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정녕 내 체중이란 말입니까?
처음 보는 숫자에 놀라
펑퍼짐한 바지를 샀다
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 검진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신장과 체중을 쟀는데, 화면에 찍힌 몸무게를 보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좀처럼 체중계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나를 보고 신체 계측 담당자가 물었다. “본인의 키와 체중이 맞으세요?” 목 놓아 외치고 싶었다. “아니요! 아닌데요! 이건 제가 아니라고요!” 하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숫자이지만 분명 내 몸무게가 맞을 것이기 때문에.
어쩐지 몇 달 전부터, 오랫동안 입어 온 옷들이 죄다 맞지 않았다. 티셔츠를 입어도 등 뒤가 끼는 것 같고, 낙낙하게 맞았던 셔츠도 어깨나 팔 쪽이 불편했다. 처음엔 섬유의 문제나 세탁기 성능의 문제라고 여겼다. 옷이 줄어들었네. 잘못 빨았나 보네. 하지만 일 년 만에 꺼낸 여름옷들이 모조리 맞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때쯤에야 알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착실하게 몸을 불려왔다는 것을.
같은 연령대의 지인들에게 고충을 토로하니(!) 비슷한 이유로 다들 체중 조절을 한다고 했다. 운동을 늘리는 대신 섭취를 줄이고, 간식도 끊었다고. 그런데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그들이 하고 있는 걸 해본 적이 없지만 이번에도 나는 그들과는 다른 접근을 하기로 했다. 새 옷을 사러 가자.
옷에 몸을 맞추는 일은 금방 되는 일도 아니고 그럴 의욕도 없기에, 현재의 내 몸에 편하게 맞는 옷을 사기로 했다. 자주 가는 의류 매장에 가서 옷을 고르는데 고무줄 바지만 눈에 들어왔다. 요즘 상의들은 또 왜 그렇게 짧은지. 누가 봐도 신생아 옷 같은 티셔츠밖에 없어서 디자인보다는 편리함을 추구하며 큼지막한 바지 두 벌을 골라 집으로 왔다. 이로써 원래 있던 옷을 입는 일과는 점점 멀어지고, 펑퍼짐한 티셔츠와 바지를 마치 교복처럼 돌려 입고 있다. 그러고 나니 살 것 같다. 마음과 몸이 동시에 편해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여름은 패션을 위한 계절이었다. 예쁜 옷을 멋지게 소화하는 몸을 갖고 싶어서 운동도 열심히 했고, 더 날렵해 보이기 위해 음식도 가려 먹었다. 그야말로 몸에 집착하며, 이상적인 몸을 갖추기 위해 애썼다. 그러면서도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저 화려한 옷을 무표정하게 걸치고 있는 마네킹 같았달까. 당시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 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한다. 과연 내 몸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가.
얼마 전, 가까운 사람이 고위험군 질병이 의심되어서 병원 진료를 받게 되었다. 불안해하는 그와 함께 병원을 오가는 동안 많은 환자를 보았다. 보호자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아이들, 침대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는 어르신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아렸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가 나의 몸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던 시절에는 아픈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병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라고 여기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관리하는 한 아프면 안 될 것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과연 어떤 몸이 아파도 되는 몸인가. 반대로 아파서는 안 될 몸이 따로 있는가.
내 옆의 사람이야말로 세상 누구보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아파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병이 생겨버렸다. 이처럼 누구도 자신의 몸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건강을 챙긴다고 해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니고, 막 산다고 해서 질병을 얻는 게 아니다. 건강함이란 우리가 꾸준히 달성해야 할 어떤 가치가 아니라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살아가야 하는 무언가다.
몸에 대한 집착을 덜고 나서 건강에 대해 겸허해졌다. 그 겸허함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나는 펑퍼짐한 바지와 티셔츠만 입을 수 있지만 뭐 어떤가. 더불어 내가 몸이 아플 때나 누군가가 건강을 잃었을 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건강에 집착하지 않고 나서 건강의 고마움을 깨달았다. 그저 그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 크게 아프지 않음에 감사하고, 언젠가 크게 아프게 되더라도 해결책이 있으리라 기대할 것이다. 건강한 몸도, 그렇지 않은 몸도, 보기 좋은 몸도 아닌 몸도 다 내 몸이므로. 어쩌면 이 역시 내가 아직은 살 만해서 하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나는,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살기에는 좋다. 옷이 낄까 봐 먹을 걸 덜 먹고, 전전긍긍하며 다이어트를 하던 날들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근육과 땀을 쥐어짜는 여름은 더는 사양이다. 아름답지 않아도 편안한, 나를 다그치지 않고 느긋하게 보내는 여름은 처음인 것 같다. 단, 지나친 과식은 삼가려고 (생각만) 한다. 가급적 몸을 움직이(겠다고 다짐만 하)고, 내키지 않아도 신선한 식재료들을 먹으려고 (상상만) 한다. 내년 건강검진에서는 어떤 새로운 숫자가 나를 놀라게 할까.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기대된다.
-김신회 작가, 조선일보(24-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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