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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 빌라] ["이병철 회장 비싸면 안 사, 이건희 회장은 값 안따져"]

뚝섬 2025. 1. 17. 06:34

[게티 빌라]

["이병철 회장 비싸면 안 사, 이건희 회장은 명품 값 안따져"]

 

 

 

게티 빌라

 

미국 석유 재벌 J 폴 게티(1892~1976)는 1966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부자로 등재된 거부였다. “돈을 셀 수 있다면 진정한 부자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다. 그런데 돈 씀씀이가 한없이 인색했다. 옷과 구두는 10년 넘게 입었고 호텔에 투숙하면 양말을 직접 빨아 신었다. 집에 손님을 초대해놓고 전화는 바깥 공중전화를 쓰라 했다. 1973년 마피아가 당시 16세이던 손자를 납치하고 귀를 잘라서 보내며 거액을 요구했는데도 흥정으로 몸값을 깎아 수전노라는 오명도 얻었다.

 

▶그런데 미술품 수집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1930년대부터 고대 조각, 중세의 필사본, 인상파 회화 등을 모았다. 미술품을 혼자 즐기지 않고 자신이 살던 저택을 미술관으로 개조해 개방했다. 1976년 사망할 때는 미술품 수집과 전시에 쓰라며 유산 7억달러도 기부하며 무료로 일반에게 개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 아카이브 업체 ‘게티 이미지’도 그의 손자가 세운 회사다.

 

▶게티는 수장품이 늘어나자 태평양과 접한 LA 팰리세이즈의 말리부 해안에 고대 로마 대저택을 재현한 미술관 게티 빌라를 지었다. 이번 LA 화재 중 팰리세이즈 지역 화재가 최악이었지만 게티 빌라는 주변 건물과 달리 홀로 무사했다. 첨단 방화 시스템과 직원들의 철저한 대비 덕분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게티 빌라에서 동쪽으로 30분 차를 달리면 샌타모니카 산맥 중턱에 게티 재단의 또 다른 미술관인 게티 센터가 나타난다. 이 일대가 2018년 화재로 서울 면적의 절반 가까이 탔는데 그때도 게티 센터는 건재했다.

 

▶게티 센터는 ‘백색의 마이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1997년 완공했다. 강릉 씨마크 호텔을 설계한 사람이다. 마이어는 산불이 흔한 LA 특성을 설계에서부터 반영했다. 유명한 흰색 외벽은 내연성 석재인 트래버틴으로 마감했고, 건물 밖 정원에 설치된 방화용 스프링클러는 약 400만리터의 물을 담은 대형 지하 수조와 연결돼 있다. 전시실에는 연기가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가압 장치를 설치했다. 정원 조경수도 불이 잘 붙지 않는 것으로 심었다.

 

▶게티 빌라와 게티 센터에는 8000년 전 조각부터 현대 회화까지 미술품 수만 점이 전시돼 있다. 반고흐의 ‘아이리스’, 모네의 ‘건초더미’, 루벤스의 ‘한복을 입은 남자’ 등도 모두 무사했다. 미술관 측은 화재가 수습되는 대로 다시 전시를 재개한다고 한다. LA를 넘어 세계적 명물인 두 미술관이 안전하다니 다행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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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 비싸면 안 사, 이건희 회장은 명품 값 안따져"

 

이종선 前 호암미술관 부관장, 삼성家 컬렉션 후일담 담아 출간 

"두 분 수집 스타일 전혀 달라… 이병철 회장, 가야 금관 아꼈고 이건희 회장은 '백자 마니아'" 

 

국보 제138호 가야 금관과 국보 제309호 백자 달항아리(아래). 부자(父子)가 가장 아낀 작품을 물었더니 이종선씨는“이병철 회장은 가야 금관, 이건희 회장은 백자”라고 꼽았다. /조선일보 DB·김영사 제공

"이병철 회장은 '청자 마니아', 이건희 회장은 '백자 마니아'였어요. 수집 철학도 두 분이 확연히 달랐지요. 이병철 회장이 '절제의 미학'이라면 이건희 회장은 '명품주의'라고 할까요." 20여년간 삼성가(
)의 명품 컬렉션을 주도하고 박물관 건립과 성장을 이끌었던 이종선(68) 전 호암미술관 부관장이 입을 열었다. 호암미술관에서 삼성미술관 리움까지,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수집 스타일과 컬렉션 과정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담은 '리 컬렉션'(김영사)이다. 26일 만난 이씨는 "삼성가의 명품들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이제는 꺼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조교를 하다 1976년 삼성문화재단의 호암미술관 설립을 위해 특별 채용됐다. "가난한 형편에 외국 유학은커녕 대학원 이수조차 불투명한 상황에서" 은사인 고고학계 원로 김원룡 교수가 느닷없이 연구실로 그를 불렀다. "이군, 삼성으로 가게!" 그는 "그 한마디로 20년이라는 젊음의 시간 동안 삼성 부자(
父子)의 갈망을 보필하는 그림자가 됐다"고 서문에 썼다. 이씨는 호암미술관 전문연구원에서 시작해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부관장까지 지내며 명품 수집을 도맡았다.

곁에서 지켜본 두 사람의 수집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이병철 회장은 수집을 서두르지 않았고 비싸다고 판단되면 누가 뭐래도 구입하지 않았어요. 청자, 금관처럼 좋아하는 패턴이 있었죠. 그에 비해 이건희 회장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값을 따지지 않고, 좋다는 전문가의 확인만 있으면 별말 없이 구입했어요. 특급이 있으면 컬렉션 전체의 위상이 덩달아 올라간다고 믿었지요."

현재 서울의 삼성미술관 리움과 용인의 호암미술관에는 국보 37점, 보물 115점이 소장돼 있다. 개인 수집품으로 '국보·보물 152점'이란 숫자는 전무후무한 일. 우리나라 대표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과 호림박물관의 국보·보물이 합해서 70여점이다. 이씨는 "이건희 회장의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 때문"이라며 "이 회장의 지론은 명품 한 점이 다른 많은 수집품의 가치를 올려주고 체면을 세워준다는 거다. 그래서 해당 분야, 예를 들어 도자기라면 청자에서, 금속 유물이라면 금관에서 국보를 수집했다"고 했다.

작품 구입에 얽힌 뒷얘기가 흥미진진하다. 그는 이병철 회장이 가장 아끼던 유물로 가야 금관(국보 제138호), 청자진사주전자(국보 제133호),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국보 제218호)를 꼽았다. 특히 가야 금관은 호암이 잠 못 이루며 아낀 첫째 보물이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소재를 파악해야 직성이 풀릴 만큼 애착이 대단했단다. "호암은 돌아가실 때까지 유물의 진짜 연대를 몰랐어요. 실제 5~6세기 금관인데 처음 유물을 소개한 사람이 회장 앞에서 수백년 앞선 2세기 금관이라고 과장을 했거든요. 회장의 믿음이 워낙 강해서 누구도 금관의 실제 연대를 알리지 못했지요. 저도 '5세기'라고 한번 꺼냈다가 눈 흘김을 당한 이후로는 다시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고려 불화의 가치를 국내에서도 모르던 시절, 상공부 고시를 거쳐 해외에서 처음으로 정식 '수입'한 작품이 '아미타삼존도'다. 1979년 일본 나라시 '야마토분카칸'에서 고려 불화 전시회가 열린 후 매입 작전에 들어갔다. "그때 일본에서 한국에는 안 팔겠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호암은 불화를 일단 미국으로 빼내라고 지시했고, 미국 현지의 삼성물산 지사를 동원해 비밀리에 구입했다가 국내로 들여왔지요." 당시 우리나라엔 해외 미술품 수입에 대한 통관 절차가 없었다. 결국 '상공부 1호' 고시 작업을 거쳐 문화재를 '역수입'하는 절차를 만든 후 불화를 들여왔다는 얘기다.

조선 중기 화가 이암(
李巖)의 '화조구자도'(보물 제1392호)는 하마터면 김일성 컬렉션이 될 뻔했다. "어느날 일본에서 활동하던 사업가가 찾아왔는데 조선 초 대나무 그림의 대가 이수문(李秀文)의 '묵죽화첩'이 김일성 컬렉션으로 들어갔다는 겁니다. 일본에 있는 우리 문화재들이 조총련에 의해서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거예요. 그때 그가 내민 게 이암 그림이었어요. 가만 놔두면 북한으로 가겠다 싶어서 이건희 회장께 보고하고 우여곡절 끝에 구입했지요."

그는 "삼성가의 수집은 각종 사회적 사건들에 얽히고설킨 오해들이 쌓여가며 순수한 개인의 열망으로만 비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이 수집을 시작한 1950년대 말에는 어느 누구도 문화에 투자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며 "수집은 돈으로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그들의 갈망이 없었다면 수많은 명품을 오늘날 대중에게 선보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1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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