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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는 단순한 강수량 측정기가 아니었다] [측우기]

뚝섬 2025. 5. 26. 06:10

[측우기는 단순한 강수량 측정기가 아니었다] 

[측우기] 

 

 

 

측우기는 단순한 강수량 측정기가 아니었다

 

5월 19일 발명의 날은 1441년 5월 19일 측우기가 발명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금속활자나 한글, 거북선과 같이 세계적인 우리 발명품이 여럿 있지만, 발명자와 날짜가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측우기가 거의 유일하다.

 

세종실록은 이날을 이렇게 기록했다.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간 푼수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다.” 이처럼 측우기는 세종의 아들 문종의 작품이다.

 

몇 달 뒤 정부는 측우기의 규격과 설치, 측정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궁궐 밖 한강 변과 서울 인근 각 고을에서도 강우량을 재도록 했다.

 

주목할 것은 이렇게 건의한 부서가 호조였다는 점이다. 호조는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로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한다. 천문과 기상 관측을 담당하던 서운관은 예조 소속이었다. 1442년 측우기가 전국으로 확대 설치된 것도 호조의 건의로 이루어졌다. 측우기는 기재부(호조)의 주도하에 과기부(예조)와 산업부(공조)가 힘을 합친 범부처 합동 프로젝트였다.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가 측우기에 앞장섰던 이유는 명확하다. 조선의 산업은 농업이 대부분이었고, 농업은 강수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강수량은 국가 경제의 현황과 전망을 구체적인 수치로 파악하는 수단이고, 나아가 조세 수입까지 통계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과학이었다.

 

조선이 강우 통계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또 있다. 조선 초부터 농사법에서 가장 큰 논쟁은 이앙법이었다. 직파법에 비해 이앙법은 노동력을 줄이고 생산성은 올리지만, 때맞춰 충분한 비가 내리지 않으면 피해가 너무 컸다. 과학적인 통계가 절실했다. 그래서 강수량 보고를 허투루 하거나 빠뜨리면 엄하게 벌했다.

 

조선이 어떻게 측우기의 과학을 사용했는지는 정조실록에 잘 드러난다.

 

“신해년 이후로 내린 비의 많고 적음을 반드시 기록해 두었는데 1년 치를 통계해 보았더니, 신해년에는 8척 5촌 9푼이었고 임자년에는 7척 1촌 9푼이었고 계축년에는 4척 4촌 9푼이었고 갑인년에는 5척 8촌이었고 을묘년에는 4척 2촌 2푼이었고 병진년에는 6척 8촌 5푼이었고 정사년에는 4척 5촌 6푼이었고 무오년에는 5척 5촌 6푼이었다. 지난해와 올해의 이번 달을 가지고 계산해 보면, 지난해 이달에는 측우기의 물 깊이가 거의 1척 남짓이나 되었는데 올해 이달에는 내린 비가 겨우 2촌이다.”

 

어림짐작이 아니라 엄밀한 통계로 가을에 닥칠 경제 위기를 미리 대비한 것이다.

 

측우기는 언뜻 보면 단순한 원통에 불과하지만, 핵심은 크기였다. 임진왜란으로 잊힌 측우 제도를 부활한 것은 영조였다. 1770년 세종실록에서 측우기를 발견한 영조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세종 시절의 크기로 만들라고 지시한다.

 

폭이 넓으면 증발 효과로 오차가 심해지고, 폭이 좁으면 적게 내리는 비를 반영하지 못한다. 높이는 폭우도 받아내도록 깊어야 한다. 이렇게 폭 14cm에 높이 31cm로 측우기가 재현되었다. 또한 2mm 단위로 측정했기에 빗물이 튀어 들어가지 않도록 측우기를 받치는 측우대도 중요하다. 연구에 따르면 측우기로 잰 강수량은 세계기상기구(WMO)의 표준에도 맞을 만큼 정확하다.

 

이처럼 조선이 과학적인 국가 경영을 위해 만든 측우기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뜻밖에도 일본 학자의 노력 덕분이다.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는 1911년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한국의 기상학, 옛것과 새것(Korean Meteorology, Old and New)’이라는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은 조선은 이미 세종 시절부터 강우량을 측정하는 시스템이 있었고, 이는 서양보다 200여 년이 앞섰다는 점을 밝힌다. 도쿄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 기상청에 근무하다 1904년 러일 전쟁으로 한국 지역의 기상 관측을 위해 왔다가 측우기를 보게 되었다. 그는 조선의 측우 제도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더 놀라운 것은 1770년부터 재개된 서울 지역 강수량 기록을 1907년까지 찾아낸다. 무려 138년간의 기록이다. 그리고 당시 남아 있던 측우기 5기 중 두 개를 확보해 하나는 조선총독부 기상대에 기증하고, 다른 하나는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 기상청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있던 측우기들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모두 사라졌고, 일본으로 건너간 측우기만 유일하게 남았다. 이 측우기는 1971년 반환되었고, 2020년 정부는 이를 국내에 있던 측우대 2점과 함께 국보로 지정했다. 이 측우기는 1837년 제작되었지만, 세종실록을 영조가 재현한 크기와 일치하므로, 조선 초의 측우 제도가 조선 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경제 예측에 사용되는 ‘Forecast’라는 단어는 19세기 영국 과학자 로버트 피츠로이가 최초로 날씨 예보를 하면서 만들었다. 과학의 가치는 미래를 맞히는 것보다 다가올 어려움에 대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다.

 

측우기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순조 시절에 그려진 동궐도(국보 249호)에 측우기가 표기될 정도로 조선은 자신의 운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측우 제도를 유지했다. 조선의 측우기는 우리 조상들이 과학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과학으로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 정부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민태기 '판타레이' 저자·공학박사, 조선일보(25-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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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가뭄 걱정하던 세자 시절의 문종, 땅에선 빗물 재기 어려워 고안
고을마다 배치해 강우량 보고받아…
표준화된 세계 최초의 측우기지만 재난 예방에 활용했는지는 불분명
 

 

조선 시대의 과학기술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인 측우기(測雨器)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다는 뉴스가 최근 나왔어요. 문화재청은 기상청에 있는 보물 561호 '금영(錦營) 측우기'를 '공주 감영 측우기'란 명칭으로 바꿔 국보로 승격 예고했고, 측우기 받침인 측우대 두 점도 함께 국보로 승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어진 이 측우기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15세기 획기적인 발명품을 계승한 유물이라는 거예요.

◇측우기 발명자는 조선 5대 왕 문종

여기서 잠깐! 간단한 퀴즈를 하나 내 볼게요. 측우기란 내린 비의 양, 즉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시죠? 그럼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장영실'이란 답변이 많이 들리네요. 애석하지만 '땡!', 틀렸습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선 '세종실록' 1441년(세종 23년) 음력 4월 29일의 기록을 들여다봐야 해요.

'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해, 비가 올 때마다 땅을 파고 젖어 들어간 양을 봤다. 그러나 정확한 양을 알지 못했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에 둬 빗물이 그릇에 괸 양을 실험했다.'

실록에는 이렇게 측우기를 처음 만든 이가 세종대왕의 맏아들이었던 세자 이향이었다고 분명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향은 훗날 조선 5대 임금 문종(1414~1452)이 되지요. 그럼 왜 장영실이라고 잘못 알려졌을까요? 장영실은 세종 때 과학자고, 측우기도 세종 때 과학기술의 산물이기 때문에 혼동이 일어났던 것 같아요.

◇2㎜ 단위까지 측정해 보고


세자 이향은 '땅에 빗물이 스민 깊이는 토양의 습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빗물의 양을 정확히 잴 수 없다'는 고민 끝에 측우기를 고안했어요.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1442년 음력 5월 8일 측우기를 이용한 전국적인 우량 관측·보고 제도가 확정됐습니다. 강우량 측정 도구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고 하지만, 국가에서 쓰는 표준화된 측우기로는 세계 최초였다고 합니다.

 

측우기는 주철로 만든 원통형 그릇으로, 깊이 30㎝, 지름 15㎝ 정도 규격이었어요. 돌로 만든 측우대에 측우기를 올려놓고 비가 온 뒤 측우기 속 빗물의 높이를 푼(分·당시 기준으로 약 2㎜) 단위까지 정밀하게 측정해 보고했습니다. 전국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도 측우기를 나눠줘 비가 오고 갠 시간과 빗물 수심을 기록해 보고하도록 했어요. 임진왜란 이후 이런 관측 제도의 명맥이 잠시 끊겼다가, 1770년(영조 46년) 부활돼 1907년 일제의 조선통감부에 의해 근대적 기상관측 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과학기술과 애민(愛民) 정신의 산물

이번에 국보로 지정 예고된 측우기는 조선 시대에 충남 지역을 관할했던 공주 감영에 설치했던 것입니다. 1915년 일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반출했다가 1971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서양의 우량계는 우리보다 약 220년 늦은 1662년 처음 만들어졌죠. 하지만 실물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측우기는 우리 전통 과학기술이 상당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애민(愛民) 정신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측우기를 남들보다 앞서 만들었지만 잘 활용했던 걸까요? 조선이 측우기로 기록한 강수량 정보를 통계적으로 분석해 재난 예방에 활용했다는 증거는 분명치 않습니다. 고려는 금속활자를 세계에서 처음 만들었지만, 서양처럼 출판물을 대량으로 찍어내 대중을 계몽하지 못했지요. 이것이 뛰어난 과학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전근대 한국의 한계 아닐까요?
 

 

[문종은 고려사 편찬도 주도] 

 

측우기를 만든 세종의 아들 이향, 즉 조선 5대 왕 문종(재위 1450~1452)은 조선 왕 중 임금의 맏아들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던 군주입니다. '동국병감' '고려사'의 편찬과 병제 개혁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개인사는 무척 불행했습니다. 첫째, 둘째 부인이 잇달아 쫓겨났고, 세 번째 부인 현덕왕후는 아들(훗날 단종)을 낳은 뒤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종 자신도 왕위에 오른 뒤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고 말았죠. 단종은 문종의 동생이었던 수양대군에게 사실상 왕위를 빼앗기고 귀양지에서 죽었습니다.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양승주 기자, 조선일보(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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