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고려거란전쟁과 양규 장군] [고려거란전쟁의 영웅들] ....

뚝섬 2024. 4. 5. 09:50

[고려거란전쟁과 양규 장군]

[고려거란전쟁의 영웅들]

[거란전쟁과 병자호란]

[강감찬과 귀주대첩]

[망하는 길로 가니 亡國이 온다]

 

 

 

고려거란전쟁과 양규 장군

 

거란 40만 대군에 맞서 흥화진 지켜… 포로 3만명 구해

 

지난달 KBS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종영했어요. 드라마 장면 중 시청자들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려 서북면 도순검사를 지낸 무신 양규 장군이 거란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장면이에요. 지금까지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의 활약은 강감찬 장군 등에 비해 덜 알려졌어요. 하지만 조선 초기 집현전 유학자였던 양성지가 세조에게 위대한 업적을 세운 장군들 위패를 모시자고 건의했을 때, 신라의 김유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 강감찬과 함께 양규 장군도 포함했답니다. 흥화진을 끝까지 지켜내려 한 양규 장군에 대해 알아봅시다.

고려와 거란, 전쟁을 시작하다

 

거란족은 원래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목민들이었어요.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살았죠. 그러다 10세기 초 '야율아보기'라는 지도자가 등장해 흩어진 부족들을 통합해 세운 국가가 '거란'입니다. 거란은 '요(遼)'라고도 했죠. 그런데 거란과 송(宋)나라가 군사적으로 맞서요. 당(唐)이 멸망하고 송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 거란은 후진(後晉)에 군사적 도움을 주고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중국을 통일한 송은 이 지역을 되찾고 싶었고 결국 거란과 충돌하게 됐어요. 이에 거란은 송과 전면전을 벌일 준비를 합니다. 송과 고려가 합심하고 거란을 공격하지 못하게 993년(고려 성종 12년)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죠. 당시 고려는 거란의 침공 의도를 파악했고, 서희를 보내 거란 장수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고려는 송과 맺은 외교 관계를 끊으라는 거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강동 6주'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죠.

 

하지만 고려에서 장군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이 일어나요. 거란은 이 사실을 여진족을 통해 뒤늦게 알았어요. 거란은 '역적 강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1010년 11월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다시 침공했습니다. 압록강을 건넌 거란군이 가장 먼저 마주친 건 고려군의 최전방 요새 '흥화진(현재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지키고 있던 양규였어요.

양규, 거란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흥화진은 고려가 강동 6주를 얻은 뒤 이 지역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995년에 만든 요새입니다. 흥화진은 거란군이 한반도로 손쉽게 진격하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목에 있었죠.

1010년 11월 16일 거란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흥화진을 포위했어요. 이때 양규는 정성, 이수화, 장호 등 휘하 장수들과 흥화진을 끝까지 사수했어요. 그러자 거란 황제는 "목종은 우리 신하였는데 강조에게 시해당했으니 강조를 잡아 보내면 회군하겠다"며 항복을 권했어요. 하지만 양규는 아주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거란 황제는 양규가 항복하지 않으리란 걸 알고 흥화진에서 방향을 틀어 통주(通州)로 진격했습니다.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은 통주성 남쪽에서 거란군과 전투를 벌였어요. 하지만 고려군은 크게 패배했고, 강조가 거란군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후 거란군은 강조가 쓴 듯이 위조한 편지를 흥화진으로 보내 양규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어요. 하지만 양규는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을 받들지 않겠다"며 거절했죠. 오히려 양규는 12월 16일 군사 700여 명을 거느리고 흥화진에서 나와, 통주에 있던 고려 병사 1000명을 구해냅니다. 그러고 거란군 6000여 명과 전투를 벌여 곽주성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던 고려 백성 7000여 명도 구해냈어요. 이렇듯 양규의 치열한 저항은 계속됐어요.

흥화진 등에서 고려군이 거란과 열심히 싸우고 있었지만 거란의 주력군은 계속 진격해 개경으로 향했어요. 결국 고려 현종은 남쪽으로 급히 피란을 떠났고, 1011년 1월 거란군이 개경에 입성했습니다. 피란길에서 현종은 거란과 조약을 맺어 전투를 그치고 평화를 회복하는 강화(講和)를 맺어요. '앞으로 고려 국왕이 직접 거란 조정에 들어가 황제에게 인사를 드린다'는 조건으로 말이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흥화진을 중심으로 한 양규의 전투는 계속됐습니다. 양규의 활약은 거란군이 서둘러 강화를 맺고 고려에서 철수하게끔 만들었어요. 그리고 양규는 개경에서 철수하는 거란군을 여러 차례 공격하면서 포로로 잡힌 수많은 고려 백성을 구출하기도 했습니다. 양규가 거란군에게서 구출한 포로는 약 3만명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011년 1월 28일,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거란의 주력 부대에 포위됐어요. 양규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함께 싸우던 군사도 모두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양규는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여러 번 연달아 적을 격파하였으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고 합니다.

양규 장군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에 관한 기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양규 장군의 출신과 언제 태어났는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가 거란에 항전하며 활약한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지요. 드라마를 통해 많은 이가 양규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는데요, 이 관심과 사랑이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김성진 서울 고척고 교사/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조선일보(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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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한의 전쟁사]---

 

고려거란전쟁의 영웅들

 

필자가 고려거란전쟁에 관한 책을 썼던 때가 벌써 20년 전이다. 그때 양규의 활약에 대해 최대한 지면을 할애하면서 양규의 공적을 부각해 보려고 노력했었다. 30년 가까운 거란 전쟁 중에 최대 규모의 침공이며, 고려를 최고의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던 때가 1010년의 2차 침공이다. 거란의 성종이 친정을 했으며, 동원한 병력도 역대 최대 규모였다.

이 전쟁에서 양규는 3번의 공적을 세운다. 첫 번째, 흥화진을 사수해서 시작부터 거란군의 전략이 틀어지게 만들었다. 전쟁 초기에는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지만,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지면 시간이 지날수록 뒤틀림은 커지고, 잘못된 결정과 판단을 유도하게 된다.

두 번째,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 전쟁에서 결정적 포인트는 서경 포위전이었다. 서경이 함락되었더라면 거란군은 완벽한 중앙 거점을 가지게 되고, 고려를 분단국가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다. 거란의 중간 기지인 곽주성을 탈환해 거란군이 서경 포위전을 포기하게 만든 사람이 양규였다. 거란군은 개경으로 직공해 개경을 함락하지만 무리한 진격으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피로에 지친 몸으로 귀국하게 된다.

양규는 이 지친 거란군을 공격해서 3만 명에 가까운 포로를 되찾았다. 이것이 세 번째 공적이다.

거란군을 습격하던 양규는 무리하게 작전을 진행하다가 거란군의 본대에 포위되어 전멸한다. 양규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군인 정신뿐 아니라 삶을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교훈을 전해 준다.

전쟁터에서 영웅이란 어떤 사람일까? 주어진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자기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다. 평소에는 두렵고 그런 영웅심도 없지만, 막상 자기 앞에 그 순간이 닥쳤을 때, 운명의 의무를 피하지 않는 병사이다. 때로 그 의무의 순간은 5초, 1분, 20분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누구의 생명이 5초에서 20분의 행동보다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양규는 역사에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거란전쟁을 통해 이름 석 자라도 알린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잊혀졌다. 지금 전쟁이 난다면 우리는 이런 영웅들을 기록하고 보존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4-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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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전쟁과 병자호란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 거란이 고려를 집요하게 침공했다. 1018년 마지막 침공 때, 거란의 맹장 소배압은 기필코 고려를 굴복시키겠다는 마음에 과감한 시도를 한다. 기병의 기동력과 현지 조달 능력을 무기로 거점도시, 중간 보급기지 확보를 생략하고 단숨에 개경까지 달려 단기 승부를 노린다.

소배압의 모험은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개경 사수를 결심한 현종의 더 대담한 결정과 고려군의 맹렬한 추격 덕에 실패하고 만다. 개경 입성에 실패하는 바람에 거란군은 굶주림과 피로를 해소할 기회를 놓쳤다. 지치고 낙담한 몸으로 회군하던 거란군은 귀주성 앞 벌판에서 강감찬의 고려군을 만나 전멸한다. 이것이 귀주대첩이다.

거란의 진짜 목표는 송나라 정복이었다. 전군을 동원해 송을 침공했을 때 배후에 있는 고려나 여진이 거란을 치면 양면협공에 걸린다. 거란은 먼저 여진과 고려를 정복해 이런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600여 년 후에 청이 조선을 침공했다. 병자호란이다. 이 침공의 이유도 거란과 똑같았다. 중국의 왕조가 송에서 명으로 바뀌어 있었을 뿐이다. 전술적 목적은 좀 다르지만, 선봉 부대가 기병으로 전격전을 시도한 것도 유사하다. 하지만 척화파는 청이 조선을 침공하는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청이 설명해 줘도 믿지 않았다. 청의 군대가 밀어닥쳐도 허세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청 태종이 직접 왔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청 태종이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겠는가. 이 전쟁은 변방의 장수가 감정적인 이유로 침공한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역사 공부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사람들이 거란전쟁의 교훈은 왜 망각했을까. 이념과 사상을 먼저 세우고, 역사에서 교훈을 찾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배운다기보다는 역사를 이용한다. 목적에 맞춰 현실을 왜곡하고,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외쳤다. 그 결과가 삼전도의 굴욕이다. 다시 400년이 지났다. 비슷한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걸까. 인간의 지성에 한계가 명확한 것일까.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3-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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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이순신’ 양규 장군님… 몰라봬서 송구합니다

 

잊힌 구국의 영웅 극적 재조명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물”
 

 

“배역을 제안받고는 부끄러웠습니다. 서희·강감찬은 많이 들어보셨을 텐데, 양규 장군은 몰랐거든요.”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역사적 조명이 드물었던, 출생연도조차 알려지지 않은 고려의 영웅 양규(楊規). 최근 흥행에 성공한 KBS 사극 ‘고려 거란 전쟁’에서 양규 역할을 맡은 배우 지승현(42)조차 지난달 제작 발표회에서 자신의 무지를 자책했을 정도다. 그러나 드라마가 시청률 10%를 넘기고 정통 사극으로는 처음 넷플릭스 국내 시리즈 1위에 오르는 등 선전하면서 극적인 재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양규를 ‘고려의 이순신’으로 추앙하는 X(옛 트위터) 계정이 속속 생겨나고, 팬아트 인증이 잇따르고, 전투 활약상을 분석하는 유튜브 콘텐츠가 쏟아지는 등 관심이 치솟는 중이다. 지씨는 말했다. “고려가 없어질 수도 있었던 가장 암울한 시기에 나라를 구한 용장 중 한 분이십니다.”

 

역사에 묻혀있던 기적의 전투  

 

사극 '고려 거란 전쟁'에서 양규 역을 맡은 배우 지승현. /KBS

 

양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역사 소설도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그가 승리로 이끈 전투 자체가 상식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드라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1010년 음력 11월, 황제가 이끄는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침략해 왔다. 정변으로 왕위에 갓 오른 초보 임금 아래 중앙집권의 기틀조차 미약했던 고려. 중원에서 송나라를 몰아내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거란. 확연한 우열 속에서, 양규는 최전방 요새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맞이했다. 화포가 없던 시절이긴 하나, 겨우 3000명 남짓한 군사로 일주일간 이어진 거란 40만 대군의 파상 공세를 버텼다. 예상과 달리 첫 관문부터 꼬여버린 거란 황제는 만약을 대비해 병력의 절반만 데리고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거란군은 고려의 본진 통주에서 30만 대군을 대파하며 진격해 음력으로 이듬해 1월 1일 수도 개경에 입성한다. 현종 임금은 서둘러 몽진을 떠나야 했다. 파죽지세의 거란군은 그러나 열흘 뒤 철군을 결정한다. 양규의 맹활약이 결정타였다. 군사 1700명을 이끌고 거란군 6000명이 주둔한 곽주성을 습격해 탈환하며 보급 및 퇴로를 끊었기 때문이다. 성을 함락하려면 통상 10배 정도의 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믿기 힘든 성과였다. 이후에도 퇴각하는 거란군을 쫓아 소수의 병력으로 끈질긴 게릴라전을 벌였다.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 3만여 구(口)을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려사).”

 

◇“책임감 강한 공직자가 필요하다” 

 

'고려사'에 기록된 양규의 최후. 거란군의 퇴각도 함께 기술돼있다. /규장각

 

KBS 사극의 동명 원작 소설 ‘고려 거란 전쟁’의 저자 길승수 작가는 “양규에 대해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흥화진에 머무는 대신 성 밖으로 나와 거란군을 계속 공격하잖아요. 무모할 정도로요. ‘왜 자기 살 궁리를 안 하지?’ 싶었어요. 그분은 자기 책임을 다한 겁니다. 양규의 직책은 서북면 도순검사(都巡檢使)였습니다. 서북면과 서북면의 백성을 지키는 일, 내가 맡은 임무는 목숨 걸고 완수한다는 자세.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고, 그래서 대중이 반응하는 게 아닐까요.”

 

“얼마 뒤 거란의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오자 양규와 김숙흥이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 거란군은 여러 장수들의 초격(鈔擊)을 받았고, 또 큰 비로 인해 말과 낙타가 쇠잔해졌으며, 갑옷과 무기를 잃어버려 압록강을 건너 퇴각했다.” 1011년 음력 1월 28일, 고려사에 기록된 양규의 최후다. 그러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거란군의 피해는 컸고 재침공까지 3년이 걸렸다. 그사이 고려는 일전을 대비할 수 있었다. 이후 벌어진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 등의 승리는 이 같은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영웅의 예우, 지금의 우리는… 

 

사극 '고려 거란 전쟁' 촬영장에서 양규(지승현·왼쪽)와 현종(김동준)이 웃어보이고 있다. 실제 역사 속에서 현종은 전사한 양규를 공신으로 대우하고 유족에게도 후한 포상을 내렸다. /KBS

 

1019년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치하하고자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했고, 1024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봉해 기리는 등 융숭히 예우했다. 아들 양대춘은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했고, 손수 교서를 지어 양규의 처 은률군군 홍씨에게 하사했다. “그대의 남편은… 송죽 같은 절개를 지키며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밤낮으로 헌신했다. 지난번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며 지휘하니 그 위세로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해 사로잡아 나라의 강역을 안정시켰다… 뛰어난 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훈작과 관직을 올렸으나 다시 보답할 생각이 간절하므로 더 넉넉히 베풀고자 한다. 해마다 그대에게 벼 100석을 하사하되, 평생토록 할 것이다.”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며 존재가 희미해졌을 뿐 고려시대 내내 양규는 구국의 영웅으로 숭상됐다. 양규의 후손들도 왕실의 포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전쟁과 역사’ 저자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은 “고려의 양규와 조선의 충무공만 봐도 나라를 지켰으면 정치적 배경을 막론하고 공에 걸맞게 예우했고 그걸 못 하는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면서 “지금 우리는 이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행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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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과 귀주대첩


올해 귀주대첩 998주년 행사 열려… 거란이 세 차례에 걸쳐 고려 침략
강감찬, 3차 침입 무찔러 나라 구해 을지문덕·이순신과 함께 '3대 명장'

고려시대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불리는 강감찬(948~1031) 장군이 거란의 10만 대군을 무찌른 '귀주대첩'이 올해로 998주년을 맞았습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터가 있는 낙성대(落星垈·별이 떨어진 곳이라는 뜻) 공원을 중심으로 '강감찬 축제'가 열렸지요. 오늘은 강감찬 장군과 귀주대첩에 대해 알아봐요.

◇고려, 거란의 침입을 받다

900년대 동북아시아는 혼란의 소용돌이였어요.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북진(北進)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중국에선 당나라 멸망 이후 크고 작은 나라가 중원(中原·중국 중심부)을 통치하는 '5대 10국 시대'가 열렸지요중국 북부·몽골 지방에선 유목 생활을 하던 거란족이 나라를 세우고 중원을 차지할 기회만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답니다.

고려에게는 거란이 북진 정책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어요. 거란은 926년 발해를 멸망시켰지요. 이러니 처음부터 고려와 거란 사이는 좋지 않았어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거란이 보낸 사신 30명을 섬으로 쫓아내고 낙타 50필을 굶겨 죽이는 등 거란에 적대적인 정책을 펼쳤답니다. 죽기 전엔 "거란 같은 야만족 풍습은 멀리하라"는 유언(훈요 10조 중 하나)까지 남겼을 정도였어요. 그 뒤를 이은 고려 왕들도 거란을 배척했어요.

960년 송나라가 중원을 통일하자 고려는 송나라와 가깝게 지내는 외교 정책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송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지배하고 싶어 하던 거란은 고려를 먼저 정벌해 고려가 자기들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고 싶어 했죠. 993년 10월, 거란의 왕 성종이 장수 소손녕과 80만 대군을 보내 고려를 공격했는데 이것이 거란의 1차 침입입니다.

 

소손녕이 이끄는 80만 대군은 압록강을 넘어 평안도 청천강 위쪽까지 쳐들어왔어요. 소손녕은 고려 조정에 편지를 보내 항복하라고 했지요. "80만 군사가 도착했다.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너희를 모조리 무찔러 멸망시킬 테니, 왕과 신하가 우리 군영 앞으로 오라!" 이때 고려의 유능한 외교관 서희가 소손녕을 만나 담판을 벌입니다. 서희는 '거란을 섬기라'는 소손녕의 요구에 답합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다. 사실 압록강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족이 점령하고 있어 거란과 왕래하기가 매우 곤란하다. 그러니 거란과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전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가 그 땅을 회복해 성(城)을 쌓으면 국교가 통할 것이다."이 담판 이후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압록강 하류의 여섯 행정구역)를 차지해 영토를 압록강까지 넓힐 수 있었답니다.

 

◇소가죽으로 물길을 막다

 

그러나 서희의 담판 이후에도 고려는 송나라와 우호적 외교 관계를 끊지 않았어요. 그러자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략할 기회를 엿봅니다. 거란은 고려의 장군 강조가 목종을 내쫓고 현종을 왕으로 세우는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혼내주겠다는 핑계를 대고 1010년 고려를 다시 공격합니다. 거란의 2차 침입이지요.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 함락 위기를 맞자 현종은 거란에 항복하려 했답니다. 그런데 정4품 낮은 벼슬자리에 있던 강감찬이 이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일단 적의 거센 공격을 피한 뒤 끝까지 버텨 싸워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피하십시오!" 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지자 거란 왕은 보급로가 중간에 끊길 것을 걱정해 결국 고려와 화해 조약을 맺었답니다. 이때 양규 장군이 이끄는 고려 군대가 철수하는 거란 군대를 기습 공격해 일곱 차례나 승리를 거두는 성과를 올렸지요.

 

거란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고려 왕은 예를 올려라' '강동 6주를 바쳐라' 같은 요구를 했어요. 하지만 고려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018년 또다시 고려를 침공합니다. 거란의 3차 침입이에요. 장수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현종은 강감찬에게 20만 군사를 주고 막으라고 했어요. 거란의 침입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오던 강감찬은 평북 흥화진으로 나아가 정예 기병 1만2000여 명을 산골짜기에 몰래 숨겼답니다. 강감찬은 소가죽을 꿰어 만든 커다란 줄로 흥화진 동쪽 냇가의 물줄기를 막은 뒤 거란군이 골짜기를 건너가기를 기다렸고, 거란군이 지나자 한꺼번에 물을 터뜨렸어요. 혼비백산하는 거란군을 숨어있던 정예군이 공격하면서 강감찬은 큰 승리를 거뒀지요.엄청난 피해를 본 소배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개경에 쳐들어가지만, 함락에는 실패합니다.

 

거란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강감찬이 압록강 근처 귀주 지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크게 무찔렀어요. 소배압은 죽기 살기로 압록강을 건너 겨우 목숨만 건졌답니다.이처럼 강감찬이 탁월한 전략으로 거란을 물리친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부른답니다.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강감찬은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3대 명장으로 이름을 남겼답니다. 이후 고려는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막고자 흥화진 북쪽부터 동해안 도련포에 이르는 1000여 리에 돌로 만든 성벽인 '천리장성(고려장성·북한 국보 48호)'을 쌓았답니다.  

-지호진·어린이 역사 저술가/기획·구성=박세미 기자, 조선일보(17-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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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는 길로 가니 亡國이 온다


중국 宋, 자중지란으로 망해…국방 강화가 전쟁 부른다 주장

사드 반대하는 세력과 비슷.. 宋처럼 망국으로 가려는가
 
중국 역사에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망한 왕조가 여럿이다. 그중 대표적인 게 진(晉)·송(宋)·명(明)이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제갈량의 숙적으로 나오는 사마의의 후손이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가 세운 나라를 찬탈한 게 진이다. 진은 황제의 무능과 황후의 정권욕이 '8왕의 난'을 불러 망했다.

 

진이 망국(亡國)의 제1조건, 지도자의 무능을 보여줬다면 명은 나라의 안위를 외면한 당쟁에 백성까지 휘둘릴 때 망국을 맞는다는 제2조건을 보여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청이 두려워한 명장 원숭환을 온몸의 살점을 발라내고 두개골을 부수는 책형을 가해 죽였을 때 백성이 환호한 일이다.이런 진과 명도 송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송이 망한 첫째 이유는 '퍼주기'로 평화를 사려 했기 때문이다.

 

송은 거란족의 요(遼), 탕구트족의 서하(西夏), 여진족의 금(金)이 위협할 때마다 금고를 열었다. 이걸 안 침략자들은 갈수록 심한 요구를 했고 끝내 '배부른 돼지'를 잡아먹었다. 송이 망한 둘째 이유는 보수파와 개혁파의 대립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들은 서로를 간당(奸黨)이라 모욕 주며 '과거사 논쟁'을 벌였다. 가뭄도 네 탓, 별자리가 약간 이상해져도 네 탓이라며 서로 물고 늘어졌다. 이들은 안보(安保)마저 당쟁 소재로 삼았다.

 

1074년 요의 군대가 돌연 국경을 침입했을 때 당시 재상이 황제에게 올린 상소는 "우리는 다음 7가지 일로 적을 화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길지만 당시 상소를 요약해본다.

 

"첫째, 진작 요의 번속(蕃屬)이 된 고려와 우리가 옛 관계를 회복했으니 요는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무력으로 토번의 하황지구를 탈취했으니 요는 다음 목표는 분명 자신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대주 지역에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대량으로 심었는데 그 목적은 요의 기병을 막고자 한 것이 분명합니다. 넷째, 우리가 보갑제도를 시행해 농민에게 전투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다섯째, 황하 이북의 각 주현(州縣)이 성곽을 수리하고 성을 보호하는 해자를 깊이 팠습니다. 여섯째, 우리는 신식 무기를 만들고 무장 부대의 장비를 교체했습니다. 일곱째, 우리는 황하 이북의 중요한 주(州)에다 37명의 장수를 배치해 주둔 중인 국방군의 훈련을 강화했습니다. 우리는 단 한 가지 방법으로 요를 대해야만 그들에게 우리의 평화 의지를 믿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의 조치들을 즉각 폐지하는 것입니다.

 

"국방력 강화가 요를 자극했으니 그런 조치들을 없애야 평화가 온다"는 황당한 주장이다. 오늘날 '사드 반대' 세력과 흡사하다. 송은 여기에 '원칙 없는 외교'와 악비(岳飛)라는, 우리 이순신 장군 같은 충신에게 모반죄를 씌워 제거하면서 멸망의 삼위일체(三位一體) 필요충분 조건을 완성했다. 중국 역사상 국가대표급 간신 진회(秦檜)가 "악비가 모반을 한 증거가 있느냐"며 누군가 따졌을 때 한 말이 유명하다. "없지는 않은 것 같다 (莫須有)."

 

우리는 이런 진회에게서 대한민국 체제 아래 출세했으면서 어느 순간 좌파를 위해 충성하는 기회주의적·출세지향적 관료의 모습을 본다. 나는 지금 이 글을 프랑스에서 쓰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의 교훈이 될 역대 동계올림픽의 공과(功過)를 취재 중인데 지금은 폐허가 된 1968년 그르노블 올림픽 스키점프대에 갔을 때 웬 노숙자 2명이 풀밭에서 자다가 일어나 불량스러운 어조로 "담배 좀 내놓으라"며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 말투를 듣더니 "수드(sud), 노(nord)?"라고 물었다. 남한이냐 북한이냐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 "노"라고 하자 갑자기 그들의 태도가 양순하게 변했다. 그걸 보고 "'북한은 프랑스 노숙자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북한에 송나라처럼 대하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조선일보(1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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