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국왕도, 며느리도 암’ 신비주의 포기한 英 왕실] [런던대화재]

뚝섬 2024. 3. 25. 06:05

 

[‘국왕도, 며느리도 암’ 신비주의 포기한 英 왕실] 

[런던대화재] 

 

 

 

‘국왕도, 며느리도 암’ 신비주의 포기한 英 왕실

 

영국 윌리엄 왕세자의 부인 캐서린 왕세자빈(42)은 영국인들에게 왕실의 완벽함을 상징해온 인물이다. 캐서린은 6년 전 셋째인 루이 왕자를 낳은 날 출산 7시간 만에 빨간색 드레스에 하이힐 차림으로 병원을 나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첫째 조지 왕자, 둘째 샬럿 공주가 태어난 날에도 캐서린은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등장해 로열 베이비를 건강하게 출산한 세손빈으로서 대중의 기대에 부응했다.

▷하지만 그가 22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영상메시지는 영국은 물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1월 복부 수술 후 검사에서 암이 발견돼 화학치료를 받고 있다.” 암의 종류나 단계를 밝히진 않았지만 암 진단 사실을 직접 공개한 것이다. 올 들어 공개 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캐서린을 둘러싸고 최근 가족사진 편집 논란이 확산되며 건강 위중설, 부부 불화설 등 온갖 루머가 돌던 와중에 나온 발표였다.

왕실 인사들의 건강 상태를 공개하는 건 오래전부터 왕실의 금기였다. 약한 군주로 비쳐 외세 침략의 빌미가 될 수 있고, 대내적으론 민심의 혼란을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신비주의가 그런 명분으로 유지됐다. ‘군주제는 대낮의 햇빛을 받으면 마법이 사라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48년과 1950년 임신을 했을 때 왕실은 “여왕이 흥미로운 상태(interesting condition)에 있다”고만 했고, 여왕의 어머니가 1960년대 암을 앓았던 사실도 40년 뒤에야 전기 작가를 통해 알려졌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지난달 암 투병 사실을 공개했을 때 역사학자들이 “다른 군주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발표가 나온 데에는 국민들이 왕족의 일거수일투족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왕실의 치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순식간에 확산되는 환경에서 암을 숨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이후 군주제 지지 여론이 약화되면서 “불평도 하지 않고, 설명도 하지 않는다”는 왕실의 오랜 방침을 고수하기도 어려워졌다. 캐서린 왕세자빈 역시 암 치료를 받는 병원의 직원들이 자신의 의료기록에 접근한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카메라 앞에서 서게 됐다는 분석이 많다.

▷왕실 신비주의가 통하기 어려운 요즘 왕족들은 사치와 안락함을 누리는 대가로 대중의 동경과 비난을 한 몸에 받는 공적인 존재가 됐다. SNS 시대에 왕관의 무게를 견딘다는 건 사생활의 자유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한다. 다만 산악자전거를 타고 럭비를 즐길 정도로 건강했던 캐서린 왕세자빈의 부쩍 수척해진 얼굴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만들어진 이미지의 완벽한 왕실보다 국왕과 며느리가 줄줄이 암 치료를 받게 된 진솔한 모습의 왕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 동아일보(24-03-25)-

_____________

 

 

런던대화재

 

빵집에서 난 불 바람타고 번지는데 서로 책임 미루다 '골든타임' 놓쳐
진화 후 성난 민심 불 타올라 무고한 외국인을 사형에 처하기도
320년만에 빵집 후손이 사과했어요

영국 런던 서부의 24층 서민 아파트 '그렌펠 타워'에 지난 14일 화재가 발생해 600여 주민의 터전이 새카맣게 타버렸어요. 런던 경찰은 확인된 사망자만 79명(27일 기준)이며 파악하지 못한 사람까지 합치면 희생자가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어요. 이번 화재는 351년 전 발생했던 '런던 대화재'와 아주 닮은꼴인데요. 1666년 런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볼게요.

◇화재와 전염병에 취약했던 런던

1660년대 런던은 좁고 구불구불한 길 사이로 주택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고, 도심에만 8만명이 밀집해 위생 상태가 아주 열악했어요. 1665년에는 하루에 1000여 명씩 죽어나간 '런던 대역병'이 돌기도 했죠. 성벽 안 주거지에는 대장간, 유리 제조소 등 화재 위험이 큰 작업장들이 6층 정도 주택과 공존했어요. 건물 1층은 주로 작업실이나 상점으로 쓰였고, 2층부터는 거주지였어요. 1층 너비에 따라 세금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1층은 좁게 만들고 2층부터 넓게 지었죠. 창문을 열어 이웃집과 악수할 수도 있었다고 해요. 건물 위층이 옆 건물과 가까우면 불이 빠르게 번지겠죠? 실제 런던에선 1666년 이전에도 몇 차례 화재가 있었는데 크게 번진 적이 없어서 별다른 후속 조치가 없었대요.

1666년 9월 2일 오전 1시. 런던 왕실에 빵을 조달하는 토머스 패리너란 제빵사의 빵집이 불길에 휩싸였어요. 건조한 날씨와 심한 가뭄으로 볏짚과 목재가 바싹 말라있던 데다, 설상가상으로 동쪽에서 강풍이 불어와 서쪽으로 불길이 금세 번졌어요. 시민·상인들의 조합 형태로 운영됐던 민간 소방서는 "불난 빵집은 조합 소속이 아니다"는 이유로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어요. 책임자인 런던 시장은 한술 더 떴죠. 집주인들이 없다는 이유로 화재 현장 주변 건물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했어요. 게다가 불길을 보고 "여자가 오줌으로도 끌 수 있겠네"라는 망언을 남기고 자리를 떠버렸어요.


1666년 런던의 한 빵집에서 시작된 런던 대화재는 나흘 동안 집과 가게 1만3200채와 세인트폴 대성당까지 잿더미로 만든 뒤 겨우 진화됐어요. 런던 도심 ‘시티 오브 런던’의 80%가 불에 탔죠. 이후 대도시들이 근대적인 소방 체계를 갖추는 계기가 됐답니다. /위키피디아

우왕좌왕하는 사이 불길은 더욱 번져 동이 틀 무렵 300여 채 건물이 불탔고 런던 브리지 북쪽까지 화마(火魔)가 옮겨가고 있었어요. 시민들은 불 끄는 것을 포기했어요. 물에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집 안 귀중품을 꺼내 템스 강에서 배를 타고 도시를 떠났죠. 배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벽 밖 공터로 피신했어요. 수레나 배를 이용해 비싼 값을 받고 물품을 운반해주는 장사치가 등장하는가 하면 빈집에 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는 등 도시는 대혼란에 빠졌어요.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다


날이 밝자 국왕 찰스 2세와 동생 제임스(훗날 제임스 2세)는 군대를 동원해 불길이 번지지 못하도록 주변 건물들을 무너뜨렸어요. 길거리로 나온 사람들에게 돈과 음식을 주며 즉석에서 소방관으로 고용했습니다. 화재 발생 나흘째에 바람이 약해지면서 불길은 겨우 진압됐어요. 4일간 화재로 집과 상점 1만3200채, 교회 87곳, 세인트폴 대성당 등이 사라졌어요. 런던 도심의 80%가 잿더미로 변해버렸고, 10만여 명이 살 곳을 잃었죠. 공식적인 사망자는 9명뿐이었어요. 가난한 서민 희생자는 집계하지도 않은 데다 시체가 불에 타버려 정확한 수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죠.

찰스 2세는 실의에 빠진 시민들에게 구호물자를 지원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지는 못했어요. 건조한 날씨, 거센 바람, 무능력한 시장 등으로 화재 원인을 돌려도 분노가 잦아들지 않았죠. 런던 시민들은 거리로 나가 외국인과 가톨릭교도를 무자비하게 폭행했어요. 성공회를 믿었던 영국 국민이 가톨릭에 대해 감정이 안 좋았고, 네덜란드와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주요 표적이 됐어요. 참사 직후 '화재를 일으킨 프랑스와 네덜란드 놈들이 런던 시민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한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죠. 찰스 2세는 시민들의 분노가 자칫 왕실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질까 봐 이를 가만히 놔뒀어요.

런던에서는 방화범을 밝혀내기 위해 화재 조사 위원회가 결성되었어요. 빵집 주인은 자신의 오븐이 완전히 꺼져 있었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죠. 엉뚱하게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프랑스인 시계수리공 로베르 위페르가 범인으로 지목됐어요.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은 위페르의 증언이 앞뒤가 안 맞았지만, 그가 외국인이고 가톨릭 신자니까 방화범이 확실하다며 사형을 선고했어요. 사형이 집행된 후에야 위페르가 화재 시작 이틀 후 런던에 도착했음이 알려졌어요. 위페르는 고문을 받아 거짓 자백을 한 것이었죠. 결국 320년이 지난 1986년, 화재가 시작됐던 빵집의 후손이 빵집 직원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했다고 인정하고 사과문을 발표함으로써 완전한 진상이 드러났어요.

1667년 1월 화재 조사 위원회는 "하느님의 징벌, 거센 바람, 건조한 날씨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사람들은 가톨릭 교인들이 범인이라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어요. 심지어는 화재 진압에 발 벗고 나선 제임스가 가톨릭 신자이므로 범인이라는 소문도 돌았죠. 1800년대 중반까지 런던 대화재를 애도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탑에 "불은 꺼졌지만, 이 재앙을 가져온 교황 세력의 광란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해요. 도시의 불길은 나흘 만에 진화됐지만 마음속 불길은 200여 년간 지속됐던 것이죠.

351년 전 영국인들은 안전 불감증에 빠져 안일하게 이익만 추구하다가 대화재를 맞이했어요. '그렌펠 타워' 화재 사건은 과거의 교훈을 잊고 인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일 수 있어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재앙은 우리 곁으로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겠죠?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기획·구성=박승혁 기자, 조선일보(17-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