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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운 사투리, 귀가 즐거운 곳] [충청도 말투]

뚝섬 2023. 6. 11. 05:51

[정겨운 사투리, 귀가 즐거운 곳]

[충청도 말투] 

 

 

 

정겨운 사투리, 귀가 즐거운 곳

 

[공간의 재발견]

 

“나는 막 엄청 배가 고프고 이런 건 없드라고. 그냥 참었다 먹어도 암사토 안 해.”

해남 여행길에 들른 식당. 옆 테이블에 앉은 중년의 무리 중 한 분이 한 말이다. 앞에 있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능청스레 그 말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잘살아가꼬 내장에 기름이 잘잘한갑고만.” 맞은편에 앉은 또 한 명의 친구가 말을 보탰다. “그것이 아니라 노동을 안 항께 그래 노동을.” 혼자 점잔을 빼며 밥을 먹는데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대화는 송강호가 하면 참 찰지겠다 싶으면서 일상의 대화가 무슨 영화 대본 같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이곳은 해남에서 강진으로 넘어가는 길에 들른 식당이었다. 신문사에 있는 여행 담당 후배 기자에게 현지인들 가는 맛집 어디 없을까? 하고 물어 받아든 상호였다. 왜 그런 곳 있잖은가. 근처에 있는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밥을 먹으러 오고 오랫동안 비슷하게 반복되는 풍경으로 분위기가 편안하고 관광객이 들어가면 딱 이질감이 느껴지는. 처음부터 ‘현지인 맛집’을 따지며 유난을 떨고 싶진 않았다. 숙소에서 문자메시지로 보내준 주변 맛집 리스트를 보고 두어 곳을 갔는데 뭐랄까 그냥 무미(無味)했다. 시스템이며 흐름이며 너무 매끈해서 딱히 매력이 없는. 그중 몇 곳은 2인상이 기본이라 가보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그 후 바로 레이다망을 ‘현지인 추천 맛집’으로 돌렸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요즘 물가가 너무 올라 전복솥밭이 1만5000원. 저렴하진 않았지만 토실한 갈치구이 두 쪽과 부푼 계란말이, 이런저런 밑반찬이 입에 착착 감겼다.

 

흡족한 기분으로 차를 돌려 강진으로 떠났다. 다음 날 아침 운동회라도 열린 듯 요란한 새소리에 깨 고무신을 신고 어슬렁어슬렁 동네 산책을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푸근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저 밑에서 잤소?” “네∼.” “산책할라고?” “네∼.” “저 위에까지 가봐도 좋은디 저기로 가믄 난리가 나부러.” “네? 왜요?” “개들이 엄청나게 지서브러. 오른쪽에 두 마리, 왼쪽에 한 마리.” 꽃 정보도 넌지시 알려주셨다. “저 담벼락에 자잘한 흰꽃 이름 아요? (헤헤 몰라요.) 저것이 마삭줄인디 향이 엄∼청 좋아. 내가 저 밑에서 살았는디 이 향을 따라가꼬 이리로 올라왔었당께. 저 밑에 집에도 그 꽃이 천지인디 거가 의원님 댁이요. 의원님.” 저녁에 간 주막 콘셉트의 식당에서는 “시방 혼자 와서 저녁밥을 달라고 하는 거여?” 하는 핀잔을 들었지만(물론 정감 어린 농담으로) 속 없는 사람 마냥 내내 기분이 좋았다. 다른 땅에서는 다른 소리가 나는구나. 남도에서 돌아온 주일. 다시 가고 싶다. 귀가 즐거운 곳으로.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동아일보(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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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말투

 

1992년 가을, 오비 베어스와 빙그레 이글스 경기가 열린 잠실야구장. 관중석에 이글스를 응원하는 충청도 남자 몇이 앉았다. 줄곧 2대0으로 끌려 다니던 이글스가 9회초 대역전 기회를 맞았다. 투아웃에 터진 안타, 그리고 볼넷. 다음 타자가 장종훈이다. '호무랑' 한 방이면 끝난다. 그러나 너무 높이 뜬 공, 펜스를 넘기지 못하고 잡혔다. 실망을 안긴 선수에게 욕설을 퍼부을 법도 한데, 충청도 아저씨들 이 한마디 내뱉고 주섬주섬 일어선다. "뭐~~~~여."

 

▶선거 때 여론조사원이 충청도에 가서 "기호 1번이 좋으냐, 2번이 좋으냐" 물었다. 하나같이 "다들 훌륭한 분이라고 하대유" 한다. 여간해 속을 보여주지 않는 기질 탓에 후보자들은 애가 탄다. "꼭 좀 부탁드린다"는 애원에 "너무 염려 말어" "글씨유, 바쁜디 어여 가봐유" 했다면 해석은 가능하다. 전자는 '찍어준다'에 가깝고 후자는 '틀렸다'에 가깝다. 그마저도 "냅둬유" "종쳤슈"라면 상황 끝이다.

 

 

▶사투리에 담긴 삶의 풍경을 '방언정담'이란 책으로 펴낸 국어학자 한성우 교수는 충청도 화법을 '느린 화법'이 아니라 '접는 화법'이라고 했다. 분노에 차 하고 싶은 말이 종이 한 장 분량이라면 반을 접는다. 칭찬이라면 반의반을 접고, 사랑의 표현이라면 또 반을 접는단다. "그러고도 장종훈이 니가 홈런 타자여? 고따위로 야구 할라믄 때려쳐라" 할 수도 있지만, "뭐여~" 한마디로 접는 게 충청도 사람이란다.

 

▶그래서 오해도 받는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아 속을 알 수 없다, 우유부단하다, 뒤끝 작렬하다며 흉본다. 한데 충청도 토박이 입장에선 할 말이 많다. 바로 말하지 않고 에두르는 건 상대에 대한 배려다. 면전(面前)에 대고 욕을 하다니! 시시콜콜 따지며 덤벼드는 건 상것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배웠다. 충청도 말에 비유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그제 국회에서 한 의원이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 이완구 총리의 잦은 말 바꾸기를 지적하며 "'이완구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자 이 총리는 "충청도 말투가 원래 그렇다"고 했다. 충청도 말이 모호한 건 사실이다. 예스, 노가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건 신라와 고구려 침략에 시달렸던 백제인 특유의 지혜지, 말 바꾸기나 말장난이 아니다. 우회하되 정확히 목표물을 겨냥하는 게 충청도 말이다. 행간에 담긴 진의(眞意), 그 노여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충청도 아내와 살아본 남편들은 안다. 모르긴 해도 총리를 향한 요즘 충청 민심은 이럴 것이다. "저 냥반, 뭐~~~~여."

 

-조선일보(1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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