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인가 음료인가]
[무알코올 연말 모임을 추천합니다]
[혼밥∙혼술 하는 나홀로족]
맥주인가 음료인가
지난여름 일본의 여러 도시를 다녔습니다. 여행은 아니었습니다. 제 산문집이 일본어판으로 출간됐고, 관련 행사가 연이어 마련됐던 까닭입니다. 항공편과 철도와 지하철과 택시를 번갈아 타며, 출판사와 대형 서점과 작은 동네 책방과 한국문화원 등을 오갔습니다. 식사는 최대한 간편하고 빠르게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작은 기쁨도 있었습니다. 동행한 현지 출판사 직원 덕에 관광객이라면 찾기 어려울 직장인들의 오랜 단골집을 다닐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맛이 좋고 음식도 빨리 나오는 그런 식당 말입니다.
식당마다 다소 이색적인 풍경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점심을 먹으며 맥주를 곁들이는 직장인이 제법 많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따라주거나 받지 않고 한 사람당 한 병씩 각자의 속도로 맥주를 마셨습니다. 자세히 보니 알코올 함량 0.00%.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해온 저로서는 고개가 갸웃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알코올은 없다지만 맥주는 맥주니까요. 연거푸 잔을 기울이는 일본의 직장인들을 바라보면서 알코올이 없으니 보리 발효 음료수라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런 논리라면 회사에서 업무를 보면서도, 회의를 하면서도 홀짝홀짝 마시는 일이 가능해지겠지요. 무알코올 맥주가 술인가 음료인가 정의하는 문제는 제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무알코올 주류는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정한 기준은 이렇습니다. 알코올을 전혀 함유하지 않은 것은 ‘무알코올’, 1% 미만의 알코올이 들어 있는 것은 ‘비알코올’로 분류됩니다. 국세청 홈페이지에 고시된 민원 사례집을 살펴보면 알코올 함량 0.5% 이하는 음료로 취급돼 주세를 별도로 부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준은 명확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경계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이 어지러움 끝에 저는 구매 가능한 국산 및 해외 맥주를 섭렵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먼저 알코올이 전혀 없는 무알코올 맥주는 호불호가 크게 갈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제조사마다 자사의 기존 맥주 맛에 최대한 가깝게 구현하려 노력한 탓입니다. 저마다의 선호 맥주가 다르듯 무알코올 맥주도 그렇겠지요. 술을 좋아하는 제 개인적인 특성 탓인지 무알코올 맥주는 마시면 마실수록 무용하고 허무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빛 하나 들지 않는 깊은 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
다만 1% 미만의 알코올이 들어 있는 비알코올 맥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저마다 특징이 있지만 모두 한결같은 술맛이 납니다. 역시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주 멀리 작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 아주 잘하면 저 빛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게 합니다.
“원 참 누가 술을 이처럼 권하였노.”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1921년 발표된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무알코올이든 비알코올이든 일반 알코올이든 술 권하는 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합니다. 저로서도 아쉬움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많이 섞여 있습니다.
-박준 시인, 조선일보(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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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알코올 연말 모임을 추천합니다
술이 나를 마셔 禁酒 3년
음주 습관을 되돌아보길
연말이다. 평소 술 안 마시는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한잔하게 되는 연말이 왔다. 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올해로 술 없는 연말 3년 차를 맞았다. 술을 끊은 지 삼 년이 됐다는 말이다. 야호!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말이면 위염을 달고 살았다. 줄기차게 이어지는 술자리에 프로 참석러를 자처하느라 생긴 만성질환이었다. 그럼에도 틈만 나면 술 마실 기회를 엿봤다. 밀린 안부를 나눈다는 명목은 핑계였고, 그저 죄책감 없이, 외롭지 않게 술을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온 세상 사람들을 다 만나고 왔음에도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안 났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다음 연말이면 다들 술자리에서 마주 앉을 것이기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시인 최승자는 썼다(시 ‘삼십 세’ 중에서). 그 말이 뼛속까지 파고든 지 한참 지난 어느 날 느꼈다. 이렇게 계속 마실 수도 없고 이렇게 안 마실 수도 없을 때 알코올의존증은 온다고. 나는 자박자박 술에 전 채 중년을 맞았다. 별다른 낙이나 취미도 없었기에, 일과를 마치면 냉장고에서 술을 꺼내며 퇴근을 기념하는 성실한(!) 술꾼이 됐다. 외출과 만남이 자유롭지 않았던 코로나19 시기에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1인 가구인 데다 재택근무를 하는 프리랜서로서 혼자 일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마시고 잠드는 삶이 하염없이 반복되었다. 또 마시고 말았다는 죄책감이 엄습할수록 더욱 일에 매진했다. 이만큼 열심히 일했으니 마셔도 되겠지. 강도 높은 노동에 대한 보상으로 나에게 술을 선물했다.
하루는 집 앞 공원에서 산책하는데, 벤치 구석에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출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그곳만 유난히 시끌벅적했다. 쭈뼛쭈뼛 상황을 살피니, 어르신 중 한 분이 술에 취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를 일으키려 애쓰는 다른 어르신들의 불콰한 얼굴에서도 취기가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저 지나쳤을 광경에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다. 마치 거울을 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어르신들의 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하지만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나서도 그날 일을 마치고 냉장고를 열어 술병을 꺼내 들었다.
이후 몇 달 동안 술을 끊어보고, 한 번 마실 술의 양을 제한해 보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며 음주의 유혹에서 멀어지려 애썼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나는 그저 술을 즐길 뿐인데 왜 매번 술에 지는 것 같지? 이 생각이 들자, 내가 술을 즐기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즐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술이 나를 마신다는 말은 그저 비유가 아니었다.
그다음부터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냥 마시기로 했다. 몸에서 받을 때까지만 마시자. 어차피 더 나이 들면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을 거야. 그러다 매일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게 습관이 됐고, 이후 집에서조차 필름이 끊기자 ‘현타’가 왔다.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선 안 될 것 같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평생 못 멈출 것 같다는 자각이 왔다.
작정하고 집에 있는 술을 다 버렸다. 냉장고 안, 싱크대 구석구석에서 술병이 끝도 없이 나왔다. 자주 마시니까 쟁여둔 술, 선물 받은 술, 언젠가를 위해 아껴둔 술을 싱크대 배수구에 쫄쫄 따라 버리면서 그간 나는 모든 앞날을 술로 기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내 음주 인생에 찬란한 미래라도 있는 양.
그날로 술을 끊은 지 삼 년이 됐다. 지난 시간을 바탕으로 한 장편소설을 썼다. 제목은 ‘친애하는 나의 술’. “아무도 먹이지 않았어요. 나에게 술을 먹인 건 바로 나예요”라고 말하고 싶은, 과거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썼다.
‘들뜨는 연말에 이렇게 칙칙한 글을 읽다니, 기분이 별로다!’라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성공이다. 스스럼없이 취기에 빠져드는 이 시즌,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음주 습관을 되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다 쓰고 나니 이 글을 실어도 되나 싶다. 부모님은 내가 그 지경(!)이었는지 모르시고, 교회 권사님들은 한 달에 한 번 실리는 이 글을 열심히 챙겨 읽으신다. 심지어 나는 집사이고(질끈). 그래도 열일곱 해 동안 에세이를 써오며 깨달은 사실 하나는, 솔직하게 쓰면 마음으로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믿음으로 용기를 내 본다.
얼마 전 우연히, 젊은 세대 중에서 절주나 단주를 실천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건강 관리를 위해 회식에서도 술을 거절한다는 소식에 안도감이 들었다. 술을 즐기는 사람 중에 술을 자기 의지대로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 내가 마신 술은 결국 나를 마시고, 나를 전혀 예상치 못하는 곳으로 데려간다. 그 여정은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 올해부터 술 없는 연말 모임에 도전해 보시겠습니까?
-김신회 작가, 조선일보(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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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혼술 하는 나홀로족
Solomangarephobia라는 단어가 있다. 혼자 밥 먹는 걸 두려워하는 것(fear of eating alone)을 뜻한다. 다른 사람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해(be excessively self-conscious) 머쓱해 하고, 심지어 굴욕감까지 느끼는(feel awkward and even humiliated) 탓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혼밥(혼자 밥 먹기), 혼술(혼자 술 마시기), 혼창(혼자 노래 부르기), 혼영(혼자 영화 보기), 혼행(혼자 여행하기), 혼캠(혼자 캠핑 가기), 혼놀(혼자 놀기), 혼클(혼자 클럽 가기) 등 나 홀로 생활양식이 하나의 사회 현상(a social phenomenon)이 됐다. 사회적으로 따돌림받는 사람이나 괴짜 취급받던(be treated as social outcasts or odd balls) 시절은 지났다.
나홀로족(Myself generation)은 "혼자라고 외로운(be lonely)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히려 많은 이점이 있다고(have a lot of benefits)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혼자 뭔가를 할 경우 자신에게 더욱 집중하게 돼(focus on themselves) 창의력을 증진시킬 수 있다(boost their creativity).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 있는 척하면서(feign interest in others' affairs) 의례적인 잡담(small talk)을 건네지 않아도 된다. 수다를 떨며(shoot the breeze) 예전에 들었던 얘기를 또 듣고, 끊어진 대화를 이어가려고 애쓰지(try to make conversation to fill the pause) 않아도 된다.
혼자 있으면(keep to their own company) 뇌가 긴장을 풀어(ease the strain)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음식과 술맛을 더 음미하고(taste the flavors), 영화에도 더 속속들이 몰입할 수 있다(be immersed in movies). 또 "이것은 싫다. 저것도 별로다" 하며 징징대고 불평하는 동반자에 대해 걱정할(worry about a Negative Nancy) 필요가 없다. 내키는 걸 마음대로 골라서 유유히 만끽할 수 있다(enjoy it to the full in a leisurely way).
나 홀로를 선택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삐딱해서가(be socially perverse) 아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잡담으로 정신이 산만해지는(be distracted by idle chit-chat) 것을 원하지 않아서다. 마지못해(with reluctance) 다른 사람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ingratiate themselves with others) 피로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다. 혼자서 자화상을 그려보고(paint a self-portrait) 원기를 회복할(restore themselves) 시간도 필요해서다.
나홀로족은 "혼자이기를 원하는(be alone) 것이 아니라 혼자 있고 싶을(want to be left alone) 뿐"이라고 말한다. "집단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make me feel all alone) 사람들과 부대끼느니 나 혼자 있는 것이 되레 덜 외롭고 덜 쓸쓸하다"고 아우성을 친다(make an outcry).
-윤희영 디지털뉴스본부 편집위원, 조선일보(16-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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