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내 안의 걱정 기계] [걱정은 '가나다순'으로 하는 거다!]

뚝섬 2024. 2. 24. 07:22

[내 안의 걱정 기계] 

[걱정은 '가나다순'으로 하는 거다!]

 

 

 

내 안의 걱정 기계

 

월미도에서 대관람차를 탄 적이 있었다. 어릴 때 재밌었던 대관람차가 공중으로 떠오르자 예상치 않게 너무나 무서웠다. 머리로는 안전하다는 걸 알지만 가슴은 쿵쾅댔고 지상으로 내려오기를 기도하듯 빌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걱정이 많아 걱정입니다’의 저자 ‘그램 데이비’는 걱정이 올림픽 종목이라면 집 안에 금메달이 가득했을 거라고 믿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에 의하면 걱정은 유전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만들어진 습관이다. 실제 연구는 우리가 걱정하는 일의 91%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무능이 탄로 날까 봐, 지각하거나,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될까 봐 수시로 걱정한다. 모든 걱정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걱정의 포로가 되어선 안 된다. 윌 로저스의 말처럼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아서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걱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생산적인 걱정’과 ‘파국적인 걱정’이다. 생산적 걱정을 하는 사람은 미래의 실패를 예비하며 플랜 B를 준비한다. 이때의 걱정은 오히려 그 사람의 경쟁력이 된다. 문제는 파국적 걱정이다. “~하면 어떡하지?”라는 질문만 쳇바퀴처럼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이런 파국적 걱정의 처방전은 질문을 “~하면 어떡하지?”에서 “그러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지?”로 바꾸는 것이다.

 

‘걱정이 많아 걱정입니다’의 번역가이자 상담자인 정신아는 상담실을 방문하는 걱정 많은 내담자를 ‘먹구름 속에 있는 손님’이라고 말한다. 시인 존 밀턴은 ‘실낙원’에서 “마음은 우리 자신의 처소이며 그 안에서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썼다. 중요한 건 걱정이 없는 삶이 아니라 걱정과 잘 공존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걱정의 먹구름 속에 있다면 먹구름 위에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세네카의 말처럼 가장 비참한 건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미 불행해져 있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백영옥 소설가, 조선일보(24-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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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은 '가나다순'으로 하는 거다!

 

근심 걱정은 대부분 사소하거나 손쓸 수 없어
노트에 적다 보면 불안의 실체도 분명해져

여수엑스포역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탄다. 오전에 올라갈 때는 해가 비치는 동쪽을 피하고, 오후에 올라갈 때는 석양빛이 강한 서쪽을 피한다. 차창 밖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구례 인근의 지리산 풍경이 최고다.

기차 여행이 시작되었을 때, 유럽인들은 기차를 아주 불편하게 여겼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은 아주 '가관(可觀)'이었다. 그래서 나온 표현이 '파노라마식 풍경(panoramatische Landschaft)'이다. 한 번에 모든 장면을 다 보여준다는 거다. 좋은 뜻이 아니다. 마차 여행에 비해 기차 여행은 전혀 현실감 없고 산만하다는 거다. 오늘날 기차 여행은 전혀 다르다. 이어폰의 음악이 있기 때문이다. 이어폰은 기차만큼이나 혁명적이다. 시각과 청각의 편집이 이뤄지며 내 삶의 이야기가 새롭게 구성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내러티브(narrative)'라고 한다.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 진짜다. 다른 사람의 귀를 의식하는 허세가 사라지는 까닭이다.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슈베르트의 '리트'나 바흐의 '평균율'을 가능한 한 심각한 표정으로 듣는다. 폼 난다. 그러나 '아재용 넥 밴드'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은 죄다 '7080 가요'다. 우연은 아니다. 평생 좋아하며 듣게 되는 음악은 청소년기가 끝나고 청년기가 시작되는 20세 전후에 들었던 것이 대부분이라는 심리학 연구 결과가 여럿 있다.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시절에 듣는 음악인 까닭이다.

김세환의 '목장 길 따라'를 듣고, 박인희의 '세월이 가면'을 흥얼거린다. 조영남의 '점이'가 이어 나오고, 이연실의 '조용한 여자'가 속삭인다. '차창 밖 풍경'과 '7080 음악'은 그 시절 내가 죽어라 쫓아다니던 '예쁜 여학생'을 모두 불러낸다. 그녀들로부터 난 매번 차였다. 처참해진 나는 내 나름대로 비장하게 복수했다. 세상의 '예쁜 여자'는 죄다 빈혈이나 변비에 걸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러나 세상에는 빈혈이나 변비에 걸린 '안 예쁜 여자'가 훨씬 더 많다. 차창 밖을 바라보며 이따위 느닷없는 기억들로 혼자 싱글거린다.


'공연한 불안'/그림 김정운

들판의 생뚱맞은 아파트가 보이기 시작하는 천안을 지나면서 내 심리적 상황은 급변한다. 갑자기 온갖 걱정거리가 떠오르며 공연히 불안해진다. 매번 그런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리 크게 불안할 이유는 없다. 실제로 우리의 걱정거리 가운데 정말 진지하게 걱정해야 할 일은 고작 4%에 불과하다고 한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나 이미 일어난 일, 또는 아주 사소하거나 전혀 손쓸 수 없는 일이 96%란 이야기다. 1년에 300일 이상을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를 볼 수 있는 여수 바닷가의 내 화실에 있을 때는 전혀 생각나지 않던 96%의 걱정거리가 희한하게도 천안 근처에만 오면 한꺼번에 밀려오며 불안해지는 거다.

'공연한 불안'에 대처하는 내 나름의 해결책은 걱정거리의 내용을 노트에 구체적으로 적는 일이다. 제목을 붙여 적다 보면 걱정거리는 '개념화'된다. 내 걱정거리의 대부분은 아무 '쓸데없는 것'임을 바로 깨닫게 된다. 아주 기초적인 셀프 '인지 치료'다. 간단한 덧셈과 뺄셈은 암산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복잡한 계산은 노트에 수식을 적어가며 풀어야 한다. 마찬가지다. 다양한 경로로 축적된 '공연한 불안' 역시 '개념화'라는 인지적 수식 계산을 통해 처리해야 한다. 생각이 복잡할 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이유는 바로 이 '개념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셰마(Schema)'라는 인지 구조로 무한대의 자극을 끊임없이 정리하며 살아간다. 스위스의 발달심리학자 피아제의 주장이다. 새로운 정보를 경험하면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셰마에 따라 해석하고 분류하는 '동화(Assimilation)'가 일어난다. 새로운 정보에 따라 셰마를 수정하는 '조절(Akkommodation)'이라는 반대 과정도 있다. 셰마 작동의 핵심은 다양한 형태의 '개념화'다.

동화와 조절이 일어나는 것은 '평형화(Äquilibration)' 때문이다. '평형화'란 자아와 세계의 조화로운 관계를 통해 '몸과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유기체의 본능이다. 불안은 평형 상태가 파괴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생물학적 메타포에 바탕을 둔 피아제의 이론은 오늘날 많이 '올드'하다고 여겨진다. 대안으로 좀 더 폭넓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인간 발달을 설명하는 비고츠키라는 러시아 혁명기의 문화심리학자가 요즘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인지 구조 변화의 동기를 '평형화'에서 찾는 피아제의 이론은 여전히 통찰력 있다. '인지'와 '정서'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는 이론적 계기가 포함되는 까닭이다.

'공연한 불안'의 개념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그 개념들을 '가나다순'으로 다시 한번 정리해보는 것도 좋다. '가나다순'으로 정리하는 것은 '개념의 개념화', 즉 '메타 개념화'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생각'인 '자기 성찰' 또한 이런 '메타 개념화'의 한 형태다. 개념화된 불안을 다시 한 번 상대화하면 불안의 실체가 더욱 분명해진다. 더 이상은 정서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불안은 기하급수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힘으로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불안과 걱정이 습관처럼 되어버린 이가 주위에 참 많다.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그렇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 한들 밤마다 불안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성공인가. '96%의 쓸데없는 걱정'에서 자유로워야 성공한 삶이다.

자주 웃고, 잠 푹 자는 게 진짜 성공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조선일보(18-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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