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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냐?" "몰라도 돼"… '가족 여행 금지어'에 담긴 속마음]

뚝섬 2025. 6. 15. 05:40

"아직 멀었냐?" "몰라도 돼"… '가족 여행 금지어'에 담긴 속마음


슬기로운 가족 여행

忍, 忍, 忍…. 폭발!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그렇게 다짐했건만, 가족과 함께 온 자유 여행에서 결국 싸우고야 말았다. 이집트 피라미드 앞 수많은 낙타 사이에서 입이 낙타만큼 튀어나와 꽁해 있는 이 부자(父子). 1시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낙타 대첩’의 전말은 이렇다.

 

모래 바닥만 보며 걷기를 30여 분, ‘김아빠’씨는 아들에게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다. “낙타 타자”더니 사방에 널린 낙타를 왜 안 타는지 모르겠다. 덥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면 덜 힘들 텐데, “왜 안 타느냐” 물으면 “가만히 좀 있어 보라”며 휴대전화만 들여다본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김아들’씨는 정신이 없다. 호텔 앞으로 픽업 오는 상품이 있지만 “돈 아깝다”는 말에 현장에서 낙타를 잡아 타기로 했기 때문. 휴대전화로 적정 요금을 확인하며 ‘바가지요금’이 분명한 호객꾼과 씨름하는데 옆에서 “덥다” “언제까지 가야 하느냐” “그냥 타자”는 소리가 귀에 쌓인다.

 

아뿔싸. 끝내 아버지는 폭발한다. “야, 겨우 모래랑 돌 보려고 여기까지 왔냐~!” 아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여행을 다시 하면 아들이 아니다!” 

 

한두 달 뒤면 드물지 않게 펼쳐질 ‘가족 대첩’의 현장이다. 이런 이들이 적지 않아서일까. 매년 이맘때면 ‘~금지’라고 적힌 부모와 자녀 버전의 ‘가족 여행 십계명’이 회자된다. 함께 여행 가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언행을 정리한 목록. ‘아무튼, 주말’은 SM C&C ‘틸리언 프로(Tilion Pro)’에 설문조사를 의뢰해 “가족끼리 여행 가면 100% 싸운다”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했다. 20~60대 2011명이 응답했다.

 

돈 관련 발언 일단 금지

 

가족 여행에서 싸운 경험이 있는지 묻자 2명 중 1명(45.69%)이 ‘그렇다’를 골랐다. 불만에 화르르~ 불을 붙이는 결정적 언행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자녀의 입장에서 적힌 목록은 ‘자녀가 주도해 계획을 세웠을 때’의 경향성이 강하다는 점을 고려하시길.

 

자녀 세대는 여행 시 부모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로 ‘돈 아깝다’(30.1%)를 꼽았다. 이어 ‘이 돈이면 집에서 해 먹는 게 낫다’(24%), ‘겨우 이거 보러 왔냐’(17.2%)였다. 공통점은 Money, 돈이다. 불명예 ‘톱 3’ 순위에 오르진 못했지만 십계명 항목에는 ‘이거 한국 돈으로 얼마냐’(10.89%)가 있었다.

 

부모가 경비를 부담했다면 할 수 있는 말 아니냐고? 자녀 생각은 다르다. ‘돈을 누가 냈냐’와 별개로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려 들인 노력이 무시당한 기분”이라는 의견이 많다. 자녀는 패키지 여행 가이드가 아니라는 것. 2년 전 60대 부모님과 간 태국 자유 여행에서 전통 음식 ‘쏨땀’을 앞에 두고 대판 싸웠다는 직장인 황모(33)씨는 “혹여 불편하거나 마음에 안 들진 않을까 친구와 갈 때보다 두 배는 더 시간을 들여 계획했다”며 “내 마음이 돈 앞에서 무력해진 기분”이라고 했다.

 

미안해서 그랬지

 

문제는 결국 돈일까. 전문가들은 “자녀 세대는 자신의 정성을 깎아내릴 때 폭발한다”고 했다. 문제는 ‘결국 돈’이 아니었던 셈이다. 금지어 중 하나인 ‘음식이 달거나 짜다’(11.49%), ‘물이 제일 맛있다’(10.19%)도 같은 맥락. 한 30대 직장인은 “부모님께 부족하게 해주려는 자녀가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부모 세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3년 전 “돈 아깝다”는 취지 발언 후 여행 경비와 계획을 도맡은 딸이 삐쳐서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조모(64)씨는 “아무래도 우리 세대는 비용 생각 없이 즐기기만 하는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며 “괜히 돈 많이 쓸까 봐 미안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대학생 아들 둘과 지난해 2주간 유럽 여행을 다녀온 또 다른 60대 여성은 “이 나이 되도록 제대로 해외여행 가본 적이 없다”며 “신기하고 놀라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 그랬다”고 했다.

 

놀라지 마시라. 50~60대 10명 중 3명 안팎 역시 같은 질문에 ‘돈 아깝다’를 꼽았다. 1위다. 듣기 싫은 말인 걸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녀들이여, 분노 마시길. 참, 마지막으로 여행을 마친 뒤 하지 말아야 하는 금지어를 소개한다. “집 나가면 고생”과 “집이 제일 편하네”다.

 

'가족여행 금지어' 티셔츠를 입은 가족 /인터넷 캡처

 

◇“몰라도 돼”도 일단 금지

 

지난해 가족과 튀르키예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이모(63)씨는 딸과 다툰 뒤 “엄마랑 다시는 여행 안 할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 “너무 서운해서 집에 돌아와 ‘정말 같이 안 할 거냐’고 물어봤어요. 나이가 들수록 부모는 자녀와의 여행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걸 느끼기 때문에....”

 

자녀 세대에게도 금기는 있다. 정서적 단절이나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언행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위는 ‘다시는 같이 안 와’(28.1%) 발언이, 2위는 ‘하루 종일 스마트폰 하기’(18.6%)가 차지했다. 3위인 ‘몰라도 돼’(14.7%) 발언도 금지다. 자녀로서 종일 스마트폰을 하며 “아, 몰라도 된다니까? 다시는 같이 안 올 거야”라고 한 적이 있다면 반성의 시간을 가져도 좋다.

 

특히 60대 이상에서는 2·3위 순위가 뒤바뀌어 있다. 2위가 ‘몰라도 돼’(20.2%), 3위가 ‘하루 종일 스마트폰 하기’(17.7%)다. “‘같은 것 여러 번 묻는다’며 짜증”(13.7%)을 고른 비율도 전체 평균보다 높았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자녀가 ‘정성이 무시당했다’고 느끼면 속상한 것처럼 부모도 ‘소통 시도가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가장 서운한 것”이라며 “부모로서는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하지 않구나’라는 상실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진경 서강대 심리학과 교수는 “부모 세대는 돈, 자녀 세대는 시간처럼 각자에게 중요한 자원이 낭비됐다고 여겨질 때 서운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체 4위는 ‘조금만 더 가면 돼’(11.93%) 발언. 자녀 세대와는 체력이 다른 만큼, 지도 표시된 ‘도보 시간’을 ‘10분’ ‘30분’ 같은 식으로 명확히 제시하자.

 

마법의 주문을 외워보자

 

여기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한 가족의 사례가 있다.

 

‘위의 사항을 어길 시 1회당 5만원씩 가족 여행 회비를 내겠습니다. 본인·엄마·아빠·동생 (인)’

 

대학생 박진경(22)씨는 작년 8월 ‘가족 여행 서약서’를 쓰고 2박 3일간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길 하나 제대로 못 찾냐’며 면박 주기 금지” “인상이 찌푸려질 경우 화목한 분위기를 위해 선글라스 즉시 착용”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박씨는 “효과는 엄청났다”고 했다. 싸울 기미가 보일 때마다 마법 주문처럼 “어, 5만원?”을 외치니 모든 가족 구성원이 짜증을 내지 않은 척 방긋 웃게 됐다는 것. 정산 금액은 총 69만원. 그는 “돈을 내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며 “짜증 나는 상황이 순식간에 유쾌하게 바뀌더라”고 했다. 숙소로 돌아와 다 함께 정산을 하는 것도 재미였단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런 내용을 가족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싸움을 방지하는 ‘면역 효과’가 있다”며 “서로에 대한 기대를 조절하고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웃으며 넘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십계명이 적힌 티셔츠 등을 가족과 맞춰 입고 가기도 한다. “눈앞에 문구가 걸어 다니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게 되더라”는 후기 가득. 일가친척 11명과 여행을 다녀온 장모(49)씨는 “관광버스에서 십계명을 읽으며 한바탕 웃고 시작하니 싸울 일이 줄더라”고 했다.

 

‘가족 여행 마음가짐’이라는 항목에 이런 내용이 있다. 부모는 불평 대신 “신기하다” “특이하다”로 바꿔 말하고, 자녀는 부모 질문에 착한 말투로 대답하기. 빙~ 돌아왔지만, 결국 배려!

 

-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5-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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