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 영웅의 신발]
[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과 결혼 결심한 이유가?]
참전 영웅의 신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왕자 이아손의 별명은 ‘한쪽 샌들만 신은 사람’이란 뜻의 ‘모노 산달로스’다. 노파로 변신한 헤라 여신을 이아손이 업어 강을 건네주자 헤라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의 신발 한 짝을 강에 흘려보냈다. 신발은 이아손이 아기였을 때 아버지가 삼촌에게 빼앗겼던 나라로 흘러갔다. 이아손은 신발이 멈춘 곳을 찾아가 자기 신분을 되찾고 왕위에 오른다. 이아손 신화는 신발을 그 주인의 분신으로 보는 데서 비롯된 이야기다.
▶군인은 신발을 오래 신는 직군이다. 2차 대전 배경의 미국 드라마 ‘더 퍼시픽’엔 상륙작전을 끝낸 해병대원이 젖은 전투화를 말리려고 잠시 벗었다가 지휘관에게 “적이 기습하면 맨발로 싸울 거냐”며 “당장 다시 신으라”고 질책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필자도 군에서 24시간 군화를 벗지 않는 훈련을 받았다.
▶군화의 시초는 로마제국 때 신은 ‘칼리가에’다. 발을 다치면 전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보통 신발과 달리 가죽을 썼다. 가죽으로 발목까지 보호하는 반(半)장화 형태의 군화를 모든 장병에게 보급한 것은 2차 대전 때 미군이 시작했다. 베트콩이 미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하면 군화부터 빼앗았을 만큼 인기였다. 하지만 전투력 유지에만 집중하느라 위생과 편의성을 외면한다는 지적도 많이 받았다. 참호전으로 치러졌던 1차 대전 때는 젖은 군화 속에서 발이 썩는 ‘참호족’으로 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남자들도 군화 기억은 좋지 않다. 모두 딱딱한 저질 군화로 고생했다. 민원이 수도 없이 제기됐지만 군납 업체와의 유착 때문인지 바뀌지 않았다. 2010년대 들어서야 나일론과 고어텍스 재질의 신형 전투화가 보급됐다.
▶미국에선 전몰 장병을 기릴 때도 군화를 쓴다. 2014년부터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 전몰 용사 추모식을 여는 미 노스캐롤라이나의 포트브래그란 도시는 군화 7500개에 성조기와 전몰 장병 사진을 꽂는 방식으로 희생을 기린다. 늘 전쟁 상태인 이스라엘은 군인 인식표를 두 개 쓴다. 하나는 목에 걸고 또 하나는 군화에 꽂는다. 어떤 경우든 군화는 남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6·25 당시 동상을 입거나 불편한 군화를 오래 신어 발이 변형된 참전 노병의 발에 맞는 신발을 만들어 헌정하는 ‘6·25 참전 영웅맞이 신발 증정식’이 그제 서울 현충원에서 열렸다. 3D 스캔으로 발 모양을 파악해서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영웅의 신발’이다. 국가보훈부 차관이 참전 노병들 앞에 무릎을 꿇고 신겨 드렸다. 헌신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무릎 꿇는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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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 박정희 대통령과 결혼 결심한 이유가?
여러분에게 기억나는 뒷모습은 어떤 것인가? 누구의, 어떤 모습인가? 감히 말하건대, 아름다운 뒷모습을 많이 기억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남의 뒷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관심 배려 사랑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기주의자나, 욕심쟁이는 상대방의 뒷모습을 쳐다볼 여유나 이유가 없다. 육영수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과 결혼하게 된 데 대해 말한 적이 있다. “1950년 8월 하순 맞선 보던 날 군화를 벗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든든해 보였어요. 사람은 얼굴로써는 남을 속일 수 있지만 뒷모습은 남을 속이지 못하는 법이예요. 뒷모습은 정직하거든요. 그 후 몇 번 만나보니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의 뒷모습이 생각난다고 고백한다. 어렸을 적 넉넉하고 듬직한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생을 헤쳐나가는 의지와 힘을 배웠고, 가냘프고 연약한 어머니의 뒷모습에서 생을 아우르는 사랑과 헌신을 배웠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고 배우고 자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뒷모습을 거의 모른다. 아주 어렸을 적 아버지를 여의였기 때문에 아예 기억이 없으며, 어머니는 이후 줄곧 떨어져 살았다. 대신 나를 키워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은 기억하고 있다. 노쇠하고 약한 모습….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내 마음 속에는 늘 불안, 죽음, 고독 같은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감정을 느끼고 살았다. 내가 왜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마음이 불안했고, 힘들어 했던 이유는 훗날 이해하게 된다.
젊은 시절, 연애를 해도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헤어지는 것도 내가 먼저하고, 마음이 힘들어도 씩씩한 척하며 먼저 뒤돌아 갔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내 자신이 싫기도 했지만, 그것이 살아가면서 나를 지탱하고 상처를 덜 받으려는 나름의 생존방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한참 나중에 가서다. 중년이 넘어서까지, 나의 생존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나의 앞모습은 늘 행복하고 밝게 보이려고 애썼다. 내 주위에 친구도 많아 결코 외롭지 않았고, 어떤 어려움도 정면 돌파할 수 있다며 강하게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정작 나의 뒷모습은 늘 불안하고, 힘들고, 고독하고, 약했다.
이 양면성의 괴리가 사춘기 시절부터 오십이 다 된 나이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바람에 내 자아는 더 이상 성숙되지 못하고 인격은 둘쭉날쭉 했다. 영어로 ‘pretend to be(…인 척하다)’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버리고 혼자 개척하는 삶으로 뛰어들었다. 목표는 단순했다. 어떡하면 나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화해시킬 수 있을까.
세월이 흘러 아픔도 겪고 고생도 하면서 나는 자신과 조금씩 친해져 갔다. 어느 정도 마음 가는 대로 생활할 수 있게 됐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는 게 덜 두렵게 됐다. 'pretend to be…’ 하고 싶지 않으려면 내면의 울퉁불퉁함을 갈고 닦아야 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맞다. 사람의 앞면과 뒷면이 다른 것을 비상하게 알아차린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인격, 품성, 캐릭터(character)…. 이는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에 더 가깝다. 꾸밀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은 너무 앞모습만 중요시한다. 허울, 체면, 겉치레, 성형수술(앞모습 경쟁)이 넘친다. 앞에서는 온갖 좋은 말을 하지만 돌아서면 딴 생각하는 게 지금 세태다. 우리 사회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하다. 모두들 앞모습만 신경쓰고 뒷모습은 방치했기 때문이다. 앞모습은 멀쩡하나 뒷모습은 흔들리고 불안하다.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한 사람이 자살하거나 급사하는 이유도 같은 이치다.
1950년대 세계를 뒤흔든 영화배우이자 후에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1929~1982)는 1982년 자동차 사고로 숨지기 직전, 동승했던 둘째딸 스테파니 공주에게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당시 열일곱살난 스테파니는 한창 남자 친구 사귀느라 바쁜 중이었다. “남자들은 스테파니보다 공주를 더 사랑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뒷모습보다 앞모습에 좌우되는 인간의 속성을 일깨워주는 충고였다.
젊었을 적 우리도 각자 자신의 앞모습을 가꾸는 데 바빴다. 학력, 체력, 용모, 성격, 지식, 부, 경쟁, 지위, 명예, 권력 등등…. 그러나 이제 앞모습의 경쟁은 대충 판가름 났다. 인생 후반기에 접어들수록 우리는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가꾸는 데 신경써야 한다. 겸손, 배려, 사랑, 인내, 용기, 평온, 행복 등등… 뒷 모습은 그 사람의 내면과 마음을 ‘솔직하게’ 반영한다. 꾸미거나 감출 수가 없다. 결국 우리 스스로 내면을 갈고 닦을 수 밖에 없다. 뒷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진짜 아름다운 사람이다. 뒷 모습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
-글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조선닷컴(2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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