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이름에 담긴 전쟁.. 블라디미르 vs 볼로디미르] .... [전쟁과 평화] ....

뚝섬 2025. 3. 27. 08:17

[이름에 담긴 전쟁… 블라디미르 vs 볼로디미르]

[한 러시아계 유대인이 우크라이나 운명을 바꾸고 있다]

[전쟁과 평화]

[왜 폭력은 계속되는가]

 

 

 

이름에 담긴 전쟁… 블라디미르 vs 볼로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이름은 블라디미르(Vladimir),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이름은 볼로디미르(Volodymyr)다. 그렇다. 뿌리는 같다(share the same root). 고대 슬라브어 이름 ‘볼로디메루(Volodiměrŭ)’에서 유래했다(originate from the ancient Slavic name). 두 나라의 언어 진화에 따라 변형됐다. 뜻은 같다. ‘세계를 다스리는 자(ruler of the world)’ 또는 ‘위대한 통치자(great ruler)’.

 

이러한 언어적 차이(linguistic distinction)는 두 국가 관계에서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hold profound significance).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식이 아닌 자국어 철자법과 발음에 유난히 단호하다(be resolute). 저항·독립·주권·정체성의 상징적 구호(rallying cry)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도 이름도 러시아식인 ‘키예프(Kiev)’가 아닌 ‘키이우(Kyiv)’로 불러달라고 전 세계에 호소한다(appeal to the world).

 

두 나라의 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넘어(extend beyond the bloody battlefield) 언어·문화·역사의 영역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의 무력 침공(military invasion)뿐 아니라 문화적 영향력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며(resist desperately), 독립적인 국가 정체성을 지켜내고(preserve their independent national identity) 있다. 그런 점에서(in this regard) ‘블라디미르’와 ‘볼로디미르’의 차이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be by no means trivial). 현재의 지정학적 맥락에서(in the current geopolitical context) 엄청나게 함축적인 의미를 갖는다(carry enormous implicit meaning).

 

‘블라디미르’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전통과 옛 소련의 유산을 연상시킨다(evoke the imperialist tradition and legacy). 푸틴은 이를 바탕으로 확장 정책을 정당화하려(justify his expansionist policies) 한다. 반면, ‘볼로디미르’는 우크라이나의 복원력(resilience)·주권(sovereignty)·정체성·독립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젤렌스키는 그 이름의 역사를 배경으로 국운을 지키는(safeguard the nation’s fate) 저항의 상징이 됐다.

 

챗GPT를 통해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푸틴과 젤렌스키라는 성(surname)에도 각각 특유의 의미가 있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speak volumes). ‘푸틴’은 러시아어 ‘путь’에서 유래했으며(be derived from ‘путь’), ‘길’ 또는 ‘진로’를 뜻한다. 이에 비해 우크라이나어 ‘зелений’에서 생겨난 ‘젤렌스키’는 ‘초록색’을 뜻하고, 재생(renewal)·성장(growth)·희망(hope)을 상징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제패 제국주의 과거(imperialist past of global domination)로 돌아가려는 블라디미르와 자유로운 독립국가 미래를 이끌려는 볼로디미르, 군사 확장 야욕의 길을 가려는 푸틴과 폐허 속에서도 솟아나는 녹색 새싹(green sprout rising from the ruins)의 희망을 피우려는 젤렌스키의 건곤일척(do-or-die struggle)이다.

 

-윤희영 에디터, 조선일보(2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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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대학 탄압’에 美 과학자들 다수 유럽行. 2차대전 때 유럽 떠나 美 갔던 과학자들은 核개발 했는데….

 

-팔면봉, 조선일보(2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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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러시아계 유대인이 우크라이나 운명을 바꾸고 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우크라이나 대통령 44세 젤렌스키 

 

젤렌스키는 1978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다. 아버지는 컴퓨터공학 교수였고, 어머니도 공학자였다. 몽골에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몽골에서 살다 어머니 건강 문제로 4년 만에 귀국했다. 

 

젤렌스키와 아내 올레나-2019년 대선 토론회에서 부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젤렌스키. /게티이미지코리아

 

“친구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사람이 친구에게 우유를 건네는 사람보다 낫다”고 탈무드는 강조한다. 랍비 샴마이는 “모든 사람을 쾌활하게 맞이하라”고 가르치며, 자신의 우울함과 침체된 분위기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다. 유대인의 인생관은 할 수만 있다면 “아낌없이 즐기라”는 것이다.

 

이런 교육 덕분에 젤렌스키는 어려서부터 밝고 긍정적인 기운으로 남을 웃기는 재주가 탁월했다. 10대 때는 운동을 좋아해 역도와 레슬링을 배웠다. 한편 예능에도 소질이 있어 춤도 잘 추고 학교 앙상블의 기타리스트로도 활동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한 젤렌스키는 1997년 코미디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며 주목받는 코미디언이 되었다. 그는 19세에 ‘크바르탈95′라는 연예 기획사를 설립해 자신이 주연을 맡아 사회 풍자 드라마와 영화를 여러 편 제작했다. 그의 드라마는 모스크바를 비롯해 구소련 공화국들에서 공연되었다. 젤렌스키는 일과 공부도 병행해 명문 키이우(키예프) 국립경제대학에서 경제학 학사와 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에는 댄스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15년부터 방영된 ‘국민의 종’이라는 51부 작 대하드라마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 드라마는 부패한 우크라이나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제작자 겸 주연인 젤렌스키는 드라마에서 고등학교 역사 교사 역할을 맡아 학생들 앞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를 성토했다. 이 장면을 한 학생이 몰래 촬영해 온라인에 올리는 바람에 역사 교사는 국민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되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 그가 부패 정치인들을 몰아낸다는 게 드라마 줄거리다. 시청자 수가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2000만명에 이를 정도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후 젤렌스키는 ‘국민의 종’ 출연진과 함께 같은 이름의 정당을 2018년 창당해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이 높아, 젤렌스키는 새로운 인물이라는 점을 어필하여 현직 대통령을 3배 가까운 차이로 꺾으며 당선되었다. TV 드라마가 현실이 된 것이다. 2019년 41세의 최연소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나는 평생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해 왔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었다. 이제 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최소한 울지 않도록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피란민 구조하는 우크라이나軍-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유모차를 들어 옮기며 피란민들을 돕고 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인근 도시인 이르핀은 러시아군 공습으로 다리가 파괴되고 민간인 사상자들도 잇따르고 있다. /AP 연합뉴스

 

젤렌스키는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온건 중도파로 분류됐다. 친서방파와 친러파로 양분된 정치 구도에서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라는 혈통 문제까지 겹치며 양쪽에 포위당한 처지였다. 하지만 젤렌스키는 정파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안보 외교에 총력을 기울였다. 취임 후 첫 정상회담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가지며, 돈바스 전쟁에 대한 문제를 의논했다. 다음으로 독일을 방문해 메르켈 총리와 러시아-독일을 잇는 가스관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후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길에 트럼프와도 만났다. 전반적으로 적극적 친서방 행보를 보여 러시아의 푸틴과 앙숙이 되었다.

 

올해 초부터 러시아가 18만 대군을 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지자 그는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다. 2월 19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회의에 참석해 러시아와 맞서온 우크라이나의 희생, 유럽과 나토(NATO)의 이기적 태도를 비판하며 유럽 안보 구조의 재구축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에 대한 서방의 대응이 부족하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젤렌스키의 독일 방문은 그가 우크라이나를 벗어난 틈을 타 러시아가 공격할 수 있다는 미국 측 우려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것이다.

 

그는 “우방국들의 지지가 있든 없든 우리는 조국을 지킬 것”이라면서, 무기 등의 지원에 감사하지만, 이는 우크라이나가 구걸해야 하는 사안이 아님을 강조하고 “이는 우크라이나가 머리를 조아려야 할 게 아니라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 합병 이후 8년간 유럽의 안보를 위해 방패 역할을 해온 기여”라고 주장했다.

 

2월 24일 드디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에 미사일 폭격을 가하며 쳐들어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8세부터 60세까지 국민 총동원령을 내렸다. 같은 날 그는 EU 정상 회의에서 5분간 영상 연설을 통해 지지를 촉구했다. “오늘 제가 살아있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운을 뗀 그는 “우리는 지금 유럽의 이상(理想)을 위해 죽어가고 있다”고 호소했다. 같은 날 저녁에 올린 연설 영상에서 그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지 않으면 “내일 전쟁이 당신들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며 서방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경고했다. 그의 호소와 경고는 즉시 효력을 발휘했다. 서방은 즉각 러시아 제재에 들어갔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각종 지원이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후 러시아가 3차례 이상 젤렌스키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다. 그는 러시아의 최우선 목표가 자기 제거임을 알면서도 수도 키이우를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밝히며 결사 항전을 다짐했다. 러시아가 “젤렌스키가 수도를 탈출했다”는 허위 보도를 하기 시작하자 그는 SNS를 통해 수시로 근황을 알리며 국민들을 단결시켰다. “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겁니다. 조국을 지키겠습니다. 우리의 진실은 이곳이 우리 땅, 우리 조국, 우리 후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지키겠습니다.” 그는 하루 3시간 정도만 자며 강인하고도 치밀한 모습으로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3월 1일 젤렌스키는 유럽 의회에 화상 연설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웁니다. 자유와 생명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유럽의 동등한 일원이 되기 위해서도 싸우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걸 증명해 주십시오. 당신들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증명해 주십시오. 당신들이 실로 유럽인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시오. 그러면 삶이 죽음을 이기고, 빛이 어둠을 이길 것입니다.”

 

젤렌스키가 수도를 사수하기로 한 결정은 큰 영향을 끼쳤다. 개전 직후 사흘 이내에 함락될 것이라 여겨졌던 키이우는 최고 통수권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열흘이 지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우크라이나는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아 악조건 속에서 전쟁을 버텨내고 있다. 그의 용기와 외교술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끌어냈다.

 

3월 3일, 개전 이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그는 죽는 게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을 받자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또 자식들이 죽는 것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으로서 나는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역사 흐름을 바꾼 유대인

 

한 유대인이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바꾸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이야기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뉴욕타임스(NYT)는 코미디언 출신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옛 동료들을 중용하여 측근 정치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코미디언으로 채워진 우크라이나 정부가 많은 실책을 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정치는 마치 코미디 호러 드라마 같다며, 전문가가 없는 정부, 외교관 없는 외교부, 장군 없는 군 지휘부가 언제 붕괴할지 모른다고 전했다. 한마디로 아마추어 정치가가 국가 대사를 망치고 있다는 요지였다.

 

하지만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그가 한 결연한 행동을 본 외국 언론들은 태도가 일변했다. 특히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3월 2일 ‘어떻게 젤렌스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수호하고 세계를 통합시켰나’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에서 그에 대한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타임은 “러시아의 암살 위협에도 수도에 남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북돋웠다. 찰리 채플린이 처칠로 변모했다. 어떤 의미에서 샤를 드골보다 용감하다. 전쟁 지도자로서 처칠과 동급이다”라고 극찬했다. 또 “일주일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계의 민주주의 국가들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러시아의 침공 후 미국은 암살 위협을 받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보호하고자 망명을 제안했다. 그러나 젤렌스키는 “여기가 (내) 싸움터다. 나는 (도피용) 탈것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며 거절했다. 타임은 러시아군이 키이우 코앞까지 쳐들어왔음에도 도피하지 않고 수도를 지킨 그의 자세가 “역사의 흐름을 바꾼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평했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2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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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고통 견디며 전쟁 치른 무수한 시민들… '역사 주체는 영웅 아닌 민중' 전했죠 

/위키피디아

 

죽으러 가는 거예요. 말씀해주세요, 대체 뭐 때문에 그런 끔찍한 전쟁을 해야 하는 건지.

1869년 출간된 러시아 출신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전쟁과 평화'는 "우리 시대 가장 방대한 서사시이자 현대의 '일리아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고전이에요.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죠. 전쟁과 평화는 1950~1960년대 미국과 소련에서 영화<사진>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나폴레옹을 숭배한 주요 등장인물 안드레이피에르가 전쟁을 경험하며 삶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을 담아냅니다. 나폴레옹의 지휘 아래 유럽을 발아래 둔 프랑스군은 1805년 러시아와 전쟁을 일으켜요. 이 전쟁이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줄 거라고 생각한 러시아 볼콘스키 공작의 아들 안드레이는 나폴레옹을 숭배하면서도 조국을 위한 전쟁에 참전하죠.

그해 말 벌어진 결전에서 러시아군은 대패하고, 안드레이도 중상을 입어요. 그는 자신의 욕망이나 명예욕이 사실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적군이지만 숭배했던 나폴레옹도 숭배의 대상에서 멀어졌어요. 그는 우여곡절 끝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아들을 낳자마자 숨을 거두는 아내를 보며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하게 되죠.

또 다른 등장인물 피에르 역시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인물입니다. 그는 돈 많은 백작의 사생아로, 백작의 전 재산을 상속받고 러시아 상류사회의 유명 인사로 떠올랐어요. 그의 재산을 탐낸 후견인 쿠라긴 공작은 품행이 단정하지 않은 자신의 딸 옐렌과 피에르의 결혼을 성사시켜요. 하지만 아내 옐렌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이 돌고, 곧 별거에 들어가요. 피에르는 이때부터 선악의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게 돼요.

두 사람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춘 사람은 로스토프 백작의 딸 나타샤예요. 로스토프 백작의 집을 방문한 안드레이는 생명력 넘치는 나타샤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아요. 하지만 약혼하지는 못해요.

1812년 다시 전쟁이 발발하고 러시아군은 모스크바까지 내줘요. 로스토프 가문은 부상병들의 이송을 돕고, 나타샤는 죽음을 목전에 둔 안드레이를 정성껏 간호하지만 그는 곧 세상을 떠납니다. 피에르는 모스크바에 남아 나폴레옹을 암살할 기회를 노리다가 적군의 포로가 돼요. 그곳에서 한 사람의 영웅이 아니라 성실하고 우직한 병사들, 소박한 삶의 지혜를 가진 농민들이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전쟁은 끝나고, 피에르와 나타샤는 결혼합니다.

톨스토이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나폴레옹 같은 소수의 영웅이 아니라 전쟁터를 지킨 이름 없는 시민들임을 작품 내내 보여줘요. 책에 등장하는 550명 이상의 인물 모두가 역사의 이끌어가는 주체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 책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묵직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본부장, 조선일보(2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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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폭력은 계속되는가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일리야 레핀 작품 '이반 4세와 그의 아들 이반'

 

1581년 어느 날, 러시아 황제 이반 4세가 황태자이자 아들 이반의 머리를 왕홀(王笏)로 후려쳤다. 임신한 며느리의 옷매무새가 단정치 못했다는 이유였다. 피를 쏟으며 쓰러진 자식을 보고서야 제정신이 든 이반 4세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었지만 이미 늦었다. 지은 죄 없이 무참히 죽임을 당한 아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순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팔을 붙들고 용서를 전한다. 늙고 어리석은 아비의 광기가 부른 어처구니없는 참사를 피비린내가 진동할 듯 처참하게 그려낸 이는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1844~1930). 레핀은 19세기 러시아 최고의 화가라고 불리지만 출생지는 지금의 우크라이나다.

 

이 사건은 레핀이 그림을 그리기 30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아들 이반이 이반 4세의 거처에서 사망한 건 사실이나, 사인이 명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고, 아비 손에 맞아 죽었다는 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몇몇 소문 중 하나였지만, 레핀의 작품 이후로는 누구도 의심치 않는 역사적 사실이 됐다. 그렇다면 레핀은 왜 수백 년 전의 참사를 그때 들춰냈던 것일까.

 

188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거리 한가운데서 폭탄 테러로 암살당했고, 그 후 테러범들 또한 도심에서 공개 처형됐다. 이 모두를 목도한 레핀의 머리에는 피 웅덩이에서 벌어지는 사투에 열광하던 에스파냐의 투우 관중이 떠올랐다. 왜 사람들은 끔찍하고도 혐오스러운 혈투에 매료되는지, 그리고 왜 이토록 잔인한 폭력이 경기장이 아닌 현실에서도 끝없이 일어나는지, 레핀은 질문을 던지며 흐릿했던 과거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되살렸던 것이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조선일보(2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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