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음성] [금왕읍 유촌리-가래들] ‘자린고비’ 명품수박으로 거듭나다..

뚝섬 2015. 7. 8. 08:00

최근 3년 전, 동서로 평택제천고속도로, 남북으로 이천-진천간의 21번 국도가 개통되면서 유촌리는 4분할되었다. 마을 아래로 한천이 흐르며 유포리와 경계를 이루고, 한천 주변에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아래가래들을 지난 한천은 남쪽의 진천군으로 흘러 미호천을 거쳐 금강의 수계를 이룬다.

 

마을 안 문화생활관 앞 마을유래비에 의하면, 본래 충주군 금목면(金目面) 지역으로 가래버들(먹버들)이 많아 가래들 혹은 유촌이라 하였다고 하나, 마을의 노인회장은 조선조 남이장군 시대에 ‘가래뭉지’라는 스님이 지금의 윗가래들(절골)에 사찰을 짓기 위하여 장호원에서 주춧돌로 쓸 큰 돌을 옮기는 중 걸빵이 끊어졌는데 그 스님의 이름에서 가래들이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가래들 마을전경. 최근 평택제천고속도로와 21번 국도로 주변이 어수선하여졌지만, 유촌리 마을 안은 무척 조용하고 평화롭다]

 

최근까지도 가래버들 숲이 마을 안에 있었으나 현재의 경로당을 지으면서 모두 잘라 내었다고 한다. 행정적으로는 1906년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와우리(臥牛里)·촌서리(村西里)·촌동리(村東里)·한삼리(閑三里)의 일부를 병합하고 유촌리라하여 금왕면에 편입되었다.

 

유촌리는 윗가래들, 아래가래들, 과수원거리, 머우럭지, 광정이, 구렁지 등 크고 작은 6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있다. 전체 70여 가구 중 55가구 대부분의 주민이 윗가래들과 아래가래들에 거주한다.

 

두 사람의 조선조 개국공신을 배출한 한양조씨 세거마을

 

유촌리는 한양조씨의 세거마을이다. 고려 때 첨의중서사인(僉議中書舍人)을 지낸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조경과 조도흥을 입향조로 한다. 한양조씨 가문에서는 조선 개국공신 2명이 배출되었는데,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趙仁沃)과 태종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조온(趙溫)이다.

 

조인옥의 후손인 조경(趙經)이 임진왜란 후 금왕읍 유촌리에 와서 세거하였고, 또 다른 일파인 조도흥은 음성읍 용산리 생골에 와서 세거하였다. 한양조씨는 금왕읍 삼봉리와 유촌리 일대에 40여 호가 살고 있고, 음성읍 용산리 생골에도 20여 호 살고 있다. 한양조씨 문중의 역사적인 인물 중 두 사람, 조인옥과 조륵을 집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임진왜란 후 유촌리에 정착한 한양조씨 조경의 유허비] 

 

조인옥의 형은 이성계의 자부(매형)이었다. 1387년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위화도에 있을 당시 회군할 것을 건의하였다. 회군을 한 뒤에는 구세력을 숙청하는 작업에 가담하면서 바로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이성계가 만류하였다. 1390년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뜻을 모아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해 정도전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개국에 큰 공을 세우면서 중추원부사에 올랐으며,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유촌리 마을 안에 조인옥을 배향한 충정사(忠靖祠)가 있다.

 

 

[조선조 1등 개국공신 조은옥을 배향한 ‘충정사’]

 

마을 어귀엔 조륵의 ‘자린고비 유래비’

 

다른 한사람은 ‘자린고비’로 널리 알려진 조륵. 그는 이웃 금왕읍 삼봉리 출신으로 가족과 식사를 하며 천정에 메달아 놓은 굴비를 두번 보면 “짜니 물 마셔라”로 널리 알려진 그의 일화 이외에도 다른 여러 이야기가 있다.

 

쉬파리가 장독에 앉았다가 날아가자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고 “저 장도둑 놈 잡아라”하고 외치며 단양 장벽루까지 파리를 쫓아갔고, 무더운 여름철이 되어 어쩌다 부채를 하나 장만하였는데 부채가 닳을까 부채를 벽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서 머리만 흔들었다고 하니 상상을 뛰어넘는 근검절약이다.

 

그런 그도 그의 환갑에 이르러서는 “그 동안 나 혼자 잘 살려고 구두쇠 노릇을 한게 아니오. 여러분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한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재산을 모았소. 환갑날인 오늘 부로 나의 전 재산을 어려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겠소” 이후, 그는 ‘자린고비’가 아닌 ‘자인고비(慈仁考碑)’라고 불리웠다는 일화이다.

 

 

[마을 어귀에 자리한 ‘자린고비’ 조륵선생 유래비]

 

조륵의 출생지는 금왕읍 삼봉리이고 그곳에 생가도 있지만, 유촌리가 한양조씨 세거마을이어서 마을 어귀에 “자린고비 조륵선행 유래비”가 자리하고 있다. 유촌리 70여 가구 가운데 대략 절반 정도의 가구가 농사를 짓고, 그 중 수박 시설하우스도 80여 동이 있는데 ‘자린고비’를 상표로 사용하고 있다.

 

유촌리에도 젊은 세대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거주하고 있어 주민 평균연령은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음성읍보다 주민 수가 많은 금왕읍에 속해 있어 초중고생이 6~8명 정도에 전체 70여 가구, 주민 100여 명 중 절반이 농사, 과수, 축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사는 수박, 벼농사와 인삼, 참깨 등의 밭작물을 경작하고 있다.

 

매년 1225일의 대동계는 다른 마을과 큰 차이가 없지만, 대신 정월대보름 때는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를 성대히 치루는데 대대로 내려오는 마을의 큰 행사이다. 마을의 경로당은 1년 내내 개방을 하고, 특히 매년 12월부터 3월까지는 읍장 등 관내 인사를 초빙하여 강의를 듣기도 하는 등 학생들을 위한 동아리·학습방으로도 활용을 한다.

 

효자효부가 많은 화목한 ‘충효마을’

 

마을입구에는 ‘충효마을’이라는 마을별칭이 붙어있다. 조유한 효자정문과 수양대군이 명나라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갈 때 동행하였던 민발 장군의 묘가 마을에 있기에 오래전부터 그리 불리워 왔다. 마을 주민 간의 단합과 화목은 금왕읍 내에서 손꼽힐 정도이다.

 

 

[금왕읍 유촌리, '충효마을'이라는 별칭이 붙은 마을]

 

마을 주변에 자리한 22개 개별공장의 여파가 수시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의 정적을 깬다. 마을 입구에는 대형차들이 마을 안으로의 진입을 막는 마치 큰 사찰의 솟대처럼 생긴 우람하고 키 큰 쇠기둥이 양쪽에 서있다. 인근의 공장을 네비에 입력하면 마을 안으로 진입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을 앞 운치있는 가로수 산책로도 이제는 하루 수백 대 오가는 대형차량의 위협으로 걷기 두려운 길이 되었다. 자치단체에서 추진하였던, 또는 허가를 내주었던 산업화 정책에 의한 산업시설 들이 마을 주변에 몰려들었지만 정작 마을 주민들은 취업 등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을 받는 것이 없다. 반대로 마을 개천에서 물고기가 사라지는 등 환경, 건강 등 잃는 것 뿐이어서 너무 아쉬울 뿐이다.

 

 

우리동네 사람들:

 

조성호 마을주민(88)

한양조씨 23세손으로 유촌리에서 태어났다. 무극초-무극중(졸업후 4년제인 청주중학교에 편입)-청주고-청주사범학교를 마치고 평생을 교직에 몸담았다. 평교사로부터 시작하여 교감, 교장을 거쳤고, 봉직한 학교도 북한산초교, 잠실초교,.. 동명초교 등 헤아릴 수 없다. 40여년 서울에서의 교직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내려와 선조 조인옥을 배향한 사당 ‘충정사’ 인근에서 2000여 평의 집과 정원을 가꾸며 생활하고 있다. 유촌리 마을을 위하여 전국 어느 이() 단위 마을에서 보기 힘든 마을기()를 만들어 마을행사에 사용하고 있으며, 70세 대 때에는 한양조씨 종친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도 유촌리 마을의 정신적 지주로써 마을의 단합을 위하여 앞장서고 있다.

 

정홍구 노인회장(76)

연세에 비하여 무척 건강한 정 노인회장은 지난 4월까지도 돌아가신 아버님을 모신 이름난 효자. 지금도 벼농사 1000, 밭농사 600평을 경작한다. 22녀와 4명의 손자·손녀가 있는 다복한 가정이지만 자녀와 손자녀 들은 전부 타지에서 생활하고 내외 두 분이 유촌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매일 스트레칭과 자전거를 타며 건강관리를 한다. 유촌리 토박이로 사회복지사 자격도 보유하고 있다.

 

장영환 이장(53)

유촌리에서 태어나 초--(무극고) 전부 금왕읍에서 마쳤다. 두 차례 4년의 이장 임기를 마치고, 4년을 건너뛰어 2년 전 다시 이장을 맡았다. 소금과 작물 묘종 등 마을 주민들이 필요한 사소한 것들도 가가호호 전달하여 주는 등 마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앞장서는 장 이장에 대한 마을 주민의 칭찬이 자자하다.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트렉터, 콤바인, 이앙기, 건조기 등의 장비와 농산물저장고의 시설 등을 마을 주민을 위하여 사용한다. 22녀의 가장이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널리 소문난 효자로 10년 전 농협중앙회가 주관하는 전국 효자·효부상을 수상하였다. 수박하우스 40(15,000통 수확가능) 6,000()의 인삼을 경작하고 있다-음성자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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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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