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여수]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뚝섬 2024. 1. 25. 09:49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묵은 머릿속 비우고 한 해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찾은 여수
정직한 음식으로 삿된 몸 채우고, 먼바다 보며 지난해 떠올려
돌계단 길 不見·不聞·不言 삼불상… 중생에게 다가온 부처님 말씀

 

여수 바다는 산맥을 집어삼킨 채 얌전히 찰랑였다. 먼 옛날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돌연 남서쪽으로 내달리며 솟아난 소백산맥은 여수 앞바다에서 끝난다. 질주하던 산맥이 바다를 만나 풍덩 빠지면서 거대한 땅덩어리들이 바다로 튕겨 나갔고, 이 땅들이 돌산도와 금오도, 개도가 됐다. 그래서 여수 앞바다는 망망대해가 아니라 육지와 섬들이 둥글게 서서 마주 보는 땅들의 바다다.

 

호남평야처럼 산맥이 내려앉지 않고 사납게 깎아지른 언덕에 여수가 있다. 바닷가 마을은 좁고 사람들은 산을 깎아 집을 지었다. 여수 앞바다에서 육지 쪽을 보면 온통 산뿐이다. 그 산들은 바다로 튕겨 나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섬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섬에서는 동백꽃이 핏빛 속살을 막 터뜨리기 시작했다.

 

여수에 간 것은 묵은 머릿속을 비우고 한 해를 시작하는 여행지로 제격이기 때문이다. 이미 몇 번 간 적 있고 심지어 돌산에 방을 얻어 일주일을 지낸 적도 있지만 집을 떠나고 싶을 때 나는 늘 여수를 떠올렸다. 그곳에 갓밭을 일구는 늙은 부모님이라도 계신 것처럼.

 

여수의 언덕과 절벽에서 바다를 보고 싶었다. 해가 바다에서 솟고 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여수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 공장에서 만들어 포장한 재료와 양념을 섞어 끓인 프랜차이즈 음식이 아니라 해풍에 말리고 가마솥에서 찐 것, 손가락으로 찍어 간을 보며 숙성시킨 양념으로 버무린 음식을 먹고 싶었다. 삿된 몸을 비워 정직한 음식으로 채우고 싶었다.

 

여수는 굴이 제철이었다. 돌산 안굴전이란 곳이 유명하다. 돌산 초입에서 표지판을 만나는데 서쪽으로 가면 굴전, 동쪽은 안굴전이다. 굴전은 굴로 부친 전이 아니라 ‘동굴 앞’이란 뜻이고 안굴전은 굴전 안쪽에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굴로 이름난 곳은 굴전이 아닌 안굴전이다. 옛 여천군 지역에도 굴구이 집이 여럿 있다. 내가 간 집은 1년에 굴 나는 겨울 석 달만 장사한다고 했다.

 

굴구이 집들은 양식장에서 매일 굴을 길어 올린다. 언제 트럭에 실려 서울에 왔는지 모를 굴과는 때깔이 다르다. 뽀얗고 매끈하고 달다. 굴 한 판이 너무 많을 것 같아 반 판을 시켰는데, 한참을 먹다가 남은 굴을 세어 보니 40개였다. 도대체 굴 반 판에 몇 개를 준 것인가. 평생 먹은 굴과 앞으로 먹을 굴을 합친 것만큼 많은 굴을 먹어치웠다. 굴에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성분이라도 있는 걸까. 자꾸 웃음이 흘러나왔다.

 

장범준 노래 ‘여수 밤바다’는 여전히 여수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여수엔 젊은 여행자가 많았다. 어느 식당은 ‘여수를 먹여 살린 장범준님이 방문한 곳’이란 문구를 내걸었다. 이 외지인들이 몰리는 곳을 피해 식당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용케 찾은 현지인들 단골집에서 서대회 무침을 먹었다. 식초가 아닌 막걸리초 양념장으로 무친 이 여수 별미는 한 움큼씩 집어먹어도 맵거나 짜지 않았다. 건새우 넣은 미역국이 함께 나와 회 무침으로 알싸해진 혀를 달래줬다. 따끈한 흰 쌀밥에 서대회 무침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 한입 가득 넣었을 때, 세상의 어떤 음식이 이처럼 충일한 맛을 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여수 사람들은 외식할 때 돌게장이나 갈치 조림을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평범한 메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 것들은 그 메뉴를 맛봐야 한다. 인천에 가면 간짜장, 전주에선 비빔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다이어트 하는 자들이여, 여수에 발 들이지 말지어다.

 

먼바다를 보려고 돌산 끝 향일암에 갔다. 절벽에 붙어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는 절이다. 가파르게 오르는 돌계단 길에 불견(不見) 불문(不聞) 불언(不言) 삼불상이 있다. 나쁜 것을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라고 한다. 온갖 나쁜 것을 보고 듣고 말해 온 중생에게는 그저 부처님 말씀이다.

 

내친김에 향일암 뒤에 있는 금오산에 올랐다. 절집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산꼭대기엔 아무도 없고 바람만 불었다. 여수 시인 황종권은 향일암을 두고 “세상의 그 어떤 해일에도 더럽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절벽의 힘으로 몸에 붉은 기운을 밀어 넣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시인은 이 산에 올라 남해 먼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봤을 것이다. 까마득한 곳으로 해가 저물며 붉은 윤슬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작년을 떠올리고 또 올해를 생각했다.

 

숙소에 돌아와 검푸른 바다를 보며 장범준의 노래를 들었다. 되풀이해 듣다가 따라서 흥얼거렸다.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서울로 돌아가기 싫었다.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조선일보(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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