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쿠데타에, 내전에, 초강력 지진까지 덮친 미얀마] ....

뚝섬 2025. 3. 31. 06:04

[쿠데타에, 내전에, 초강력 지진까지 덮친 미얀마]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미얀마 '인종 청소' 논란] 

[2000여기 탑의 도시]

 

 

 

쿠데타에, 내전에, 초강력 지진까지 덮친 미얀마

 

미얀마 제2의 도시 만달레이는 28일 발생한 규모 7.7 강진의 최대 피해 지역이다. 인구가 120만 명인 이 대도시의 더없이 취약한 구조 인프라가 이번 지진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무너진 건물 틈새로 “살려달라”는 비명이 곳곳에서 난무하지만 잔해를 치울 장비가 없어 맨손으로 구조한다고 한다. 도시에 몇 안 되는 병원들은 이미 부상자로 가득 차 흙바닥에서 담요를 깔고 치료받는 환자들이 많다. 병원이 무너지는 바람에 들것에 실려 나온 한 임신부는 거리에 누운 채 출산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폭염까지 겹쳐 생존자들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시신을 불태우고 있다는 얘기마저 들린다.

▷미얀마의 이 같은 아비규환은 비단 지진 때문만은 아니다. 4년 전 군부 쿠데타와 그에 따른 오랜 내전으로 이미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군부와 저항세력 간 무력 충돌로 의료·구호 시설은 파괴됐고, 교통·통신 등 기반시설도 마비됐다.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은 군사 정권에서 일할 수 없다며 의료 현장을 떠났다. 게다가 저항군이 장악하고 있는 만달레이 주변 지역은 군부 정권이 각종 물자 지원도 끊은 상황이었다. 군부는 반군을 소탕한다며 이 지역을 계속 공습해 왔고 심지어 지진이 나던 날에도 폭격을 퍼부었다.

▷미얀마 군부 수장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은 2021년 총선 패배에 불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 국가고문을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후 4년간 군부에 맞서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4400여 명에 달한다. 미얀마를 외부와 단절시키기 위해 방송과 인터넷을 차단해온 군부는 대지진이 나자 “모든 국가의 도움을 받겠다”며 국제사회에 처음 손을 벌렸다. 그만큼 상황이 처참하단 얘기다. 원자폭탄 334개에 맞먹는 강진으로 현재까지 공식 사망자만 1600여 명에 이른다. 사망자가 1만 명이 넘을 수 있다는 분석(미국 지질조사국)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미얀마를 돕겠다”고 하지만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미국의 해외 구호를 총괄하는 국제개발처(USAID) 폐지를 추진하면서 원조 사업을 대폭 축소한 장본인이 트럼프다. 그에 따른 인도주의적 지원 공백이 현실화되는 첫 사례가 미얀마 지진일 거란 우려가 높다. 국제사회 지원이 이뤄지더라도 군부가 통치 지역 외에는 원조품을 공급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미얀마의 거의 절반은 민주 진영 임시정부의 관할하에 있다.

▷최악의 시기에 강타한 초강력 지진으로 구조대와 의료진이 절실한 만달레이에는 총을 든 군인들만 넘쳐난다고 한다. 총으로는 단 한 명도 살릴 수 없다. 힘겹게 구조 활동을 벌이는 시민들은 외신에 “여긴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하는 죽음의 도시”라고 말한다. 재난은 정치가 불안한 나라를 더 가혹하게 뒤흔든다.

 

-신광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5-03-31)-

______________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노벨상 받은 '민주화의 상징'… 소수민족 탄압에는 침묵

 

얼마 전 국제사회에 미얀마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취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어요. 최근 유엔이 "미얀마군이 인종 청소를 위해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을 대량 학살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에요. 난처해진 노벨위원회 측은 "노벨위원회 임무는 상을 받은 후 수상자의 일을 감독하는 것이 아니다. 수상자는 스스로 명성을 지켜야 한다"며 노벨상을 박탈하지 않겠다고 밝혔어요. 애초에 아웅산 수지는 왜 유명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됐을까요? 그 과정을 알려면 미얀마의 독립부터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알아야 해요.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독재자

미얀마는 한때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어요. 하지만 인도와 국경 침범 문제로 영국과 전쟁을 벌인 이후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지요. 이때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던 사람이 아웅산 장군이에요. 그는 버마독립군을 만들어 일본과 손잡고 영국군과 싸워 영국군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어요. 일본이 철수하고 영국군이 다시 들어오자 독립 협상을 위해 직접 영국 정부와 담판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가 민주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암살을 당해요. 독립 영웅의 죽음 앞에 온 미얀마가 슬픔과 혼란에 빠졌어요. 다수인 버마족과 소수민족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고 정부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시간이 계속됐지요. 아웅산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던 네 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에야 혼란이 가라앉았습니다.

네 윈은 나라 이름을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고치고 새 정부를 수립해요. 극도로 폐쇄적인 외교를 펼쳐 냉전 시기에도 국제 분쟁을 겪지 않게 되지요. 하지만 국내 혼란은 더 심해졌습니다. 소수민족들을 억압하고, 불교를 강요하며 다른 종교를 탄압했어요.

네 윈은 미신에 관심이 많아 기이한 화폐 정책을 펼친 것으로도 악명 높아요. 미얀마 화폐 단위는 '차트'인데 그의 75번째 생일을 기념해 '75차트'라는 화폐를 발행하는가 하면, '9'가 행운의 숫자라는 소리를 듣고는 '90차트' 화폐를 만들기도 했어요. 이런 화폐 정책은 미얀마 경제를 혼란의 도가니로 몰고 갔어요.

◇8888항쟁이 바꾼 아웅산 수지의 삶

이 시기 미얀마 수도 양곤의 한 찻집에선 큰 패싸움이 벌어집니다. 주도자 중 한 명은 처벌 없이 풀려났어요. 아버지가 정부 고위 관리였기 때문이었죠. 미얀마 학생들은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40명 넘는 학생을 붙잡았어요. 그 과정에서 한 학생이 질식사하자 전국적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네 윈은 "국민이 시위에 나선다면 군인들의 총구는 국민을 향할 것이다"라며 위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88년 8월 8일 학생과 스님들이 앞장서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어요. 이른바 '8888항쟁'입니다. 시민들은 물론, 공무원과 군인들까지도 참가했어요. 정부는 네 윈 말대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사상자 3000명이 발생합니다. 시위대 또한 돌과 자전거 바큇살까지 동원해 군대에 맞섰다고 해요. 이 격렬한 시위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아웅산 수지'도 참여했습니다.

 

미얀마 아웅산 수지 국가자문역이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방관했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에 맞닥뜨리면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명예가 떨어지고 있어요. /AP 연합뉴스 

 

아웅산 수지는 아웅산 장군의 딸입니다. 15세가 되던 해에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고 정치학을 공부했지요. 거기서 만난 영국인과 결혼까지 해 일본 교토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평범한 삶을 살았어요.

아웅산 수지의 인생은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미얀마로 돌아왔을 때 겪었던 8888항쟁으로 인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아웅산 수지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아닌 미얀마 연방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나갔어요. 미얀마 국민은 8888항쟁 이후 있었던 총선에서 독립 영웅의 딸이자, 행복한 가정을 뒤로한 채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아웅산 수지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요. NLD는 80% 넘는 의석을 가져갔지요.

그러나 군부 세력은 총선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아웅산 수지를 가택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때부터 아웅산 수지는 2010년까지 22년간 세 차례(전체 15년) 집에 갇혀 살았어요. 그러다 1991년 민주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당시에도 집에 갇혀 있었기에 남편과 아들이 대신 상을 받았지요. 남편이 죽었을 때에도 장례식에 가지 못했어요. 사실 군부 세력은 아웅산 수지에게 장례식에 가라고 설득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한 번 출국하면 다시는 미얀마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아웅산 수지가 눈물을 머금고 거부한 것이지요.

스님들의 샤프론 혁명과 미얀마 정권교체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만족시켜주지 못한 미얀마 정부는 오랫동안 반정부 시위에 시달려야 했어요. 또 서방 국가들의 제재로 경제난을 겪었죠.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인상돼 국민 생활은 어려워졌지요. 2007년 이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한 미얀마의 스님들이 국민 수만 명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합니다. 이 시위를 미얀마 스님들이 입는 옷 색깔을 따서 '샤프론 혁명'이라고 불러요. 군부 정권은 또다시 폭력을 사용합니다. 역시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어요. 미얀마를 여행 중이던 외국인이 다치기도 했죠. 군부는 시위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인터넷을 중단하기도 합니다.

결국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미얀마 정부에 특사를 파견해요. 폭력적인 진압은 금지됐고 아웅산 수지의 가택 연금도 풀렸습니다. 하지만 군부 정권은 그녀가 권력을 잡을 수 없도록 헌법을 고칩니다. 직계가족이나 배우자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대통령이 될 수 없도록 한 것이에요. 그럼에도 2015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NLD는 대부분의 의석을 가져가고 대통령을 배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아웅산 수지가 오랜 기간의 가택 연금에도 조국의 민주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같은 미얀마 국민인 로힝야족에 대한 학살을 지켜보고만 있던 것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에도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의 아웅산 수지를 기억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1983년 북한 인민무력부가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을 노리고 아웅산 묘소에 폭탄을 설치, 폭파한 사건이에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늦게 도착해 화를 피했지만 장관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어요. 자국의 독립 영웅 아웅산의 묘소를 폭파했다는 사실에 격분한 미얀마는 북한과 국교를 끊었습니다. 

 

-안영우·명덕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유소연 기자, 조선일보(18-09-07)- 

________________ 

 

 

미얀마 '인종 청소' 논란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 英 식민 지배가 낳은 비극
영국, 1885년 미얀마 분할통치 시작


다수 차지하던 버마족은 탄압하고 로힝야족 데려와 지배층으로 등용
종교·경제 갈등 생기며 적대감 커져
독립 후엔 미얀마의 '보복' 탄압 시작… 아웅산 수지 집권 후 더 악화
 

 

미얀마 라카인주(州)에서 벌어진 미얀마 정부군과 소수민족 로힝야족 간 유혈 충돌을 둘러싸고 국제사회의 우려가 점점 깊어지고 있어요. 이번 유혈 충돌은 지난해 10월 미얀마 정부에 반대하는 로힝야족 반군(叛軍)이 미얀마 국경지대 초소를 습격하고, 지난달 25일 또다시 반군이 라카인주 경찰서 30곳을 공격하면서 불거진 건데요. 정부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현재까지 로힝야족 400명 이상이 사망하고 30만명이 이웃 나라 방글라데시로 탈출했다고 해요. 반군이 다음 달 10일까지 일시 휴전(休戰)을 선언했지만 정부군은 이를 거부한 상태예요. 유엔(UN)은 "미얀마의 로힝야족 탄압은 인종 청소의 교과서적 사례"라며 13일 긴급 안전보장이사회를 열 예정이죠. 미얀마 정부와 로힝야족은 왜 이런 유혈 충돌을 빚고 있는 걸까요?

영국이 뿌린 분쟁의 씨앗

미얀마는 대표적인 소승불교 국가로 미얀마 국민의 90%가 불교를 믿어요. 버마족이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샨족, 카렌족, 라카인족 등 130개 넘는 소수민족들로 구성돼 있어요. 분쟁이 일어난 라카인 지역은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라카인족의 이름을 딴 것으로, 예전에는 아라칸이란 이름으로 불렸어요.

라카인 지역은 17세기까지 인도와 포르투갈에 잇따라 점령을 당하다 18세기 후반 버마족이 세운 꼰바웅 왕조에 의해 미얀마 땅으로 편입됐어요. 이후 세 차례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의 결과, 1886년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합병됩니다. 라카인 지역은 1차 영국-미얀마 전쟁(1826년)에서 패배한 미얀마가 영국에 할양한 땅으로, 다른 지역보다 먼저 영국의 식민 통치 아래 들어가게 돼요.

 

미얀마 라카인주의 로힝야족 난민들이 정부군의 공격을 피해 방글라데시 국경지대로 피란 가고 있어요. 미얀마 정부군과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 무장 세력 간의 유혈 충돌로 수백명이 사망하자 국제사회의 우려도 커지고 있어요. /연합뉴스 

 

영국은 미얀마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분할통치 정책(divide and rule)'이란 걸 펼쳤어요. 분할통치 정책이란 피지배층의 민족 감정이나 종교·사회·경제적 이해관계 등을 이용해 피지배 계층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유발시켜 통일된 반대 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막는 정책이에요. 영국은 미얀마가 수많은 소수민족들로 이뤄진 나라라는 점을 이용,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을 탄압하고 소수민족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수립했죠. 소수민족에게 식민지 정부의 중간 지배층 역할을 맡겨 내부 갈등을 유도하고 통합된 반(反)영국 세력이 생겨나지 못하게 만든 거예요.

1885년 영국은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을 의도적으로 이주시킵니다. 로힝야족은 원래 방글라데시 등 벵골만 인근에 살던 소수민족이었죠. 영국은 미얀마인들의 토지를 수탈한 뒤 로힝야족 사람들을 적극 농사에 활용하고 이들을 중간 지배 계층으로 등용하는 등 많은 혜택을 줬어요. 미얀마인으로선 로힝야족이 자기 일자리를 빼앗은 '이교도'로 보일 수밖에 없었죠. 여기에 1942년 영국이 무장한 로힝야족을 시켜 2만5000여 명의 미얀마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미얀마인과 로힝야족 간 뿌리 깊은 적대감이 싹트기 시작한 거죠.

핍박이 핍박을 낳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얀마 정부는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족을 탄압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1962년 세워진 군부 정권은 로힝야족에 대한 핍박을 제도화했죠. 학교에선 로힝야어로 수업을 할 수 없었고, 로힝야족은 결혼이나 이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어요. 또 불교 개종(改宗) 등을 조건으로 한 시민권법을 만들어 로힝야족의 시민권을 박탈했죠. 로힝야족을 '무국적 불법 이민자'로 규정한 거예요.

로힝야족의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한 탄압도 이어졌어요. 로힝야족 여성은 자녀를 2명 이상 출산하지 못하고 이를 어기면 징역형에 처하는 내용의 산아제한 정책이 대표적이에요. 이 때문에 셋째를 가진 로힝야족 여성들은 비위생적인 불법 낙태 시술을 받아야만 했어요. 최근엔 여성이 한 번 출산하면 3년간 아이를 갖지 못하고 불교도와 무슬림 간 결혼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기도 했답니다.

핍박이 이어지자 로힝야족은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이라는 무장단체를 만들어 정부에 저항하고 있어요. 피란 행렬도 이어져 1970년대에는 약 20만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로 탈출했고 1990년대 초반에는 25만명이 미얀마를 떠났죠. 2012년엔 로힝야족과 미얀마인 간 심각한 유혈 충돌이 발생해 로힝야족 200여 명이 사망하고 14만명이 미얀마를 떠나는 비상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어요.

이제 미얀마-로힝야족 갈등은 국제사회의 심각한 문제가 됐어요. 하지만 아직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을 당장 중단할 생각이 없어 보여요. 미얀마 정부의 실권자인 아웅산 수지(72) 국가고문 겸 외무장관이 최근 "우리 정부는 라카인 지역 주민을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죠. 미얀마 독립운동가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 수지는 미얀마 민주화에 앞장서며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인물이에요. 이 때문에 일부에선 "아웅산 수지가 어렵게 잡은 정권을 놓칠까봐 로힝야족 사태를 방관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해요.

미얀마-로힝야족 유혈사태 이면엔 이처럼 19세기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지 정책, 20세기 미얀마 군부독재 정권으로 이어지는 아픔이 있어요. 영국의 식민 지배 아래 핍박받던 미얀마인, 그런 미얀마인에게 탄압받는 로힝야족 모두 역사의 피해자들일지 몰라요.

 

-공명진 숭문중 역사 교사/기획·구성=박세미, 조선일보(17-09-14)-

______________

 

 

2000여기 탑의 도시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 2009년 아랍 에미리트 두바이에 세워진 지구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두바이의 바벨탑이라 불리는 이 빌딩의 높이는 829.84m. 땅에서 멀어지고 하늘에 가까워지고 싶은 인류의 욕망은 무한해서 아마 1km가 넘는 빌딩도 죽기 전에 볼 수 있으리라.

 

왜 인간은 이렇게 끝없이 탑을 쌓는 걸까? 그 의문을 풀고 싶다면 인도차이나 미얀마의 '버강(Bagan)'에 가 보자. 세계 3대 불교 유적군 중의 하나인 버강은 미얀마를 가로지르는 이와라디 강 중부에 위치한 고대 도시. 11~13세기 미얀마를 통일한 아뇨라타 왕국의 수도였던 버강에는 무려 400만개가 넘는 거대한 탑과 사원이 세워졌다.

이후 몽골의 침입과 수차례 계속된 지진으로 지금은 2000여기의 탑만 남아있지만 이곳의 일출명소인 쉐산도 사원(Shwesandaw Paya)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면 동서남북 어디를 봐도 오직 탑과 사원뿐이다. 불교에서 탑이란 석가모니의 사리를 묻고 그 위에 돌과 흙을 쌓은 일종의 무덤이다. 실제로 버강의 가장 화려한 사원인 쉐지곤 사원(Shwezigon Paya)에는 부처의 치아와 쇄골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사리를 봉안해 그 덕을 존경하며 닮고자 하는 마음으로 쌓은 탑이 무려 400만. 그중에는 자기 부를 과시하고자, 현세에 죄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불순한 마음으로 쌓은 탑도 상당수였겠지만 그 불심에 놀랄 따름이다.

 

그런 조상을 둔 영향일까?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지만 세계 기부 인구 1위를 차지하는 나라가 미얀마란다. 실제로 미얀마 여행을 가면 다른 어떤 나라에서보다 사람의 정과 미소를 많이 느끼는 게 사실이다. 탑은 많지만 벽은 없는 도시인 버강은 가을, 겨울이 여행 적기다. 그곳에 가면 왜 미얀마가 '아시아의 마지막 남은 보석'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알 수 있다. 

 

-김경우·여행사진가, 조선일보(18-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