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55세에 유배 당한 추사… 절대고독 속 ‘세한도’가 탄생했다] ....

뚝섬 2024. 5. 4. 09:07

[55세에 유배 당한 추사 절대고독 속 세한도가 탄생했다]

[추사가 그린 ‘세한도’ 속 집, ‘이것’ 덕분에 숨통 트였다]

['세한도' 소장史에 담긴 한일 父子] 

[1000억 땅에 세한도까지… 代를 이은 기증] 

[10번 주인 바뀐 세한도, 하마터면 일본서 폭격에 사라질 뻔] 

[세한도(歲寒圖)에 얽힌 비밀]

 

 

 

55세에 유배 당한 추사… 절대고독 속 ‘세한도’가 탄생했다

 

[손관승의 영감의 길]
제주 별도봉에서 돌아본 김정희 세한도 180주년
 

제주도 별도봉 산책코스. 왼쪽은 제주항이고 그 옆으로 화북포구. /손관승 제공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를 보러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가 뜻밖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작품 탄생 180주년을 맞아 오랜만에 공개되었다는 사실보다 내가 주목한 건 59세라는 작품 당시 추사의 나이였다. 마침 퇴직 예정자를 위한 제주도 워크숍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으니 둘 사이의 동질감을 발견한 것이다. 직장인들은 대개 ‘세 가지 파도’를 동시에 맞는다. 정년퇴직, 몸과 정신이 지쳐있는 번아웃, 환갑의 삼각파도다. 퇴직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추사의 제주도 유배길은 통찰력을 주기에 충분하다.

 

명문 가문 출신에다 총명함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추사에게 일생일대의 고난이 닥친 것은 그의 나이 55세. 청나라로 파견할 동지부사에 임명되어 30년 만에 북경을 다시 방문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젊은 시절 북경에서 중국 지식인들에게 “경술과 문장이 해동(조선)에서 제일”이라는 극찬을 들었던 추사였다. 그런데 정치권에 일진광풍이 몰아치더니 느닷없는 유배형이 내려졌다. 해외 출장 준비하고 있는데 유배를 떠나라는 황당한 명령,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표현을 빌리면 ‘벽돌로 인생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다.

 

제주도는 원악도(遠惡島)라고 불릴 정도로 먼 유배지였고 대정현은 특히 생활 여건이 열악했다. 일명 '강도순의 집'으로 알려진 추사의 대정 유배거처. /손관승 제공 

 

그렇게 추사가 제주에 도착한 것은 1840년 9월 27일 저녁. 해남에서 함께 배를 탄 사람들 대부분이 멀미가 나서 고생했지만, 추사는 밥도 먹고 뱃머리에서 선장이나 뱃사공과 이야기도 나누었다고 기록돼 있다. 추사의 도착 장소는 어디일까? 일명 별도포구로 불리는 화북포구. 제주목 관아에서 가장 가까워 조천포구와 함께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며 1653년 태풍으로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이 서울로 압송된 출발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주변이 개발된 데다 현대식 제주항에 밀려 항구로서 기능은 축소되었기에 옛 자취를 느껴보려면 별도봉 산책길을 걷는 편이 낫다. 뱃사람의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당(海神堂), 연기를 통한 비상 신호 수단인 연대(煙臺)가 남아 있고, 끝없이 이륙하는 항공기와 푸른 바다를 건너는 선박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근처에 국립 제주박물관과 우당도서관과 산지 등대까지 있으니 환상적인 산책 코스다.

 

이 산책길에서 가장 높은 별도봉은 제주도가 발표한 오름 368곳 가운데 가장 특별한 사연을 간직하였다. 인근 사라봉 옆에 별도로 솟은 오름으로 생각했는데 한자로는 별도봉(別刀峰)이라 한다. 당시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이들에게 음식과 빨래 등을 거들어 주는 배수첩(配修妾·일종의 현지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임기 혹은 유배가 끝났을 때 제주도에서 함께 살던 여인과 가족을 떼어놓고 갔기에 남은 가족은 오름 높은 곳까지 올라 육지로 떠나는 배를 피눈물로 배웅했다고 한다. 즉 칼로 끊는 것처럼 생이별한 장소라는 뜻이다. 추사는 애처가답게 현지에서 여자를 구하지 않고 지냈으나 유배 3년 차에는 부인마저 사망하는 불운이 겹친다.

 

제주도 별도봉 오름. 정상 우측 아래는 제주항. /손관승 제공

 

제주도는 원악도(遠惡島)라고 불릴 정도로 먼 유배지였고 그중 대정현은 특히 생활 여건이 열악했다. 그가 가장 오래 거주했던 일명 ‘강도순의 집’의 거처에 귤중옥(橘中屋)이라 당호를 지었다. 다른 꽃은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이곳에 있으며 겉과 속이 다 깨끗하고도 향기로운 지조를 기리는 뜻이었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잦은 질병, 무엇보다 세상과 절연되어 있다는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하루가 한 해같이 긴데, 온종일 듣는 것은 까마귀와 참새 소리뿐”이라고 적고 있다. 요즘도 제주도에는 까마귀가 흔하다. 남들은 달려가는데, 혼자 멈춰 있다는 느낌처럼 힘든 것도 드물다. 40대 중반에 공직에서 추방된 마키아벨리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걱정도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라고 적고 있지 않았던가.

 

완장을 채워주었을 때 인간의 감춰진 얼굴이 나타난다면, 고난을 겪을 때 그의 진짜 실력을 알게 된다. 유배자들은 중앙의 권부에서 불러줄 날만 기다리며 울분의 세월을 술이나 마시면서 현지인들과 담쌓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추사는 독서에 매진하고 현지인을 제자로 삼으며 자기 수양의 기회로 삼았다. 세상은 그를 외면했어도 드물게도 평생 그를 존경한 이 가운데 한 명이 제자 이상적. 역관의 신분으로 12번이나 중국을 다녀온 전문가였다. 출장 때마다 청나라의 해외 문물 최신 소개서 ‘해외도지(海外圖志)’ 등 많은 책을 구해 추사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제주도 유배 생활 5년째인 1844년, 제자의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게 되니 바로 ‘세한도’였다.

추사 김정희가 59세 때 만든 작품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

 

40대 마키아벨리에게 해직이 없었다면 ‘군주론’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50대 추사에게 유배가 없었다면 ‘세한도’는 탄생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카잔차키스가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것 또한 환갑 무렵이다. 흔히 자유인의 상징으로 해석하지만, 이 작품은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 환갑과 부활 정신을 말하고 있다. 포도를 짓이겨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포도주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짓이김당하는 과정을 통해 불후의 명작이 태어난다. 글은 뾰족할수록, 인격은 둥글수록 좋다. 고난은 개성 강한 글을 쓰게 만들지만, 인품은 원만하게 변화시킨다. 별도봉에서 오름의 정신을 되새겨 본다. 올라갈 때는 강건해지고 내려갈 때는 현명해져야 한다. ‘올강내현’, 인생의 법칙도 그러하지 않을까?

 

-손관승 글로생활자, 조선일보(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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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그린 ‘세한도’ 속 집, ‘이것’ 덕분에 숨통 트였다

 

[김두규의 國運風水]


氣韻生動의 원리로 풍수로 그림 보는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 속 집은 목수가 봐도, 풍수로 봐도 좋지 않다. 하지만 고목 끝에 새롭게 뻗은 어린 가지(동그라미 표시)가 그림에 기(氣)를 들여오는 입구 역할을 해주어 기운생동을 불어넣었다. /김두규 교수 제공

 

‘아트 비즈니스’, ‘아트 테크’란 말이 유행이다. 예술품이 아닌 ‘상품으로서 미술품’을 전제한다. “2021년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던 한국 미술시장이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금년 하반기부터는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하는데, 한국 경제 규모나 소비 트렌드(다양한 세대의 미술시장 유입과 유통 모델의 다양화 등)를 감안하면 수년에 걸쳐 3조~4조원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아트 어드바이저 이승수 쿼드로지(QUADLOGY) 대표는 전망하기도 한다.

 

미술품은 이제 예술품이 아닌 상품이다. “진정한 예술은 진리를 드러낸다”라고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했다. 그가 지금의 미술시장을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는 반 고흐의 ‘구두’라는 그림을 보고 “구두라는 존재자가 자기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너무 많이 신어서 넓어져 버린 구두의 안쪽 어두운 틈에서 들일을 나서는 발걸음의 힘겨움이 응시하고 있다… 구두 가죽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여 있다. 구두창 아래에는 해 저물 녘 들길의 고독이 스며 있다. 구두에는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과 무르익은 곡식을 조용히 선사하는 대지의 건네줌이 있다… 이 도구(구두)는 대지에 속해 있으면서 농촌 아낙네의 세계(Welt) 안에 보호되고 있다.” (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재인용)

 

하이데거는 “작품을 창작하는 못지않게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존재의 진리를 생기(生起)하게 하는 근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했다. ‘지식도 교양도 축적해야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논리이다. ‘알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면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필자의 유학 시절 독문학 방법론(실은 독일 지도교수의 방법론)이기도 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작품만 보았다. 그 방법론을 풍수와 접목하고 전용(轉用)하여 그림도 사전 지식 없이 감상하곤 한다. 어떤 그림을 바라본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그림과 풍수는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원대의 화가 황공망은 “그림에도 역시 풍수가 깃들어 있다[畫亦有風水存焉]”라고 하였다. 그의 호가 대치(大痴)이다. 조선 남종화의 대가 허련의 호가 소치(小痴)이다. 중국과 조선의 그림에서 풍수가 갖는 의미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풍수로 그림 보기의 핵심은 기운생동(氣韻生動) 여부이다. 기운생동한 그림이 되려면 기(氣)가 들어오는 입구[口], 즉 기구(氣口)가 있어야 한다. 추사의 ‘세한도’는 시인 백무산의 표현대로 “목수가 보면 웃을 그림”이고 “풍수가 보면 혀를 찰 집”이다. 만약에 기구가 표현되지 않았더라면 ‘재수 없는 그림’이 될 뻔했다. 그림 속의 기구는 무엇일까? 고목 끝의 새롭게 뻗은 어린 가지이다.

 

현대 화가 황주리의 작품 ‘식물학’을 본다. 바탕은 검은색이다. 한가운데 흰색 부분을 관통하는 철책이 보인다. 누군가 두 손으로 철책을 제친다. 비둘기 한 마리가 틈 사이로 날아든다. 고채도의 튤립 꽃들이 피어난다. 연인, 아이 업은 엄마, 토라진 아내를 따라가는 남자…. 모두가 꿈을 꾼다. 뉴욕으로, 파리로, 달나라로, 화성으로, 평화의 땅을 찾아서…. 철책을 제치고 비둘기가 들어오는 곳이 기구(氣口)이다.

 

그림도 인생도 () 들어와야 산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초로의 필자에게도 기구가 필요하다. 그래서 이번에 모 사이버대학에 신입생(freshman)으로 지원하였다. 전혀 다른 공부를 하여 새로운 세상을 보고 만들고 싶어서이다. 필자의 새로운 기구(氣口)이다. 요즘 가족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I am a freshman!”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조선일보(2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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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소장史에 담긴 한일 父子

 

우리나라 문화재 컬렉션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작품을 꼽자면, 단연 '세한도(歲寒圖)' 아닐까. 1844년 추사 김정희가 유배 시절 도움을 줬던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 보낸 이 그림은 180년 동안 10명의 주인을 거쳤다.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과 아들 김준학을 거쳐 한말 권세가인 민영휘 집안으로 넘어간다. 민영휘 아들 민규식을 거쳐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가 수집해 주인 따라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다. 1944년 컬렉터 손재형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주인은 계속 바뀐다. 손재형이 정치에 참여하면서 이근태에게 그림을 저당잡혔고, 이후 개성 갑부 손세기 소유가 됐으며 아들 손창근씨가 물려받아 소중히 간직해왔다. 

추사 김정희 '세한도'(1844년). 국보 제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이 굴곡진 소장사(史)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다.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 누구보다 추사를 흠모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한 학자였다.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해 서울에 온 그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에 매료됐다. 서울과 베이징의 고서점을 훑으며 부지런히 추사 유품과 자료를 사 모았다. '세한도' 역시 그런 노력의 산물이었다. 1943년 그가 '세한도'를 들고 일본으로 돌아가자, 얼마 뒤 손재형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러고는 100일간 문안하며 '세한도'를 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후지쓰카는 그 귀한 작품을 생면부지의 한국인 젊은이에게 아무 조건 없이 내주었다.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며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일본인 후지쓰카가 국보 '세한도'를 한국에 기증한 것이다.

그리고 62년이 흐른 2006년 2월, 이번에는 아들이 기증에 나섰다.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아버지가 수집했던 추사 친필과 관련 자료 등 2700여 점을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했다. 당시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사람이 공수래(空手來)는 못해도 공수거(空手去)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받아서 고마워하고 기뻐할 사람에게 줘야 유물의 생명이 살아있는 것 아닌가." 그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문화재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한국이라고 믿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아버지의 수집품을 돈으로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추사 자료실에 써 달라며 과천시에 200만엔까지 기부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지난주 '세한도'가 드디어 국민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이 일본인 부자(父子)를 떠올렸다. 대(代)를 이어 선행을 실천한 후지쓰카 부자처럼, 이번엔 개성 출신 한국인 가문의 나눔이 퍽퍽한 우리 마음을 적셔 주었다. 개성 갑부였던 손세기는 일찍이 인삼 무역과 재배로 부(富)를 일궜다. 평생 신용(信用)과 근검절약을 철칙으로 삼았으나 고서화 수집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그렇게 모은 서예·회화 200점을 생전 서강대에 기증했다. 다른 대학도 접촉했으나 서강대 외국인 총장이 가치를 알아보고 반색해 기증을 결심했다고 한다. 선친의 정신을 계승한 손창근씨는 시가 1000억원에 달하는 경기도 용인 땅을 국가에 선뜻 내놓았고, 대를 이어 수집한 컬렉션 304점을 아무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다." 2018년 기증식에서 손씨가 한 말은 후지쓰카 아키나오의 말과 묘하게 닮았다. 어떻게 삶을 품위 있게 마무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준다. 손씨가 구순을 맞아 컬렉션을 몽땅 기증하면서도 '이것 하나만은 섭섭해 안 되겠다'던 작품이 '세한도'였다. 그 마지막 한 점까지 아낌없이 내놓으면서, 굴곡 많은 작품의 여정도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한일 부자(父子)의 대 이은 나눔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선의를 새삼 일깨워줬다.

 

-허윤희 문화부 차장, 조선일보(20-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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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억 땅에 세한도까지… 代를 이은 기증

 

아무 조건없이 내놓다… 개성 갑부집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최고 걸작인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가 국민의 품으로 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미술품 소장가 손창근(91)씨가 대를 이어 소중히 간직해온 '세한도'를 아무 조건 없이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19일 밝혔다. 배기동 관장은 "손 선생이 컬렉션 304점을 지난 2018년 전부 기증하면서 마지막까지 고심하다가 '세한도' 한 점만은 아직 안 되겠다 했던 건데 지난 늦봄 아주 큰 결심을 해주셨다"며 "평생 자식보다 더 귀하게 아낀 작품"이라고 했다.  

국보 제180호 '세한도'. 집 한 채를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룬 간결한 그림이지만, 유배의 시련을 이겨내려는 추사 김정희의 곧은 정신이 서려 있다. 종이에 수묵, 23.7×109㎝.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중의 국보라 할 '세한도'는 1844년 58세의 추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이다. 귀양살이하는 자신을 잊지 않고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에게 답례로 '날이 추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도록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글과 함께 그려 보냈다. 작품은 그해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상적을 따라 중국을 여행했고, 1943년엔 일본인 주인을 따라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다. 1944년 컬렉터 손재형의 노력 끝에 극적으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이후에도 주인은 계속 바뀌었다. 결국 개성 갑부였던 실업가 손세기(1903~1983)가 수집했고, 아들 손창근씨가 대를 이어 소장해오다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한 바 있다.

◇개성 출신 부자(父子)의 대 이은 나눔

손창근씨는 2018년 기증식에서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귀중한 국보급 유물을 저 대신 길이길이 잘 보관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다"며 기증 의사를 먼저 밝혀왔다고 한다. 당시 손씨가 기증품에서 딱 하나 제외했던 게 바로 '세한도'. 이원복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은 "손 선생이 '아무래도 섭섭하고 허전해서 안 될 거 같다' 하며 뺐지만, 애초 박물관에 기탁할 때부터 결국 다 기증하고 떠나겠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지난 2018년 기증식에 참석한 손창근씨 부부. /국립중앙박물관

 

손세기 선생은 일찍이 고향 개성에서부터 인삼 무역과 재배에 종사한 실업가였다. 아들 손씨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뒤 공군으로 예편했고, 1960년대 외국인 상사에서 근무한 후 사업에 매진했다. 배 관장은 "소장품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신념을 갖고 사신 분"이라고 했다.

 

부자(父子)의 기부는 처음이 아니다. 손세기 선생은 생전인 1974년 서강대에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다. 이어 선친의 정신을 계승한 손씨는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회에 연구 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했다. 2012년에는 경기도 용인의 산림 약 200만평(서울 남산의 2배 면적)을 국가에 기증했다. 50년 동안 잣나무·낙엽송 200만 그루를 심고 분신처럼 가꿔온 땅이다. 당시 산림청 직원들은 시가 1000억원에 달하는 땅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은 손씨의 얼굴도 몰랐다. "그래도 선생님의 선행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산림청 직원 말에 "아들딸도 내 뜻에 선뜻 동의했다는 것만 알려 달라"고 했다.

◇"세한도는 최소 100억원 이상의 가치"

'세한도'는 차가운 세월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 추운 시절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옛정, 역경을 이겨내는 추사의 꿋꿋한 의지를 극도의 절제와 생략으로 그려낸 문인화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전문가들은 "'세한도'의 가치를 굳이 돈으로 환산하자면 최소 100억원 이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원복 전 실장은 "한·중·일 삼국의 명망가들이 감탄한 명작인 데다 무한한 스토리를 품고 있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며 "1조원을 붙여도 손색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배 관장은 "작품 소유권을 온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의미를 새기기 위해 올 연말 '세한도' 특별전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2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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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 주인 바뀐 세한도, 하마터면 일본서 폭격에 사라질 뻔

 

'세한도'는 작품 자체의 사연도 절절하지만 이후 소장 과정에도 곡절이 많았다. 이 불후의 명작을 우리는 자칫하면 못볼 뻔했다. 최초 소장자인 역관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세한도'는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을 거쳐 한말 권세가인 민영휘 집안으로 넘어갔다. 그 후 추사 연구에 일가를 이뤘던 경성제대 교수 후지스카 지카시(藤塚隣·1879~1948) 소유가 된다. 1943년 그가 이 그림을 갖고 일본으로 귀국하자, 서예가이자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컬렉터였던 소전 손재형이 이듬해 거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도쿄는 밤낮없이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손재형은 후지스카의 집으로 찾아가 100일간 문안하며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간청했다. 감복한 후지스카는 "결국 내가 졌다"며 돈도 받지 않고 '세한도'를 건넸는데, 석 달 뒤 후지스카 집은 폭격을 맞았다. 그가 소장한 상당수 책과 자료가 불타버렸지만 '세한도'는 극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손재형이 귀국해 이 기쁜 소식을 알리자 위창 오세창은 이렇게 칭찬했다. "폭탄이 비와 안개처럼 자욱하게 떨어지는 가운데 어려움과 위험을 두루 겪으면서 겨우 뱃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만일 생명보다 더 국보를 아끼는 선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소전은 영원히 잘 간직할지어다."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세한도'를 찾아온 손재형은 195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돈이 부족해지자 소장품을 저당잡힌다. 결국 개성 갑부인 손세기의 소유가 됐고, 아들인 손창근씨에 의해 국민의 품에 안겼다. '세한도'의 11번째 주인은 국민이 됐다.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20-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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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에 얽힌 비밀

 

KBS1 '역사 스페셜'

 

나무 네 그루와 집 한 채가 전부인 쓸쓸한 분위기의 그림 한 점. 추사 김정희의 걸작 이자 국보 180호인 '세한도'(歲寒圖)이다. 극도의 절제미와 거친 붓질로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맑게 표현한 이 그림은 청나라 명사들에게서 받은 감상문과 후세 문인들의 글까지 붙어 길이가 14m에 달한다.

KBS 1TV '역사 스페셜'은 10일 밤 11시 '국보 180호, 세한도에 숨은 비밀'을 방송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받는 세한도에 얽힌 뒷이야기를 전한다.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린 건 그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제주도에 유배 가 있던 시절이었다. 10년의 기나긴 유배생활은 추사의 정치적 배경이던 중국과의 교류를 차단했다.

추사는 관직에서 쫓겨난 동시에 학문에서도 단절되는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런 그에게 역관 이상적은 각종 귀한 책을 구해주며 세상 소식을 전해준다. 이상적의 의리에 감복한 추사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린 그림이 바로 세한도이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지고 가고, 청나라의 쟁쟁한 학자와 문인 13명으로부터 그림에 대한 찬사의 글을 받는다.

제작진은 "세한도는 질 낮은 허름한 종이 세 장을 이어붙여 그린 것"이라며 "세한도에 쓰인 질 낮은 종이에는 쓸쓸하고 곤궁한 자신의 처지를 돋보이기 위한 김정희의 철저한 계산이 담겨져 있었다"고 말한다.

 

-조선일보(11-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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