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민주주의를 '괴물'로 만드는 사람들] 투표 다음날 "EU가 뭐지?"

뚝섬 2016. 7. 2. 09:59

브렉시트 선택한 영국민들, 투표 다음날 "EU가 뭐지?"

공동체의 운명을 포퓰리즘에 맡길때 민주주의는 괴물이 된다

 

밥그릇 다 비우고 "그런데 누구 생일이에요?" 묻는 것도 이보다는 낫다. 오늘의 유머난에나 실릴 만한 내용이 버젓이 기사로 나왔다. 브렉시트 투표가 끝난 후 영국 구글에서 둘째로 많이 검색된 질문 중 하나가 "EU가 뭐예요?"였다고 한다. 국민의 72%가 넘게 투표한 사안이다. 순서가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뀌었다. 탈퇴가 좋은지 잔류가 좋은지를 따질 생각은 없다. 그건 앞으로 영국과 EU가 하기 나름이다. 정책보다 중요한 건 누가 어떻게 원칙을 지켜가며 실행하는 것이냐다. 언론은 직접민주주의의 폐해라기보다는 정치인 선동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아니다. 정치인들은 거들기만 했을 뿐 직접민주주의의 막장을 제대로 보여준 사례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의 아테네 이야기를 해보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내전이 종반으로 치닫던 무렵 둘은 바다에서 한판 크게 붙었다. 승리는 아테네 해군이었다. "역시 우리는 바다에서 안 돼" 하며 스파르타가 평화조약을 만지작거릴 때 아테네에서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스파르타 해군이 패퇴할 때 아테네 함선도 꽤 많이 손상된 상황이었다. 아테네 장군들은 스파르타를 추격해야 할지 부서진 자국 함선의 생존자와 사망자를 수습해야 할지 격론을 벌이다가 갑자기 불어온 태풍으로 인해 소득 없이 돌아온다.

 

문제는 다음이다. 아테네인들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장군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대신 시신을 수습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 이들을 법정에 세운다. 유가족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장군들은 조국을 섬긴 사람들을 구하지 않았다." 시민들 일부는 아테네가 처한 위기 상황을 내세우며 말렸고 장군들도 어쩔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설명했지만 군중의 고함과 야유 속에 묻혀버렸다결국 유죄판결이 내려졌고 장군들은 그 즉시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마지막 남아 있던 아테네의 인재 풀이 말라버렸다. 그 결과는? 스파르타는 이듬해 해전에서 아테네 해군을 전멸시킨다. 포로로 잡힌 아테네군은 모조리 수장되었다. 그리고 나라가 망했다. 포퓰리즘에 공동체의 운명을 맡길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안은 널렸다. 당장만 해도 사방에서 불을 때고 있는 개헌 문제 같은 게 그렇다. 의원내각제니, 이원집정부제니(둘은 같은 말이다), 대통령 중임제니 일반인들은 그 실효(
實效)를 잘 알 수 없는 내용을 놓고 찬반이 갈릴 경우 국민투표 하자는 소리 안 나온다는 보장 없다. 사견을 말하자면 의원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는 국회 권력을 더 늘리겠다는 욕심이다.

 

의회를 그렇게 못 믿어? 하실지 모르지만 그건 물어보는 사람이 더 잘 안다. 의회가 국민을 걱정하는 대신 국민이 의회를 걱정한 세월이 십수 년이다. 아무리 회칠을 해봐야 결국 대한민국을 책임자 없는 나라로 만들자는 얘기. 직접민주주의는 물론이고 민주주의도 얼마든지 괴물이 될 수 있다. 괴물의 밥은 괴물을 만든 사람들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EU가 뭐예요?" 묻는 질문에 답은 대체 뭐였을까. 이런 걸 묻는 수준이라면 답도 뻔하다. 아마도 "얼마 전에 우리가 탈퇴한 건데 나도 자세한 건 몰라요 ㅋㅋ" 하지 않았을까.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조선일보(1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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