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도 숨어들어 숯 굽던 진천 땅
은둔한 판화가 김준권, 한국적 판화 세계 만들어
가사문학 거두 송강 정철, 351년 前 진천으로 移葬
非山非野, 심성을 너그럽게 하는 풍경들…
충북 진천은 은둔자의 땅이다. 19세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진천 땅으로 숨어들었다. 경기도
안성과 맞붙은 백곡은 숨어 살기에 좋았다. 사통팔달 길이 뚫려 있으되 얕은 산속에 숨으면 관에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산속에서 교도들은 숯을 굽고 옹기를 구웠다. 가마가
쉬는 날이면 교도들은 가마 속에서 성경을 읽고 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대한민국 숯 70%는 진천 숯이고 그중 70%는 백곡 숯이다. 1992년 그 백곡 은둔지에 김준권(60)이 숨어들었다. 김준권은 판화가다.
은둔한 판화가 김준권
김준권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1960년대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판잣집에 살면서 부모가 돈을 버는 동안 김준권은 그림을 그렸다. 반대를 뿌리치고 홍익대 미술대에 들어갔다. 75학번 미술학도는 1984년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라는 참여작가 전시회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했다가 압수를 당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리고 1989년 전교조에 가입했다가 해직됐다.
만 3년 동안 전업 활동가로 인생을 살았다. 1991년 명지대 강경대 사망사건 걸개그림을 비롯해 웬만한 시위 현장 걸개그림은 다 그가 그렸다. 판화로 찍으면 동료들이 복사를 해서 초대형 걸개그림으로 만들었다. 인생은 화가에서 판화가로 흘러갔다. 소위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시작한 판화가 업이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우리가 거리로 나가는가. 민족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가. 미술로 공동체를 실현할 방법은 따로 있다'고. 또 생각했다. '판화라는 장르가 이 엄한 시대 유행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우리 인쇄는 거의가 목판이었다. 팔만대장경도 목판인쇄가 아닌가.' 전쟁과 산업화로 초토화돼 버린 미술적 맥락을 잇겠다는 생각을 했다.
1992년 김준권은 사회운동을 떠나 진천 백곡면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가깝되 숨어 살기 딱 좋았다. 천주교도들이 숨어든 이유와 동일했다. 남의 땅 빌려 움막을 짓고 목판을 새겼다. 왼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칼을 놀린 덕분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엄지발가락처럼 넓적하고 커졌다. 그 기형적인 손으로 스쿠터를 몰고서 김준권은 진천 곳곳을 쏘다녔다. 그가 말했다. "세상은 단색이 아니었다. 한국, 정말 컬러풀한 땅이었다." 그래서 그는 1980년대 날카로운 단색을 버리고 채색 판화를 택했다. 복사꽃 핀 진천 들판을 그렸고 대숲 가득 부는 바람을 그렸다.
花雨-2011 133×93cm 유성목판화 2011년 김준권 작품.
활황이던 1990년대 김준권은 잘나가는 판화가 반열에 올랐다. 중국에서 3년 동안 공부도 했다. 일본 공방에 가서 6개월 동안 일본 판화 우키요에도 공부했다. 결론을 내렸다. "한국적인 판화를 한다."
서양 유성 잉크를 원판에 발라 서양 판화지에 찍어내는 서양식 판화 말고 한지(韓紙)에 수성 먹(墨)으로 찍는 수묵 판화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먹은 번지고 한지도 번졌다. 먹이 종이 속으로 스며들면서 생기는 은근한 효과는 기존 판화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세계였다. 민족공동체와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 진천 첩첩산중에서 완결된 것이다.
24년 전 그가 만든 작품과 지금 작품을 보면 도저히 같은 작가가 한 일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여유와
화려함, 너그러움과 관용이 날카로운 비판을 대체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올바르게 돌아갔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천 땅에서 판화가는 여유를 얻었고
날카로움이 무뎌졌으며 직설과 투쟁 대신 은유와 여백을 얻게 되었다.
어은마을 은둔자, 송강 정철
351년 전인
1665년 문인(文人) 하나가 죽어서 진천으로 왔다. 호는 송강이고 이름은 정철이다.
정철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가사문학의 선구자요 정치가다. 그는 지금 진천 문백면 어은마을
환희산 기슭에 묻혀 있다. 연유는 이렇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 정철은 정치가였다. 술을
좋아하고 문(文)에 능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가사들은 대입
시험 필수 암기사항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말 곧게 하는 덕택에 좌천도 여러 번 당했다. 선조 임금이 '항상 이만큼만 부어 마시라'며 내려준 은잔을 정철은 크게 늘려서 마셨다고 한다. 임진왜란 와중인 1593년 결국 선조가 강화도로 귀양을 보내 그곳에서 죽었다. 죽어서
묻힌 곳은 선산이 있는 경기도 고양이었다.
진천 환희산에 있는 정송강사에는 400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무렵 송강 정철이 경기도 고양에서 이곳 진천으로 이장됐다.
느티나무 왼편으로 정철이 잠든 무덤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박종인 기자
1665년 손자인 정양이 진천현감으로 부임했다. 정양은 성리학 거두 우암 송시열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괴산으로 낙향하던 송시열이 진천을 지날 때 정양이 말했다. "할아버지 묘소에 물이 차서 골치다. 묫자리를 봐주시게." 그때 송시열이 봐준 터가 문백면 환희산 기슭이었다. 그해
정양은 아버지 정종명과 함께 정철을 어은마을로 이장했다. 정철 사당 정송강사가 그때 세워졌다.
정송강사에는 신도비와 후대가 세운 시비가 있다. 신도비 앞에는 400년을 산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산소로 가는 길은 땀을 제법
내야 하는 깔딱고개다. 산소 터는 무식한 사람이 봐도 명당이라 부를 만큼 온종일 양지바르고 아늑하다. 정철이 잠든 곳 이름은 어은(漁隱) 마을이다. 어부가 숨은 땅이다.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숨었으니, 송시열은 정철로
인해 성리학과 노론의 부활을 꿈꿨을지 모를 일이다.
은둔지를 잇는, 농다리와
보탑사
진천에는 농다리가 있다. 고려 말에 세워진 농다리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고종(1213∼1259) 연간에
권신 임연이 고향 마을에 세웠다고 하니 근 800살을 먹은 다리다. 한·일 강제합방과 6·25 전쟁
때 다리가 울어대 주민들이 잠을 못 잤다는 말도 전한다. 다리 한편에 있는 초평저수지는 1958년 만들어졌다. 21세기 들어 농다리에서 호수 주변으로 나무
데크가 깔려 보기 드문 산책로가 생겼다.
800년 세월을 견뎌온 진천 농다리.
농다리에서 나와서 시계 방향으로 남진하면 정송강사가 나오고 김유신 탄생지가 나오고 보탑사가 나온다. 정송강사와 나이가 같은 노거수(老巨樹)의 위용에 사람들은 놀란다. 김유신이 진천 사람이라면 또 놀란다. 만뢰산 산중에서 경주 황룡사 구층탑을 재현한 웅장한 보탑사 대웅전을 만나면 다시 놀란다. 순식간에 우리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신라로, 신라에서 현대로 시간대를 뒤섞은 여행을 한 것이다. 그게 진천이다.
[진천 여행수첩]
〈볼거리〉
1. 한국목판문화연구소: 김준권 화백 작업 공간. 오는 21일(토) 오후 3시 오픈스튜디오 행사가 예정돼 있다. 작업실 견학, 목판화 시연과 작품 관람 및 판매, 다과회가 준비돼 있다. 주차는 물안뜰체험관 주차장에. 백곡면 사송2길 66-1, (070)7644-5592
2. 물안뜰체험관: 참숯찜질방과 숯제품 판매, 민박, 카페테리아, 식당도 있다. 목판화
체험교실도 운영한다. 백곡면 백곡로 964 www.baekgok.co.kr, (043)536-0411
3. 정송강사:
송강 정철 영정을 모신 사당. 옆에 묘소도 있다. 묘소로
가는 길은 제법 급한 오솔길이다. 송강로 523,
(043)532-0878
4. 농다리와 초평호: 농다리 전시관을 지나 주차장 넓다.
다리 건너 초평호 전망대와 하늘다리로 연결되는 데크산책로가 좋다. 농다리로 1032-11, (043)539-3862
5. 김유신 탄생지: 도로변에 공원과 복원한 생가가 있다.
생가 앞 풀밭은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공간이다. 생가 뒤로 산 정상 김유신 태실로 가는 길이
나 있다. 김유신길 170-4, (043)539-3840
6. 보탑사: 경주 황룡사 구층탑을 모델로 한 목조 대웅전. 60m에 이르는 목조건물이 압권이다. 진천읍 김유신길 641, (043)533-0206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6-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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