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에게 땅 공짜로 나눠준다"더니, 김일성이 북녘의 지주 됐다]
[남북 농지개혁의 차이]
"인민에게 땅 공짜로 나눠준다"더니, 김일성이 북녘의 지주 됐다
무상 몰수·무상 분배 내건 北 1946 토지개혁 실체
일제강점기 소작농은 지주에게 소출 ‘절반’을 소작료로 지급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일부 악덕 지주는 소출의 60~70%를 가져갔고, 예외적으로 ‘착한 지주’는 30%만 받기도 했다. 해방 당시 북한에서는 농가 호수의 4%에 불과한 지주가 농경지의 58%를 소유했다. 그에 반해 농가 호수의 57%에 달했던 빈농이 소유한 농경지는 5.4%에 불과했다. 농촌의 가구 구성은 농장주 1%, 자작농 25%, 자소작농 31%, 소작농 43%로 전체 농가 4가구 중 3가구는 남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1946년 2월 9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인민위)가 출범했고,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3월 5일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내세운 토지개혁이 시작되었다. 토지개혁은 전광석화처럼 추진돼 불과 20여 일 만에 완료되었다. 5정보(1만5000평) 이상이 무상 몰수 대상이었지만, 그 미만이라도 소작 경영지는 모두 몰수되었다. 몰수된 소작지는 그곳에서 농사짓던 소작인에게 ‘영순위’로 분배되었다.
해방된 지 반년 만에 인민위가 평생 소원이었던 ‘내 땅’을 ‘공짜’로 나눠주니 농민들은 ‘김일성 장군의 은덕’에 감격해 환호했다. 1933~34년 조선일보에 소설 ‘고향’을 연재해 최고의 농민 문학가로 필명을 떨친 이기영은 1946년 2월 월북해 토지개혁 추진 과정을 목도할 수 있었다. 1948년 출간한 장편소설 ‘땅’에서 이기영은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옮겼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 경축 대회(1946년 2월 9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성립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사실상 북한의 단독정부 역할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토지개혁이 반포되고 며칠 뒤에 이 고을 읍내에서도 농민들은 시위 운동을 성대히 거행했다. 그날 낮에 순옥은 군중의 함성을 듣고 큰길 거리로 쫓아 나왔다. 길가의 좌우에는 벌써 구경꾼들이 빽빽하게 겹겹이 둘러섰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만세’ ‘토지는 오직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만 주자!’ 오래도록 헐벗고 굶주리던 농민들이 이제 살길을 찾았다고 기뻐 날뛰면서 산천이 울리도록 만세를 부르는 환호성은 구경꾼들까지 가슴을 뛰게 하는 장엄한 장면을 이루었다.”
월북 문인 대부분은 숙청되었지만, 김일성의 총애를 받은 이기영은 1984년 사망해 애국열사릉에 묻힐 때까지 원로 소설가로 깍듯이 예우받았다. 이기영의 맏며느리 성혜림은 이혼 후 김정일과 동거해 김정남을 낳았다. 이기영의 셋째 아들 이종혁은 2018년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해 이재명 당시 경기도 지사와 만났고, 남한에서 출판된 이기영의 저서를 선물받았다.
북한 리종혁(가운데) 조선아태위 부위원장이 2018년 11월 ‘제1회 아시아·태평양의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 대회’참석을 위해 경기도를 방문해 당시 이재명(왼쪽) 경기지사, 이화영(오른쪽) 경기도 평화부지사와 기념 촬영을 했다. /연합뉴스
‘토지는 농민의 것’이 되었다고는 하나, 농민들은 분배받은 땅을 마음대로 팔거나 담보로 잡힐 수 없었다. 인민위는 농민에게 ‘소유권’을 넘겼다고 생색을 냈지만, 농민이 실제로 건네받은 것은 매매와 저당이 금지된 토지의 ‘경작권’이었다. 인민위는 매매와 저당을 허용했다가 또다시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홍보했지만, 인민위의 뒤통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토지개혁이 완료된 지 3개월 만인 6월 27일 인민위는 수확량의 25%를 현물세로 징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애국미와 각종 잡세까지 포함하면 농민들이 부담한 세율은 30% 내외였다. 심한 경우 40% 이상까지 있었다. 농민들은 왜정 때 지주에게 바치던 소작료를 나라에 현물세로 대상만 바꿔 바쳐야 했다.
공산주의를 하겠다면서 ‘토지는 농민의 것’이라고 선동한 것은 그 자체가 기만이었다. 공산국가에서 토지는 ‘당의 것’ ‘국가의 것’이어야만 했다. 6‧25전쟁 휴전 이후 김일성은 “빈농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협동 농장을 조직하자”는 이른바 ‘농업 집단화’라는 명목하에 그동안 감춰놓았던 마수를 드러냈다.
북한의 토지개혁 농민대회. 이기영의 소설 '땅'(1948)에서 볼 수 있듯, 북한 전역에서 토지 개혁을 지지하는 농민대회가 개최됐다. /국사편찬위원회
1954년 1월 당중앙위는 농업협동조합의 세 가지 표준 형식을 제시했다. 제1 형식은 10가구 내외가 조합을 이뤄 토지와 농기구는 사적으로 소유하고, 노동력만 공동으로 이용하는 형식. 제2 형식은 협동조합 가입 시 사적 소유인 토지를 출자하여 수확량의 20% 이하를 출자한 토지 비율만큼 분배하는 형식. 제3 형식은 조합원의 토지, 농기구, 가축 등을 모두 조합에 통합하고 오직 노동의 질과 양으로만 분배하는 완전한 사회주의적 형식이었다. 제1 형식은 제시만 되었을 뿐이고, 처음부터 제2, 제3 형식으로 협동 농장을 조직했다.
속도전으로 이루어진 토지개혁과 달리 ‘농민의 자발적 참여’를 표방한 농업 집단화는 1954년에서 1958년까지 5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추진되었다. 6‧25 이후 급격히 늘어난 빈농들이 가장 먼저 조합에 참여했다. 혼자서는 빈곤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 농민끼리 힘을 합치고, 국가가 조합을 지원하면 생활 향상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조합 가입을 주저하던 중농층의 가입을 유도하기 위해 북한은 조합에 농기계, 비료, 종자, 가축, 영농 자금 등을 우선 배급‧융자하는 특혜를 부여했다. 그만큼 자영농은 배급‧융자에서 차별받았고, 농번기에 노동력을 지원받을 길을 완전히 차단당했다. 북한은 조합 우대를 통해 자영농의 ‘자발적 조합 참여’를 유도하겠다고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자영농을 차별‧탄압함으로써 조합 참여를 ‘강요’했다.
집단화가 막바지에 이른 1957년 12월 김일성은 “우리 인민들은 멀지 않은 앞날에 이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을 쓰고 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듬해 9월 당중앙위는 농업 집단화가 완료되었음을 선포했다. 북한에서는 더 이상 자기 땅을 ‘소유’한 농민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토지를 '무상 분배' 받고 뿌듯해 하는 북한 농민. 하지만 매매, 저당이 금지되었고 매년 25%의 현물세를 내야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1950년 대한민국 정부는 모든 소작 농지와 3정보(9000평) 이상을 한 지주가 소유한 농지를 정부가 ‘유상 매수’하여 소작인에게 ‘유상 분배’하는 농지개혁을 시행했다. 지주들에게 연평균 수확물의 150%에 해당하는 ‘지가 증권’을 지급하고,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들에게는 30%씩 5년에 걸쳐 대금을 상환하도록 했다. 지주에게 현금도 아닌 지가 증권으로 보상해 준 금액은 시세에 현저히 못 미쳤다. 더욱이 6‧25전쟁 전후 심각한 인플레이션 탓에 ‘매수’라기보다는 ‘몰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농민들은 북한에서 ‘매년’ 납부해야 하는 현물세 수준의 토지 대금을 ‘5년’만 납부하면 되었고, 그나마도 극심한 인플레이션 덕분에 부담이 훨씬 줄어들었다.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표방한 북한의 토지개혁이 기만이었듯, ‘유상 매수 유상 분배’를 표방한 남한의 농지개혁 또한 실제와는 달랐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제121조)고 명시했다. 스스로 농사를 지어 농민임을 증명하지 않는 한, 대통령이라도 ‘원칙적’으로 농지를 소유할 수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참고 문헌>
김성욱, ‘한국의 통일과 토지소유제도의 재편’, 비교사법 제35집, 2006
서동만,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선인, 2005
손연우, ‘남북한 해방 전후 농지 및 토지 개혁과 통일대응 법제연구’, 한국법제연구원, 2018
이기영, ‘땅’, 풀빛, 1992
이주철, ‘북한의 토지개혁’, 내일을 여는 역사, 2000
조수룡, ‘자발과 강제 사이에서’, 통일과 평화 제13-2집, 2021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조선일보(2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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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농지개혁의 차이
[차현진의 돈과 세상]
개혁이 혁명보다 파괴력이 작다는 생각은 틀렸다. 농업 기술과 생산성 향상을 ‘농업혁명’이라고 부르고, 농촌을 둘러싼 사회변화를 ‘농지개혁’이라 부른다. 농지개혁은 농업혁명보다 파급력이 절대 작지 않다.
15세기 이전 유럽 인구의 대부분은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면서 영주의 명령에 따라 농사를 짓고 숙식을 해결했다. 그런데 ‘매뉴팩처’라는 공장형 일자리가 등장하면서 인구 이동과 더불어 영주-농노 관계가 해체되었다. 영주는 지주(landlord)가 되어 임차료를 받고, 도시로 떠나지 않은 농노들은 농업 노동자(tiller)가 되어 임금을 받았다. 그들 사이에 차지농(借地農, socman)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했다. 지주에게 땅을 빌려 농장을 운영하는 경영인이다. 차지농 세력이 커져서 1832년 마침내 선거권까지 획득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가 싹텄다.
자본주의는 종교, 직업선택, 주거이전, 계약의 자유 등 중요한 원칙의 틀 속에서 천천히 진화했다. 공산주의는 달랐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지배한다는 목표가 모든 원칙을 압도하며 돌진했다. ‘토지(농지)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가 지주의 땅을 몰수한 것이 시작이었다.
해방 직후 북한은 급격한 변화를 피하려고 했다. 지주와 소작농이 수확물을 3대7로 나눠 갖는 ‘3·7제’를 통해 지주계급과 타협했다. 그런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의 인기가 치솟자 김일성이 초조해졌다. 1946년 3월 돌연 3·7제를 폐기하며 소비에트식 토지개혁으로 급선회했다.
남한은 신중했다. 1948년 8월 헌법에 ‘경자유전(land to the tillers)’ 원칙을 담고,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을 제정했다. 사회의 기본 골격을 바꾸는 그 개혁은 1960년대 초까지 더디고 힘들게 진행되었다. 정부가 무능한 탓은 아니었다. 남의 재산을 빼앗는 개혁은 쉽다. 조금씩 양보하며 다 함께 전진하기가 훨씬 어렵다.
-차현진 예금보험공사 이사, 조선일보(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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