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국내]

[무주] [안국사와 史庫] [숲과 사찰] 요새 같은 험산… 조선의 정신을 지킨 절

뚝섬 2021. 11. 11. 05:05

[무주 안국사] [숲과 사찰] 요새 같은 험산… 조선의 정신을 지킨 절 

[적상산] 조선왕조실록 400년 품은 '붉은 치마'

 

 

 

[무주 안국사] [숲과 사찰] 요새 같은 험산… 조선의 정신을 지킨 절

 

측면에서 본 안국사 극락전. 1613년 안국사를 중수할 때 건립됐다.

 

대전통영고속도로를 달리다 무주톨게이트를 지날 때쯤 홀연 거대한 암벽을 두른 산이 그랜드캐니언처럼 버티고 서있다. 주위 산군과 너무나 판이한 모습에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 산은 적상산赤裳山(1,030.6m)이다. 가을 단풍이 산을 물들이면 붉은 치마를 두른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 ‘사면이 곧추 선 암벽이 층층이 험하게 깎여 마치 치마를 두른 것 같아 그 이름이니, 옛사람들이 그 험준함을 사서 성으로 삼았다. 두 갈래 길이 겨우 위로 열리지만, 그 안은 평탄하고 넓어 시냇물이 사방에서 솟아난다. 참으로 천연의 요새라… 옛날 거란병과 왜구가 근방 고을에 쳐들어왔을 때도 백성들이 모두 이곳에 의지하여 목숨을 보전했다’고 기록했다. 

 

가을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적상산. 단풍이 절정일 때면 산허리를 빨갛게 물들인다고 해서 적상산이다.

 

산허리까지 험준, 정상은 평탄

 

정확한 묘사다. 산허리까지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험준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상은 평탄하고 육산이라 숲이 매우 울창한 우리나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상 부근은 수백 년 된 참나무 군락지다.

 

적상산은 덕유산 주능선에서 살짝 떨어져 있지만 엄연히 덕유산국립공원에 포함돼 있다. 850~1,000m 봉우리들이 도열해 있지만 무주 지역은 고원지대여서 산에 오를 때 그다지 높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산행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산 서쪽 사천리 서창마을에서 장도바위·서문터 쪽으로 올라 향로봉 삼거리에서 능선길을 만난 뒤, 향로봉(1,029m)을 거쳐 안렴대에서 전망을 즐기고 안국사安國寺 방향으로 하산하는 2시간 30분짜리 코스가 가장 일반적인 산행로다. 어린 자녀나 어르신과 동행했다면 산의 8·9부 능선까지 차량으로 오를 수 있는 안국사 쪽 코스를 이용하는 것을 권한다. 안국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단풍철엔 산정호수 주차장에 주차) 200여m 나무계단길을 걸어오르면 산 능선과 만난다. 참나무 울창한 능선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향로봉까지 1.5km. 왼쪽으로 완만한 숲길을 따라 300m쯤 가면 안렴대에 이른다. 

 

적상산 정상 부분에 자리잡은 적상호. 양수발전을 위해 조성된 인공호수다.

 

버스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절

 

서창마을에서 시작하는 산행은 유서 깊다.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바로 그 두 갈래 길 중 하나다. 평범해 보이지만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산길이다. 적상산 산길은 어느 코스든 참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한 숲터널을 이루고 있어 걷고 쉬기에 좋다. 멀리서 적상산을 보면 무척 힘든 산행이 될 것 같지만 지그재그로 길이 이어지면서 완만하게 고도를 높이기 때문에 까다롭지 않다. 

 

오름길에서 큰 바위 하나가 길을 막고 선다. 장도바위다. 고려 최영 장군이 바위에 막혀 산을 오를 수 없게 되자 검長刀을 뽑아 힘껏 내리쳐 바위를 쪼개 길을 냈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다. 바위를 지나 조금 오르면 고려 말에 축성됐다는 적상산성(사적 146호). 한때 석축 둘레가 8km, 높이는 2m를 넘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폐허로 산성이라기엔 위압적이지 않고 나지막하다. 

 

무주 안국사는 우리나라에서 버스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찰로 해발 1,000m에 위치해 있다. 고려 충렬왕 3년(1277년)에 월인화상이 창건하고, 조선 초 무학대사가 삼재가 들지 않는 땅이라며 중창한 안국사는 광해군 6년(1614년) 조선왕조실록 봉안을 위한 사고史庫 지킴이 사찰로 지정된다. 난공불락 요새 같은 곳에 절을 짓고 중창한 이유는 외적으로부터 왕조실록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묘향산에서 조선왕조실록 가져와 보관 

 

적상산에서 조망이 가장 빼어난 곳은 안국사에서 500m 떨어진 안렴대다. 안국사 해우소 쪽으로 난 부드러운 길을 따라 10분가량 걸으면 닿는다. 안렴대는 산 남서쪽 절벽에 있는 수직 절벽 위의 암석 지대로 사방이 낭떠러지다. 거란이 침입했을 때 고려시대 지방장관인 안렴사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으로 피신해 난을 피했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병자호란 때는 적상산사고실록을 안렴대 바위 밑에 있는 석실로 옮겼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빼놓고 안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절 이름에서부터 나라를 지켜온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만주에 후금後金이 일어나 북쪽 국경이 불안해지자 조정에서는 묘향산 사고를 옮기자는 논의가 일어난다. 이에 인조 12년인 1634년부터 시작, 1641년에 적성산으로 이전을 마무리했다. 

 

실록을 보호하는 수호사찰 호국사가 지어졌고 이를 지킬 수호대를 조직했다. 이 모든 일을 담당한 이들은 승군僧軍이었다. 스님들은 사고가 옮겨오기 전부터 승군을 조직하고 성을 쌓고 사고를 세웠다.

 

드론으로 촬영한 안국사 올라가는 길.

 

관리는 줄행랑, 스님들이 사고 지켜

 

묘향산에서 적상산으로 사고를 옮긴 표면적인 이유는 후금의 위협이었지만 실제로는 사고 관리를 맡은 관리들의 업무 태만 때문이었다. 인조 때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동부승지는 이렇게 적었다 

 

‘묘향산 사고가 병란 이후 승려 한 사람만이 수직하고 있을 뿐이어서 적변이 없더라도 실록이 분실되기가 쉬우므로,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 보관해야 합니다.’ 

 

안국사 연혁에 대해 설명하는 이규평 종무실장

 

후금이 쳐들어오는 등 국경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정작 사고 수호 책임을 맡았던 말단 관리들은 모두 도망가고 스님 한 명만 남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적상산 안국사로 실록이 옮겨진 후에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재연된다. 청나라 군대가 무주 깊숙한 곳까지 출몰하자 실록을 지키던 관리들은 또다시 줄행랑을 쳤다. 스님들만 남아 안국사 뒤 안렴대에 실록을 숨기고 지켰다. 1643년 대제학 이식은 임금에게 이렇게 고한다.  

 

“적상산성에 청병이 들자 2~3명의 승僧만이 있었고 그나마 흩어져 도망하려 할 때 한 노승이 사고를 버리지 못하여 실록을 석굴 속에 감추어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노승이 승병장 상훈스님이다. 

 

왕이 아니라 성현이 다스리는 이상적 국가라고 자부하던 조선 왕실의 상징 ‘실록’에 들이는 정성과 관심에 비해 보존과 수호는 터무니없이 허술했다. 억불과 숭유를 국시로 내건 조선에서 왕조실록을 지켜낸 이들은 가장 탄압받던 승려들이었다. 

 

-글 이재진 편집장/사진 주민욱 기자, 월간 산(21-11-10)-

________________________

 

 

수몰 위기 안국사를 지킨 원행스님

 

외적에도 꿈적 않던 안국사를
수몰 위기에서 구한 원행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 안국사 주지를 맡고 있을 당시 한전을 설득해 수몰 위기의 안국사 이전을 성사시켜 절을 구했다.

 

이 땅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사찰인 안국사를 가려면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야 한다. 그래서 눈이 내리면 오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오르다보면 산중에 큰 호수 하나가 나타난다. 해발 800m에 위치한 적상호이다. 분지 지형 적상산에 높이 60m 길이 287m의 댐을 세우고 물을 가두었다. 이 호수는 여느 호수처럼 상수원이거나 농업용이 아니다. 1992년 8월부터 2년 2개월에 걸쳐 완공한 양수발전 시설이다. 이런 용도로는 청평·삼랑진과 함께 국내에 세 곳뿐이다. 

 

양수발전소 건설로 창건 후 최대 위기

 

안국사와 적상산 사고는 원래 적상호 안에 있었다. 수직 절벽을 이용한 양수발전소가 들어서게 되면서 안국사는 수몰 위기에 처한다.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사찰 이름처럼 이 땅의 명운과 함께해 온 사찰이 사라지는 것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팔짱 끼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당시 안국사 주지였던 원행圓行스님(현 조계종 총무원장)은 사찰을 옮겨갈 땅을 물색했다. 새 보금자리를 찾는 노력과 함께 한국전력을 상대로 길고 긴 설득작업을 시작했다. 절 이전에 대해 난색을 보이던 한전은 스님과 신도들의 설득으로 이전에 동의했다. 평지로 내려가면 모든 게 쉬웠다. 그러나 호국사찰이자 무학대사가 점지한 ‘국중제일사찰’이란 서원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지금의 안국사 자리이다. 1993년 적성산성 안에 있던 호국사 터로 절을 옮긴 것이다. 그 후 여러 차례 당우를 짓고 가람을 정비해 이 땅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도량으로 재탄생했다.  

 

현 총무원장 원행스님이 한전 설득

 

조계종 제36대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얼마 전 입적한 월주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안국사, 금산사, 개운사 주지를 역임했다. 원행스님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 상임이사, 지구촌공생회 상임이사, 승가원 이사장, 대통령 소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사회단체 활동 경력도 두루 쌓았다. 

 

금산사 주지 시절에는 ‘내비둬 콘서트’를 진행하며, 우리 사회가 미처 돌보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보살피고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했다. 

 

-글 이재진 편집당 / 사진 조계종 총무원, 월간 산(21-11-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북한이 실록을 먼저 '한글번역'한 이유는?

 

안국사와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돼 있던 적상산 사고지.

 

고려와 조선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조정의 동정을 기록했다. 실록이 편찬되면 별도 장소에 보관했는데 이를 사고史庫라 한다(고려실록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왕조는 서울에 내사고인 춘추관, 외사고인 충주, 성주, 전주 총 4곳에 사고를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리자 조정은 전쟁이 끝난 뒤 전주본을 원본으로 1603년(선조 36년)부터 3년간 다시 편찬했다. 

 

'이후에는 시내가 아닌 전란을 피할 수 있는 깊은 산중이나 섬에 보관했다. 원본인 전주 사고본은 강화도 마니산에 두었다가 정족산 사고로 옮기고 나머지 사고를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으로 분산 배치한 이유다. 조정은 사고와 실록을 지키기 위해 정족산 사고는 전등사,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 묘향산 사고는 보현사,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 등 수호 사찰을 지정했다. 

 

후금 위협에 안국사로 사고 옮겨

 

만주에서 후금 세력이 강해지자 위기를 느낀 조정은 정묘호란 직전, 묘향산 사고를 무주 적상산으로 옮긴다. 1,000m의 고지대인 데다가 내륙 깊숙한 지점이고, 적상산 자체가 요새 지형이기 때문이었다.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 공격하기가 어려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 거기에다가 적상산 정상 부근이 비교적 평탄한 평지였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적상산이 산성의 최적지로 주목받아 온 이유이기도 하다. 고려 말 최영 장군도 적상산에 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야 한다고 건의한 바 있다

 

이후 전국에 5대 사고가 존재하게 된다. 서울 내사고에 춘추관, 외사고는 강화도 정족산의 전등사, 무주 적상산의 안국사, 태백산의 각화사, 오대산의 월정사에 설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억불숭유로 탄압받던 불교 사찰이 보관하고 관리한 셈이다. 유생들이 기록한 조선 역사를 절에서 지켜냈으니 아이러니하다

 

6·25 때 인민군이 빼내 가

 

조선 25대 왕 472년의 기록, 1,893권 888책 분량인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졌다. 오대산 월정사 사고에 있던 ‘실록’은 일본인들이 도쿄로 가지고 갔다. 태평양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도쿄에 있던 오대산 사고 실록은 학자들이 빌려갔던 몇 권을 빼놓고 거의 불타 버렸다. 오대산 실록은 월정사 등의 반환운동으로 일본으로부터 되돌려 받았고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월정사는 현재 원래 자리인 월정사로 환수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도 ‘조선왕조실록’에 욕심을 냈다. 서울에 있던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북한 인민군이 빼내 갔으며, 현재 김일성대학에 있다고 한다. 북한이 남한보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해 <리조실록>을 만들수 있었던 것은 안국사가 지킨 적상산 사고 덕분이었다.

 

-월간 산(21-11-10)-

________________________

 

 

무주 안국사와 史庫

 

[조용헌 살롱]

 

세포가 기억하면 오래간다. 음식 맛 때문에 여행했던 도시와 동네가 생각나는 수가 있다.

 

20여년 전쯤 전북 무주 읍내의 백반집에서 상추쌈을 내놓는데 상추와 함께 고수가 같이 나왔다. 일명 ‘빈대풀’이라고 하는 고수는 맛과 냄새가 독특해서 호불호가 갈린다. 불교 스님들은 좋아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이 동네는 상추쌈에 고수를 같이 먹나요?” “여기는 옛날부터 같이 먹어요.” 어떻게 고수를 읍내 식당에서도 내놓는 전통이 생겼을까 하는 의문이 근래에 무주 안국사(安國寺)에 가 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안국사는 적상산(赤裳山) 정상 부근의 1000미터 고지에 자리 잡고 있는 절이다. 여름이 되면 나는 1000미터 높이에 있는 고지대 사찰과 암자를 돌아다니는 습관이 있다. 산 밑의 도시보다 대략 10도는 온도가 낮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 시대의 생존 전략이다. 안국사가 이렇게 고지대에 자리 잡은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된 사고(史庫)를 지키는 절이었기 때문이다. 적상산은 내륙 깊숙한 위치이면서도 사방이 바위 절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외부에서 공격하기 어려운 요새 지형이다. 정상 부근은 평평하다. 그래서 여기에다 적상산 사고를 지어 놓고 안국사 승려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조선시대는 북한산성의 관리와 방어도 불교 승려들이 하였지만, 왕조실록이라는 귀중한 기록 유산을 사찰에서 관리하고 지켰다. 대략 200여명이 적상산 사고를 지켰는데, 120명 정도가 승려들이고 나머지 80명이 관리 책임자인 종 9품의 참봉을 비롯한 일반인들이었다. 이 80명의 인원은 적상산 사고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무주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적상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산 위의 안국사 승려들과 같이 섞여서 생활하다 보니까 승려들이 좋아하던 향채(香菜)인 고수를 먹게 된 배경이 아닌가 싶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에서 임진란 때 유일하게 보존된 전주 사고의 실록을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 보관하다가 다시 병자호란 직전에 적상산 사고로 옮기게 되었다. 조선 후기 5대 사고는 강화도의 전등사, 태백산의 각화사, 적상산의 안국사, 오대산의 월정사 그리고 서울의 춘추관에 있었다. 적상산 사고의 왕조실록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졌다가 6·25 때 인민군들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다. 무주 사람들은 ‘적상산 사고 돌려달라’는 현수막을 걸고 데모를 하기도 한다. 북덕유산 향적봉이 눈앞에 보이는 안국사는 여름에 가면 쾌적한 서머 템플이다.

 

-조용헌 교수, 조선일보(21-07-05)-

________________________

 

 

[적상산] 조선왕조실록 400년 품은 '붉은 치마'

 

무주 적상산, 단풍과 구름바다 어우러져 절경… 과거 청나라 침입때 실록 지켜낸 '史庫'도

정상까지 15㎞ 이어진 굽잇길엔 향로봉·천일폭포·장도바위…
산 중턱의 머루와인 동굴도 독특

 

적상산(赤裳山·해발 1034m)은 붉은 치마(赤裳)를 두른 듯 아름답다는 이름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전북 무주군 덕유산국립공원 구역에 있는 이 산은 숨은 단풍 명소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지난 주말 찾은 적상산은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산골짜기를 휘감는 운해(雲海)는 언제나 장관이다.

 

무주 적상산 전망대(해발 860m)에서 바라본 단풍과 운해. 적색 계통 퇴적암이 높이 400m의 절벽으로 산 중턱을 감싸고 있고, 가을이면 붉은 단풍이 두드러져 풍광이 독특하다. 치목마을~안렴대, 서창 탐방센터~안국사로 이어지는 코스가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무주군

 

적상산은 조선시대 중국 청나라의 침입으로부터 왕조실록을 지켜낸 곳이기도 하다. 8~9분 능선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기암절벽은 천혜 요새였고, 이곳에 자리한 적상산 사고(史庫·해발 850m)는 400년 가까이 왕조실록을 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승병(僧兵)들이 거처로 삼은 안국사(安國寺·해발 950m)는 호국 사찰이었다.

폭포, 호수, 와인 동굴 등 볼거리 가득

적상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나 있는 굽잇길 15㎞를 차로 올라가다 보면 향로봉, 천일폭포, 송대폭포, 장도바위, 안렴대 등 명소를 만날 수 있다. 정상 분지엔 산정 호수(해발 860m)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적상산성과 안국사 등 유서 깊은 문화 유적이 많다. 풍광이 빼어난 이 도로엔 연중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32만5909명이 다녀갔고 올해 10월 말 현재 28만9332명이 찾았다. 해발 300m에서 시작한 나선형 도로를 따라 해발 700m쯤에 이르면 천일폭포가 토해내는 굉음에 차를 멈추게 된다.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폭포라고 해서 이름 지어진 천일폭포는 적상산 산정 호수 북쪽 계곡에서 암벽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산정 호수에 있는 전망대는 새벽 운해를 감상하기에 최적 장소다.

천천히 걸으며 적상산의 운치를 느끼려면 '서창 코스'를 이용하는 게 좋다. 총길이 3.8㎞(편도 2시간)인 이 코스는 경사가 완만하고 흙길과 계단으로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어 가족 단위 관광객이 찾기 편리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실록각(왼쪽)과 왕실 족보를 보관했던 선원각. /무주군

 

무주군 적상면 서창마을에서 출발해 1시간 정도 오르면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칼로 베고 지나갔다는 '장도바위'를 만날 수 있다. 여기서 1시간을 더 오르면 안렴대에 도착한다. 적상산 정상부인 안렴대 아래쪽에는 석굴이 있는데, 병자호란 때 조선왕조실록을 여기에 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길이 3.7㎞(편도 2시간)인 '치목 코스'에선 아름드리 편백나무 향과 단풍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산행으로 지친 몸은 산 중턱에 있는 머루와인 동굴 족욕 체험장에서 달랜다. 연중 온도 13~17도가 유지되는 이 동굴은 지난 1988년 무주 양수발전소 건설 당시 굴착 작업용 터널이었는데, 공사가 끝난 다음엔 머루와인을 숙성시키고 저장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했다.

황정수 무주군수는 "가을이 특히 아름다운 적상산은 덕유산과 함께 무주를 대표하는 산"이라며 "산사에 앉아 마시는 차 한 모금은 적상산을 오르는 길손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선물이다"고 말했다.

조선왕조실록 지킨 안국사와 적상산 사고

 

조선왕조실록 등 국가의 중요한 역사적 기록물을 보관했던 건물을 사고(史庫)라고 불렀다. 임진왜란때 조선에는 내사고(內史庫)인 한양의 춘추관(春秋館)과 외사고(外史庫)인 충주·성주·전주 사고 등 사고가 4개 있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건물은 물론이고 실록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는데, 이 중 전주 사고본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유생 안의·손홍록 등이 전주 사고본을 정읍 내장산으로 피란시켰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외사고는 모두 산속에 만들어졌다. 전주 사고본을 다시 인쇄해 태백산·오대산·묘향산·정족산에 보관했다. 묘향산 사고본은 인조 11년(1633년)에 무주 적상산 사고로 모두 옮겨져 병자호란(1636년)의 화를 면했다. 1614년 적상산에 실록전(實錄殿)이 세워지고, 1641년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이 들어서면서 이곳 사고는 묘향산을 대신해 조선 후기 5대 사고가 됐다. 현재 적상산 사고 전시관에는 조선왕조실록 복제본 34권과 왕실 족보인 선원록 복제본 5권이 전시되어 있다. 관광 해설사가 상주하며 방문객들에게 전시물 내용 등을 설명한다. 적상산 사고본은 6·25전쟁 당시 없어졌다. 김일성종합대학에 보관 중이라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다른 사고에 있던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과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 보관돼 있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은 "적상산은 적의 침입으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역사 문화유산을 지켜낸 장소"라면서 "적상산 사고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문화재다. 전주 사고를 복원할 때 참고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무주=김정엽 기자, 조선일보(16-11-07)-

 

 

========================================



적상산(赤裳山)(전북 무주): 웅장한 덕유산을 마주보다..   https://blog.daum.net/cgan14/793

 

 

[적상산(赤裳山)(전북 무주)] 웅장한 덕유산을 마주보다..

[안렴대에서의 조망.. 대전-통영간고속도로] 덕유산국립공원이면서도 본산인 덕유산의 그늘에 가려 무척 호젓한 적상산을 오르기로 한 날, 좋은 조망이 기대되는 맑은 하늘에 차가운 날씨.. 국

blog.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