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간이역, 하늘아래 첫 동네, 육지의 제주도...
5년간 40만명 다녀가.. 올해 11월 현재 10만여명 찾아
경북 군위군에는 화본(花本) 마을이 있다. 인근의 조림산(鳥林山)이 꽃뿌리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흙투성이 풀뿌리처럼 볼품없는 모습이지만 꽃뿌리는 끝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화본마을이 피워낸 꽃은 화본역이다. 한때 작고 쇠락한 시골 간이역이었던 이곳에 최근 5년간 관광객 40만명이 다녀갔다. 코로나가 퍼진 작년에 이어 올해 11월 현재 10만여명이 이곳을 찾았다. 인구 2만3000여명의 군위군에 일어난 기적이다.
군위군 삼국유사면 화산마을로 가는 7.6km 임도는 각종 승용차 행렬로 늘 붐빈다. 풍차와 하늘과 구름, 산줄기를 보기 위해서다. 1960년대 산지개간정책을 좇아 이주해 정착한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들을 위해 풍차를 세웠다. /군위군 제공
◇ 시간을 잠시 멈추고 싶다면 화본으로
지난 1936년 완공된 화본역은 경주와 서울을 잇는 간이역이다. 하루에 두 번 청량리역까지 가는 무궁화 열차가 이곳에 선다. 매 주말마다 화본역은 나들이를 온 가족과 연인들로 붐빈다. 지난 21일 이곳에서 만난 김민정(26)씨는 “주중에 지친 삶에 쉼표를 찍고 싶어 이곳에 왔다”면서 “시간이 멈춘 듯 소박하면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는 점이 화본역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군위군은 지난 2010~2013년 관광 자원 개발을 위해 화본역을 재정비했다. 전국에서 몇 개 남지 않은 급수탑이 이곳에 존재한다. 역사(驛舍)도 리모델링했다. 실제 코레일 기차를 개조해 만든 ‘레일카페’도 이때 생겼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옛 모습을 간직한 급수탑과 단아한 철길은 소중한 사람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배경으로 안성맞춤이다. 이런 매력을 경험한 철도 동호인들은 화본역을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꼽았다. 떠나기 전 역 앞에서 파는 달달한 꽈배기를 맛보면 추억이 설탕처럼 기억 속에 녹아든다.
화본역에서 북동쪽으로 100보 정도 걷다보면 산성중학교가 나온다. 2009년 3월 폐교된 공립중학교다. 이곳에선 1960~1970년대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체험시설 ‘엄마아빠 어렸을 적에’는 화본마을 주민들이 산성중학교의 교실을 리모델링해 추억을 되새길 공간으로 재단장한 곳이다.
1층에 들어서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50년 전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동네 어귀마다 흔했던 구멍가게 ‘역전상회’를 돌아 들어가면 오래 묵은 듯한 종이 냄새가 물씬 풍긴다. 책방 ‘경북서점’이다. 건전지를 파는 전파상과 만화방, 이발소와 연탄가게도 보인다. 추억 여행을 마치고 학교 뒤편으로 나오면 옛날 사진관과 오락실은 물론, 그 시절 교련복과 교복을 입을 수 있는 공간도 꾸며져 있다.
화본마을에서 북쪽으로 승용차로 10분 정도 이동하면 우보면 미성리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가 있다. 영화가 개봉한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이어지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 ‘혜원(김태리 분)’처럼 삶에 잠시 쉼표를 찍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이곳은 일종의 ‘성지(聖地)’가 됐다.
군위군 관계자는 “도시 사람들이 군위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곳이 많기 때문”이라며 “화본역과 화본마을이 관광지로 조성된 배경도 이와 연관된다”고 말했다. 이들의 혜안과 손길 덕에 시골 작은 역을 보기 위해 오늘도 많은 길손들이 군위를 찾는다.
군위군은 지난 2010~2013년 관광 자원 개발을 위해 화본역을 재정비하고, 역사(驛舍)를 리모델링했다.
◇ 하늘 아래 너희가 처음이었구나
화본마을에서 동남쪽으로 30분 정도 차를 타고 삼국유사면으로 들어가면 ‘화산마을’이 나온다. 해발 800m 화산의 분지에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60여가구가 이곳에 산다. 하늘 아래 산이 있고, 그 산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기에 군위에선 화산마을을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부른다.
화산마을을 방문한 이들이 가장 먼저 찾는 명물은 바로 빨간지붕이 매력적인 풍차다. 풍차가 있는 마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한눈에 군위댐이 들어온다. 풍차 옆에는 사각형 액자 모양의 포토존이 놓여있다. 화산마을이 액자 속에 오롯이 담기는 절경을 찍기 위해 관광객들이 줄을 서기도 한다.
화산마을에는 과거 조선 숙종 때 병마절도사 윤숙이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화산산성이 있다. 쌓다만 성이다. 윤숙은 나라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신의 재산과 스님들이 시주한 돈으로 공사를 진행했으나 흉년이 들고 질병이 퍼져 축조는 유야무야됐다고 한다.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성을 헐지 않은 이유에 대해 지역 주민들은 “백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관리의 뜻을 차마 허물 수 없었다는 속설이 있다”고 했다. 관리와 백성이 모두 서로를 돌본 것이다.
화강암이 이룬 웅장한 산세와 아름다운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군위 팔공산 하늘정원.
◇ 밤이 그리우면 한밤마을로
국립공원 승격을 앞둔 팔공산은 군위군 부계면을 가로지른다. 부계면에는 ‘육지의 제주도’로 불리는 한밤마을이 있다. 집집마다 야트막한 돌담들이 둘러쳐져 있는 이곳은 육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돌담집 명소다.
한밤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1만 6000㎡(약 4800평)의 소나무 숲이 반긴다. 마을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홍천뢰 장군 추모비가 세워져있고, 부림 홍씨 문중의 최대 규모 한옥인 남천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남천고택은 원래 흥(興)자 형의 독특한 배치 형태를 이루고 있었지만 중문채와 아래채가 철거돼 현재는 ‘ㄷ’자형 안채와 ‘ㅡ’자형 사랑채, 그리고 사당이 남았다. 건물 주위는 자연석 돌담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건물 옆에는 경북도 지정문화재인 대율리 대청이 담장에 잇대어 있다. 숙박이 가능하고 다도·한식·국악 등 다양한 체험형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남천고택에서 북쪽으로 4㎞ 떨어진 곳엔 지난해 창평지 친환경 생태공원이 새롭게 조성됐다. 부계면의 저수지인 창평지 주변 1.8㎞ 생태탐방로(산책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근심걱정도 사라진다. 야간에는 산책길 곳곳에 설치된 조명이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뤄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알려져 있다.
부계면 동산리 일대에는 팔공산의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등산로 ‘원효 구도의 길’이 있다. 군위군이 부계면의 오도암(悟道庵)에서 신라시대 명승 원효대사가 득도했다는 것을 토대로 흔적을 찾아 2㎞ 길이 탐방로를 조성했다. 이곳에서 명장 김유신 장군도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오도암 옆으로는 원효대사가 기거했다는 원효굴과 하늘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온다. 참나무 숲으로 그늘진 900여 계단을 오르다보면 사방이 탁트인 하늘정원으로 이어진다. 6000여㎡의 공간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 전망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이곳에서 1㎞를 더 오르면 팔공산의 최고봉인 해발 1193m 비로봉이 나타난다. 팔공산 연봉 북쪽 기슭엔 자연 절벽의 동굴 속에 만들어진 국보 군위삼존석굴이 있다. 제2석굴암으로 알려진 이 석굴은 700년경 조성된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세지보살입상, 관음보살입상이 위치해있다.
군위는 길손들의 마음까지 보듬기에 충분한 사색 여행지다. 여유를 두고 돌아보면 아름다운 자연과 마을의 조화, 느림의 미학, 여기에 현대인의 손길까지 더해져 활기차고 찬란한 공기를 느낄 수 있다.
-권광순/이승규 기자, 조선일보(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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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에 가면…
바보 밥상·바보 도시락… 사과대추·한우·꿀… 삼국유사 테마파크…
삼국유사의 콘텐츠를 시각화한 삼국유사 테마파크는 다양한 조형물과 교육·체험 프로그램들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체험과 볼거리를 동시에 제공해 주는 문화와 관광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이다. /군위군 제공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년 걸렸다.”
경북 군위군 군위읍 ‘김수환추기경 사랑과나눔 공원’ 안돌벽에 새겨진 글귀다.
“이웃은 나의 모습을 비추어 보는 큰 거울이다” 등 9개 주옥같은 격언은 모두 한국 최초 추기경인 고(故) 김수환(1922~2009)추기경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나눔공원 내엔 김 추기경의 생가도 있다. 대구가톨릭대 전신인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김 추기경은 이곳에서 유년시절의 추억을 새겼다.
지난해 8월 김 추기경이 생전 즐겨 먹던 소박한 상차림을 재현한 ‘바보 밥상’을 도시락으로 만든 바보 도시락.
◇ '바보 밥상’ 이어 ‘바보 도시락’까지
지난 25일 군위군은 ‘행복한 바보 도시락’ 품평회를 가졌다. 바보 도시락은 지난해 8월 김 추기경이 평소 즐겨 먹던 상차림을 재현한 ‘행복한 바보 밥상’을 도시락으로 만든 것이다. 먹는 음식에 ‘바보’가 붙은 이유는 평소 자신을 바보라 부르며 겸양한 김 추기경의 뜻을 담았기 때문이다.
바보 밥상은 밥과 쇠고기 시래깃국, 고등어구이, 3색 나물, 장떡, 등겨장, 장아찌 등으로 차렸다. 이 식단은 김 추기경이 지난 2009년 선종할 때까지 16년간 곁을 지킨 김성희 유스티나 비서수녀에게 자문해 짰다. 시래기국 안에 소고기가 잘게 다져 넣어진 것은 평소 추기경의 치아 상태를 고려한 것이다.
흑보리빵과 수제햄, 요거트소스로 구성된 ‘글로벌 바보 도시락’도 준비돼있다. 흑보리빵은 김 추기경이 독일 유학 시절 즐겨 먹었던 음식이다.
바보 밥상은 군위군 부계면에 위치한 식당 ‘작은 영토’, 효령면에 위치한 ‘본가원’과 ‘고지바위권역다목적센터’ 3곳에서, 바보도시락은 작은 영토에서 맛볼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사랑이 담긴 소박한 식사를 마친 뒤 나눔공원을 산책하면 세속에 지친 몸과 마음에 평화가 절로 오는 것 같다.
군위 벌꿀은 꿀벌들의 체온과 수억번의 날개짓으로 숙성시켜 자연 그대로의 맛을 유지한 게 특징이다.
◇ 사과대추·한우·꿀…군위의 맛
군위에서 재배되는 대표 농산물은 대추·자두·가시오이다. 그 중에서도 대추를 으뜸으로 꼽는다. 군위는 전국 대추 생산량의 20%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대추 주산지다. 군위 대추는 ‘사과대추’로도 불린다.당도가 높고 아삭거리는 식감이 사과와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우보면 ‘참맛대추농원’의 이재혜 대표는 매년 주먹만한 크기의 사과 대추를 생산한다. 지난 2009년 서울에서 군위로 귀농한 이씨는 “군위 대추를 세계 최고로 만드는 게 목표”라며 “5년간 시행착오 끝에 당도가 높고 굵직한 대추 재배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손상된 대추는 폐기하고 잘 익고 잘 생긴 대추는 자연건조와 저온저장을 거쳐 30브릭스 이상의 높은 당도를 유지한다. 그 결과 이씨의 대추는 까다롭기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할랄 인증을 통과했다. ‘참맛대추농원’에선 연간 13t 정도의 대추를 수확하는데, 대추 외에도 대추 스낵과 대추 엑기스, 대추청 등을 개발해 판매하고 있다.
한우도 빼놓을 수 없는 군위의 맛이다. 효령면에 형성된 한우촌에는 코로나 시국에도 전국에서 몰려드는 식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군위 이로운 한우’에선 달궈진 돌판에 고기 한점을 올리고 육즙이 올라오면 한번만 뒤집어 익혀 먹는 쇠고기가 일품이다. 굵은 천일염으로만 간을 해 한우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군위읍에 위치한 ‘민속LPC’는 최신식 장비가 설치된 우사에서 한우 3만 두를 길러내 안심·등심, 돼지 삼겹살과 목살 등을 취급한다. 소·돼지를 사육할 때 항생제를 쓰지 않고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친환경 인증도 획득한 업소다.
군위읍에 위치한 비해피양봉협동조합에선 자연숙성꿀을 판매한다. 이곳에선 일반 꿀보다 공정이 두 단계 많은 벌꿀 수집→꿀벌 숙성→벌꿀 밀봉→밀랍 제거→벌꿀 채밀 등 5단계 작업을 도입했다. 휴대하기 용이한 스틱형 꿀인 ‘비해피 허니스틱 시그니처’는 인기 상품이다. 비해피양봉협동조합 관계자는 “숙성되지 않은 꿀을 채밀해 인위적으로 저온 숙성을 하면 자연 그대로의 꿀이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꿀벌들의 체온과 수억번의 날개짓으로 숙성이 된 꿀이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맛이 난다”고 말했다.
항생제를 쓰지 않는 군위 한우는 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HACCP)·친환경 인증을 획득한 최신식 장비가 설치된 우사에서 출하된다.
◇ 사계절 매력적인 삼국유사 테마파크와 캠핑 체험도
군위 IC를 통해 들어서면 가장 먼저 삼국유사 책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삼국유사의 고장답게 행정구역명에도 삼국유사면(面)이 있다. 고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하고 입적한 사찰 인각사도 이곳에 있다.
군위군은 지난해 의흥면에 삼국유사 테마파크를 조성했다. 전국 최초로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놀이공원으로 72만 2000㎡ 규모다.
신라 22대 지철로왕(지증왕) 때 적군을 섬멸하기 위해 만든 사자상, 웅녀 동굴, 만파식적 조형물 등이 있고, 여름에는 용을 형상화한 물놀이장인 해룡 놀이터와 해룡 슬라이드가 인기다. 놀면서 삼국유사를 배울 수 있는 전시관인 ‘가온누리관’이 있고, 체험 공간인 ‘숲속학교’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많이 찾는다. 코로나로 엄중한 상황에서도 지난해 입장객 8만명, 올해는 10월 기준 10만명이 방문했다.
효령면의 ‘위천수변테마파크’는 주말이면 캠핑족들로 붐빈다. 간동유원지 건너편에 사랑교를 사이에 두고 조성된 이곳엔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걷기에 좋은 숲길 탐방로가 설치돼 있다.
-이승규 기자, 조선일보(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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