의 경우 지방 개념은 18세기 전후 중앙집권적 근대국가의 출현 및 수도의 성립과 더불어 발명되었다. 절대 왕조 치하 중국이나 우리나라 전통에서 지방이란 존재감이 극히 미미한 아예 ‘다른 세계’였다. “등과(登科)를 못하는 것은 학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가기가 어려워서”라는 말까지 있지 않았나. 서구에서 지역 간 격차 관념이 생겨난 것은 역사가 오래지 않으며, 황도(皇都)나 왕도(王都)의 위상이 지고(至高)했던 전근대 동양에서는 지역 균형이라는 말 자체가 ‘역심(逆心)’이었다.

 

어떤 상태가 지역 균형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수도권 인구 집중에 있어서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 보편적 잣대도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모빌리티 및 디지털 혁명에 따라 시공간적 유동성이 극대화되고 있다. 따라서 수도와 지방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부터가 비과학적이고 시대착오적이다. 애향심이나 장소성 개념으로 지방의 존재 이유를 찾기도 점차 쉽지 않다. 급속하고도 거대한 사회 변동의 파고에 밀려 오늘날 우리 모두는 ‘제자리 실향민’이다. 고향에 대한 혈연·지연·학연 중심의 의미 부여는 다민족·다문화 사회라는 오늘날 시대정신에도 어긋난다.

 

지방자치가 반드시 다다익선(多多益善)인지도 의문이다. 지방자치가 지역 발전이나 지역 균형을 달성하는 유일한 혹은 최상의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앙집권 체제가 지역 발전은 물론 지역 균형까지 이룩한 사례도 있다. 과거 관선(官選) 지사나 시장 가운데도 유능한 목민관(牧民官)은 얼마든지 있었고, 청백리(淸白吏) 또한 지방자치 실시 이전에 더 많았던 것 같다. ‘제왕적’ 자치단체장이 생소했던 그 시절에는 지역 토착 비리가 지금처럼 권력형 카르텔로 구조화되지 않았다. 현행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최대 수혜자는 정치인이나 공무원, 토호 세력일지 모른다. 이들이 인구 사수(死守)에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지역 주민은 기존 선거구나 행정 단위에 포획된 ‘인질’인가 싶기도 하다.

 

지방 없는 국가는 있어도 국가 없는 지방은 없다. 이에 현재의 저출생 국면을 인구의 재배치나 이동성 강화 등 공간적 차원에서 대응하면 어떨까. 수도권 집중을 기정사실화하고 이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자는 역(逆)발상이다. 적은 인구를 얇고 넓게 펴는 대신 고밀화(高密化)를 통해 규모의 경제를 살리고 혁신의 엔진도 달구자는 말이다. 그런 다음 수도권의 새로운 도약이 전국으로 확산하고 재분배되기를 장기적으로 기대해 보자는 것이다. 결코 망상이 아니다. 오늘날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아무리 심한들 왕조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덜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말이다. 이는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택한 우리가 닫히지 않고 열린 사회, 고이지 않고 트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서울 공화국’을 무색하게 하는 압도적인 ‘평양 공화국’, 북한이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우리의 강점이다.

 

최근 급부상 중인 메가시티 논의에 호감이 가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무조건은 아니다. 우선 서울 인접 일부 시군의 특별시 정략적 편입이 아니라 수도권 재편 혹은 국토 공간 재구성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차제에 현행 지방자치제에 만연하고 있는 각종 정치적 낭비와 행정적 비효율도 정리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나눠 먹기식 지역 안배 관행을 반복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른바 ‘전국 6대 메가시티’ 구상은 메가시티를 하지 말자는 것과 같다. 메가시티 전략이 성공하려면 서울은 국가 경쟁력, 나머지는 역내 경쟁력으로 역할이 분담되어야 한다.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조선일보(23-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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