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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벌어지는 '진실한 거짓말'에 감동한다]

뚝섬 2025. 2. 9. 05:39

눈앞에서 벌어지는 '진실한 거짓말'에 감동한다

 

연극을 보러 다니는 이유 

 

연극 '붉은 낙엽' 커튼콜 장면. 제14회 대한민국 연극대상 수상작으로 3월 1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 /편성준 제공

 

영화를 처음 본 건 ‘KBS 명화극장’을 통해서였다. 나는 오케스트라를 본 적이 없지만 ‘오케스트라와 소녀’라는 영화에 감동했고 로런스 올리비에가 히스클리프로 나온 ‘폭풍의 언덕’을 보며 오열했다. 훌륭한 번역가이기도 했던 영화 평론가 정영일 선생이 검은 뿔테 안경에 노타이 정장 차림으로 나와 “이번 영화는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나 ‘OK목장의 결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티파니에서 아침을’ 같은 명작을 섭렵했다.

 

어린이는 일찍 자야 한다는 말씀도 있었으나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는 시골 마을 꼬마에게 이 정도 사치는 용납하는 분위기였고 ‘도대체 이런 신기하고 풍요한 세상이 있다니?’ 하는 생각에 일찍 잘 수가 없었다. 아련한 프랑스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나 스파게티 웨스턴 ‘석양의 무법자’는 TBC에서 본 것 같고 ‘MBC 주말의 명화’ 타이틀에 등장하던 폴 뉴먼 주연의 ‘엑소더스’ 주제가도 잊을 수 없다.

 

극장 영화는 ‘킹콩’이 처음이었다. 거기 나온 여배우가 제시카 랭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6학년 때부터 동네에 있는 양지극장, 불광극장 등 재개봉관을 다니며 소피아 로렌 주연의 ‘엘 시드’ 같은 역사물을 시작으로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로 나오는 007 영화 ‘나를 사랑한 스파이’나 ‘문레이커’를 보았고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나 ‘정무문’도 보았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시내로 진출해 개봉관 영화를 보았다. 빌리지 피플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 ‘캔 스톱 뮤직’은 너무나 재밌었고 스티브 매퀸과 폴 뉴먼, 제니퍼 존스 등이 나온 재난 영화 ‘타워링’도 잊을 수 없는 할리우드 극장 영화였다. 앤서니 퀸이 주연한 ‘페세이지’를 명보극장에서 두근거리며 본 기억도 난다.

 

서울극장에서는 ‘대부’ 1편을 재개봉으로 보았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였지만 너무 보고 싶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안정효 작가가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북토크를 하며 “며칠 전 디자이너 하용수씨와 점심을 먹었는데,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딱 자기 얘기라고 하더라”라는 말을 듣고 나처럼 영화에 미쳤던 사람이 참 많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 잡지도 열심히 읽었다. ‘스크린’이나 ‘로드쇼’ 애독자였고 ‘씨네21’도 정기 구독했다. 나는 특히 배우나 감독 이름을 잘 기억했는데, 예를 들어 ‘스카페이스’에서 알 파치노 여동생으로 데뷔한 배우는 메리 엘리자베스 매스트런토니오이고, 찰리 신의 아버지는 마틴 신인데 형 이름은 에밀리오 에스테베즈라는 걸 얘기하면 친구들은 감탄하는 동시에 지겹다며 나를 멀리했다.

 

연극 ‘흑백다방 1991’ 리허설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편성준 제공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연극도 보러 다녔다. 고등학교 때는 차범석의 ‘산불’이나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 또는 프란츠 카프카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보는 게 고작이다가 윤석화가 출연한 ‘신의 아그네스’가 전국적으로 히트했을 때는 실험극장 앞에 가서 ‘노쇼’가 난 표를 현장 구매해 보기도 했다. 산울림소극장 개관 기념작으로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뒤로는 ‘아가씨와 건달들’이나 ‘에쿠우스’ 같은 화제작을 찾아다녔고 닐 사이먼 원작의 희극도 많이 봤다. 스카 고헤이의 희비극 ‘뜨거운 바다’는 특히 별미였다.

 

연애 초기에 아내가 연극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 선뜻 그러자고 했더니 좀 놀랐다고 했다. 그때까지 사귄 놈 중 연극 보러 가자고 했을 때 두말하지 않고 따라나서기는 내가 처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본격적으로 연극을 보러 다닌 건 코로나19 초기부터다. 팬데믹으로 모든 공연과 이벤트가 망해갈 때 ‘우리라도 보자’라는 갸륵한 마음으로 시작한 관극 행위는 의외로 재미있었다. 연극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진실한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약속한 대로 최선을 다해 거짓말에 임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감동했고 기꺼이 동의했다. 그들이 “여기는 1930년대 경성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정말 타임머신을 타고 1930년대 서울로 갔다.

 

아내와 나는 연극을 보면 정성껏 리뷰를 쓰는 축이라 배우나 연출가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친해져도 초대권이나 할인권을 요구하진 않았다. 경험상 공짜로 하는 건 뭐든 정성이 들어가지 않고 재미도 없다. 내 돈을 내고 봐야 진짜 팬이 된다. 연극을 많이 보니 쟤네는 돈이 많은가 보다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다른 걸 포기해서 가능한 취미다. 우리 부부는 새 옷을 안 사기로 했고 비싼 술도 안 마신다. 게다가 국립극단 연회원이 되거나 패키지 티켓을 구입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사실 연극 같은 거 보지 않아도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하지만 이런 걸 즐기며 사는 인생과 그러지 않는 인생은 내적 충족감에서 차이가 난다. 좋아하는 문화 콘텐츠가 있는 사람은 사는 게 따분하지 않은 법이다. 아내와 나는 어제도 연극 ‘흑백다방’ 여성 배우 버전인 ‘흑백다방 1991’의 런스루(run through·실제 공연처럼 하는 리허설)에 다녀왔다. 오세혁 연출과 차현석 작가의 초대를 받은 덕분인데, 남들보다 먼저 보는 리허설을 통해 젊은 배우들의 진심과 만나는 건 특별한 행운이었다. 이 연극, 추천한다. 2월 내내 대학로 ‘시어터쿰’에서 상연한다. 

연극 '흑백다방 1991' 포스터.

 

-편성준 작가, 조선일보(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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