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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종전 기폭제 '네이팜 걸' 사진, 진짜 누가 찍었나] ....

뚝섬 2025. 1. 30. 09:36

[베트남 종전 기폭제 '네이팜 걸' 사진, 진짜 누가 찍었나]

[80년 광주, 중동 분쟁지역 현장 지킨 AP기자 잠들다] 

[베트남 전쟁과 화학 무기]

 

 

 

베트남 종전 기폭제 '네이팜 걸' 사진, 진짜 누가 찍었나

 

1972년 6월 베트남 공군 전투기가 '베트콩' 오인 폭격한 사진
사진 찍은 사이공 지국의 AP 기자는 이후 퓰리처 상과 명예 얻어
1월 25일 美선댄스 영화제서 '다른 프리랜서가 찍었다" 다큐 첫 공개
英 인디펜던트,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진" 선정

 

1972년 6월 8일 베트남 남부의 짱방 마을에, 베트남 공군기들이 네이팜(Napalm)탄을 투하했다. 베트콩들이 이 곳에 숨어 있다고 잘못 알고 폭격했다. 마을에서 불에 탄 옷을 벗고 화상을 입은 나체의 여자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울면서 뛰쳐나왔다. 뒤에는 베트남 군인들이 따랐다. 

1972년 6월 베트남 공군기가 베트콩 은신처로 잘못 알고 네이팜탄을 투하한 짱방 마을에서 온몸을 드러낸 9세 여아와 아이들이 울면서 뛰쳐 나오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AP 사이공 지국의 닉 웃은 다음 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AP

 

다음날 이 사진은 전세계 신문과 방송을 도배했고, 말 그대로 수억 명이 봤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조작된 사진 아니냐”고 흥분했지만, 결국 이 사진은 반전(反戰)의 아이콘이 됐고 다음 해 1월 미국이 파리에서 공산주의 정권인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는 기폭제가 됐다.

 

이 사진은 AP 통신사의 당시 사이공(현 호찌민 시) 지국에 속한 스물한 살의 베트남인 기자 닉 웃이 찍은 것이었다. ‘전쟁의 공포(The Terror of War)’ ‘네이팜 걸(Napalm Girl)’로 불리는 이 사진으로, 닉 웃은 퓰리처상을 받았고 보도 사진계의 전설이 됐다. 사진 속 나체의 아홉 살 ‘네이팜 걸’인 판 티 킴 푹은 이후 캐나다에서 소설가가 됐고, 유네스코의 굿윌(Goodwill) 대사로 활동했다. 

 

트럼프 행정부 1기 때 트럼프 대통령에게 '네이팜 걸' 사진을 헌정하는 닉 웃./인스타그램

 

두 사람은 이후 함께 전세계를 돌며 평화의 메신저로 활약했고, AP 사진기자 웃은 이 사진을 프란체스코 교황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도 헌정했다.

 

그런데, 1월 23일부터 2월 2일까지 열리는 미국 유타 주의 선댄스 영화제에선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이 처음 개봉됐다.

 

AP 기자 닉 웃이 아니라, 미국 NBC 방송과 AP 통신에 필름을 제공하고 건당 수수료를 받던 베트남인 프리랜서 사진기자 응우옌 타인 응에(86)가 찍었다는 것이다. 영화 제목도 이런 프리랜서 기자를 뜻하는 ‘스트링어(Stringer)’다.

 

응우옌은 영화에서 “그날 닉 웃을 현장에 차로 데려갔고 나도 사진을 찍었다. AP 통신의 사이공 지국에 내가 찍은 필름 두 통을 가져갔고 우리가 ‘빅 가이(big guy)’라고 부르던 AP 지국의 미국인 사진부장이 이 벌거벗은 여아(女兒) 사진 한 장을 선택하고 20달러와 빈 필름 두 통을 줬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진’이라고 꼽은 ‘네이팜 걸’을 실제로 찍은 사람은 닉 웃이 아니라, 응우옌이라는 얘기다.

 

이 모든 논란의 시작은 당시 AP 사이공 지국의 사진 에디터였던 칼 로빈슨(81)이었다. 그는 2022년 12월 미국의 한 비영리 보도사진 교육기관에 “이 사진을 찍은 기자 이름이 바뀌었다”는 이메일을 보냈다. 이 비영리기관의 대표는 이후 2년 간 사실 관계를 조사했고, 이를 다큐멘터리 영화 ‘스트링어’에 담았다.

 

로빈슨의 주장은 이렇다. “그날 여러 사진을 인화해 지국 사진부장인 호스트 파스(Faas)에게 보여줬는데, 여자아이가 벌거벗은 채 정면에서 달려 나오는 모습은 자극적이어서 제외했다. 그리고 AP 기자 닉 웃이 찍은, 이 여자아이가 달려가는 옆모습을 찍은 사진을 추천했다. 그런데 파스는 ‘바로 이 사진’이라며 스트링어가 찍어온 사진을 짚었다.”

 

그래서 자신이 잘 모르는 그 스트링어의 이름을 확인해 사진 설명을 쓰려고 공책을 들추는데, 사진부장 파스가 “닉 웃으로 해(Make it Nik Ut). 우리 기자 이름으로”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로빈슨은 영화에서 “지난 50년 간 이 짐을 지고 살았고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닉이 그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직접 증언해줄 사진부장 파스, 사진을 인화하는 암실(暗室) 책임자는 모두 숨졌다. 

 

미국 유타주에서 열린 선댄스 영화제에 참석한 응우옌(왼쪽)과 과거 AP 사이공 지국의 사진에디터 칼 로빈슨

 

로빈슨은 왜 이제서야 이를 공개한 것일까. 또 퓰리처 상을 두 번이나 받은 저명한 사진기자인 AP 사진부장 파스는 왜 굳이 그런 ‘이름 바꾸기’를 했을까.

 

로빈슨은 “파스 생전(2012년 사망)에 그를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파스는 사이공 지국의 사진기자였던 닉 웃의 형이 자신의 지시로 현장 취재를 갔다가 베트콩의 총에 맞아 숨졌기 때문에, 닉 웃의 가족에게 늘 마음의 짐을 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형의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 뒤 사이공 지국을 찾아온 열네 살의 웃을 정식 고용해 사진을 배우게 한 것도 파스였다. 그러나 로빈슨은 2020년에 자신의 회고록을 내면서도 정작 이 ‘이름 바꾸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AP 통신은 1월15일 23쪽에 달하는 자체 보고서를 통해 영화 ‘스트링어’의 주장을 반박했다. AP 통신은 당시 사이공 지국에 근무했거나 취재 현장에 있었던 7명을 인터뷰했고, 이들은 모두 “닉 웃이 찍었다”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라이프 잡지 기자 데이비드 버닛은 “내가 쓰는 라이카 카메라는 필름 로딩(loading)이 까다로워 한참 버벅대고 있었는데, 닉이 우리들보다 먼저 뛰어 나갔고 킴 푹과 다른 애들이 연기 속에서 나오는 것을 찍었다”고 했다.

 

버닛은 ‘네이팜 걸’ 사진이 나온 지 40년이 되던 2012년 6월 워싱턴포스트 기고에서도 “나는 당시 AP 지국의 암실을 사용했는데, 닉이 암실에서 가로 5인치ㆍ세로 7인치 크기로 인화한 젖은 킴 푹 사진을 들고 나왔다. 내가 그 사진의 최초 목격자”라고 썼다.

 

이번에 논란이 일자, 잡지 배너티 페어(Vanity Fair) 인터뷰에서 “사진부장 호스트 파스가 ‘닉 웃, 오늘 잘했어’라고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이름을 바꿨다면, 그가 그런 말을 했을까”라고 했다.

 

AP 보고서는 “새롭고 설득력 있는 반대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AP는 닉 웃이 아닌 다른 사람이 이 사진을 찍었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라이프 기자 버닛과 사진의 주인공 킴 푹, 사진을 찍은 닉 웃은 모두 영화 ‘스트링어’ 제작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닉 웃은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과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 닉 웃의 변호사들은 “로빈슨이 1978년 해고된 이래 AP 통신에 줄곧 앙심을 품고 있었고, 그의 과거 동료들은 로빈슨이 불만이 많았고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이었다고 말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프랑스 파리의 한 사진 법의학 분석팀이 그날 현장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 이미지 50여 건을 분석해서 닉 웃이 그 정면 사진을 찍을 위치에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놓기도 한다.

 

자신이 직접 사진을 찍었다는 응우옌은 왜 그동안 입을 다물었을까. 영화에서 그는 자신이 스트링어로 일했던 NBC 방송의 사이공 지국장과 AP 지국의 사진부장 파스는 매우 친했고, 공연히 문제를 일으켜 생계를 위협당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1975년 베트남을 탈출해 미국에 정착했다. “그 후엔 먹고 사는 게 급선무였다”고 했다.

 

응우옌도 이후 군사ㆍ전쟁 사진기자로 경력을 쌓았고, 자신의 사진들을 스크랩했다. 하지만, AP통신 사진부장으로부터 받았다는 ‘네이팜 걸’ 인화 사진은 아내가 아이들이 보기엔 너무 끔찍하다며 나중에 찢어버렸다고 말했다. 응우옌의 딸은 영화에서 “아빠가 처음에 냉장고 위에 올려놓은 사진을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 봤고, 다음날 그 사진이 신문에 나왔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응우옌은 “나는 그 사진을 찍으려 열심히 일했는데, 다른 사람이 모든 걸 가져갔다. 그[닉 웃]는 인정받고 많은 상을 받았고 베트남에서 유명해졌다. 증거가 없으니, 나는 제로(0)이고 그는 영웅이 됐다”고 한탄한다. 영화 제작진은 지금과 다른 시절, 미국과 다른 세계에선 사진의 저작권을 주장하는 것보다는 생계가 우선이었다며, 응우옌의 ‘침묵’을 옹호했다.

 

캘리포니아 주의 딸 집에 사는 그는 최근에 뇌졸중을 겪었고, 겨우 회복해 이번 선댄스 영화제에 참석했다. 그는 기자 인터뷰에서 통역을 통해 “내가 그 사진을 찍었다”며 웃었다.

 

‘네이팜 걸’ 킴 풋은 당시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외삼촌으로부터 “닉 웃이 사진을 찍었고, 화상을 입은 너를 병원으로 옮겼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는 영화 ‘스트링어’를 “나의 영웅에 대한 거짓된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2023년 4월 12일 작가 킴 푹(왼쪽)이 자신의 스페인어판 책 출간을 기념하며, '네이팜 걸' 사진을 찍은 퓰리처상 수상자 닉 웃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AFP 연합뉴스

 

AP 통신도 영화 ‘스트링어’의 제작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화 제작진은 그간의 조사 내용을 공개하는 대신에, 영화제 개봉 때까지 비공개를 요청했다. AP는 거부했다. 영화 제작진이 그동안 조사했다는 내용과 더불어 자체 조사에서 ‘다른 진실’이 드러나면, 영화 공개 전에라도 밝히겠다는 입장이었다.

 

‘스트링어’ 영화 제작자는 워싱턴 포스트에 “AP나 다른 기관들이 뭐라 말하든, 우리는 그[응우옌]의 스토리를 전세계와 나눌 수 있게 돼 기쁘다. 그 역시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철민 기자, 조선닷컴(25-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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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 중동 분쟁지역 현장 지킨 AP기자 잠들다

 

1980년 5월 광주의 한 모텔에 몇몇 외국인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모텔 창문 밖으로 멀리 저항에 나선 광주시민들이 보였고, 신군부 진압부대도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모텔에서 6m쯤 떨어진 옆 건물 옥상에 총을 든 군인이 나타나더니 기자들에게 손짓하며 떠날 것을 요구했다. 잠시 후 모텔방 유리창이 깨지며 총알이 날아들었다. 한 기자가 카메라를 꺼내 들고 창밖 촬영을 시도했다. 총알이 더 날아들자 기자들은 바닥을 기어서 빠져나왔다. UPI통신 기자가 1989년 미국 LA타임스에 쓴 5·18민주화운동 취재기에 담긴 내용이다.

▷어떻게든 촬영하려고 카메라를 꺼내 든 이는 AP통신 도쿄지국 테리 앤더슨 기자(당시 33세)였다. ‘뉴스 현장’을 찾아 한국으로 건너온 그로선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내밀었을 것이다. 80년 광주에선 희생자 수를 두고 논란이 컸다. 신군부는 초기에 3명이라고 발표했고, 시민들은 261명이라고 주장했다. 앤더슨 기자는 거리 취재 때 시신을 직접 셌다. “그렇게 많은 시신은 처음 봤다”며 하루에 179구까지 확인했다고 기억했다. 왜 굳이 세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기자는 원래 그렇게 일한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앤더슨 기자가 지난 주말 미 뉴욕주 자택에서 76세를 일기로 숨졌다. 그가 세상에 더 알려진 것은 광주 취재 5년 뒤 AP통신 중동지국장으로 일하던 때 내전 중이던 레바논에서 헤즈볼라에게 납치된 일 때문이다. 그곳 수도 베이루트에서 동료와 테니스를 친 어느 날 괴한 3명에게 끌려갔다. 이들은 영어로 “걱정 마라. 이건 정치적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로부터 2454일, 6년 8개월 동안 그는 인질이 됐다.

 

▷훗날 쓴 ‘사자굴’이란 회고록에 자세한 기록이 담겨 있다. 대부분을 눈이 가려진 채 지냈고, 수갑과 족쇄가 채워졌다. 몇 시간씩 기도하며 버텼다고 썼다. 당시 약혼녀는 임신 6개월이었고, 그때 태어난 딸은 여섯 살이 되어서야 사진으로만 보던 아빠를 만났다. 그는 귀국 후 헤즈볼라의 배후인 이란 정부를 상대로 1억 달러(약 1400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고, 액수가 밝혀지지 않은 큰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 돈으로 해병대원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을 위해 학교 50개를 지었다.

▷언론을 떠난 그의 삶은 대학 강의와 자선사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레바논 근무 시절 “분쟁지역 취재는 내 삶에 가장 매혹적인 일”이라고 했던 대로 ‘현장을 지킨 기자’로 기억될 것이다. 민주화 시위를 기록하기 위해 광주를 찾았고, 남들은 피하는 중동의 분쟁지역을 지켰다. 그의 모습이 담긴 영상에는 왼쪽 가슴팍 주머니에 꽂힌 검은 볼펜과 빨간펜이 눈에 띈다. 세련된 정장 차림은 아니었지만 현장 기자라면 누구나 그랬을 모습 그대로였다.

-김승련 논설위원
, 동아일보(24-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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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과 화학 무기

 

베트콩 근거지인 밀림 없애려고 고엽제 쏟아부어

 

‘네이팜탄 소녀’로 불리는 판티 킴 푹(가운데)이 9살이었던 1972년 6월 8일 울면서 도로 위로 도망치는 모습. 킴 푹은 미국 마이애미주의 한 피부과에서 지난 6월 30일(현지 시각) 마지막 화상 후유증 치료를 마쳤다고 해요. /위키피디아

 

'네이팜탄 소녀'로 불리는 베트남계 캐나다인 판티 킴 푹(Phan Thi Kim Phuc)이 미국 마이애미주의 한 피부과에서 지난 6월 30일(현지 시각) 마지막 화상 후유증 치료를 마쳤대요. 킴 푹은 1972년 6월 8일 베트남 전쟁 중 전신의 65%에 달하는 부위에 큰 화상을 입고, 흉터 등 각종 후유증 치료를 받아왔다고 해요.

킴 푹이 화상을 입었던 당시는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참전한 상태였어요. 아홉 살이던 킴 푹이 살던 마을에 화학 무기인 '네이팜탄'(Napalm bomb)이 투하됐어요. 네이팜탄은 섭씨 3000도의 고열을 내며 반경 30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들고, 파편이 젤리처럼 사람 몸에 눌어붙어 치명상을 입히는 무기입니다.

팔에 불이 붙은 킴 푹은 너무 뜨거웠던 나머지 벌거벗은 채로 울면서 도로 위로 도망쳤어요. 그리고 AP통신의 사진기자 닉 우트가 이 모습을 촬영하며 베트남 전쟁의 실상이 전 세계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는 2차 세계대전 때 유럽과 태평양 지역에 사용됐던 양의 3배 가까이 되는 양의 무기가 사용됐는데, 이 중 상당수가 화학 살상 무기라고 해요. 왜 이 전쟁에서는 그토록 많은 무기가 사용됐던 걸까요?

제네바 회담으로 분단된 베트남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19세기 말부터 프랑스의 오랜 지배를 받았고, 1940년부터 1945년까지는 이 지역을 일본이 점령했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패망하자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식민 지배 하려고 합니다. 베트남은 프랑스에 대항해 1946년 독립 전쟁을 일으켰어요. 프랑스군이 1954년 5월 베트남 북서부에 있는 디엔비엔푸에서 호찌민(1890 ~1969)이 이끌던 북베트남 군대에 패배하며 끝을 맺지요.

그렇게 베트남의 독립은 눈앞에 온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변수가 있었습니다. 1954년 4월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치 회담이 열리고 있었는데요. 약 3개월간 열린 이 회담에서는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중심으로 양분하기로 합니다. 기존 프랑스 세력이 강했던 베트남의 남쪽을 자유시장 체제로, 호찌민 세력이 강했던 북쪽을 공산주의 체제로 하고, 분단 후 2년 내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치르도록 하겠다는 거였죠.

그런데 2년 후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정부가 이 결정을 거부하고 남쪽에서만 선거를 치르며 1956년부터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간의 내전인 베트남 전쟁이 시작됩니다. 특히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남부해방군(일명 베트콩)은 남베트남에서 배후 지역을 소규모 무장 부대가 기습 공격하는 '게릴라 전술'을 펼쳤어요.

미국 참전하며 국제전으로 확대

이 전쟁은 미국이 참전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는데요. 처음 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은 직접 개입하지 않고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했어요. 하지만 당시 미국에는 동아시아에서 자본주의 진영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고, 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 전쟁에 개입할 뚜렷한 명분이 없었어요. 그러다 1964년 일명 '통킹만 사건', 즉 미국의 정보 수집 함대가 베트남 근해의 통킹만 공해상에서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후에 미국 측의 자작극으로 밝혀졌어요. 우리나라도 이때 미국을 돕기 위해 베트남 전쟁에 파병했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전인 1961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에게 "베트남에 개입하지 마라. 거기는 늪이다. 가봤자 이길 수 없다"고 경고했다고 하는데요. 실제로 드골의 말처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베트남의 우거진 밀림 지역에서 엄청난 곤욕을 치릅니다. 군인들은 말라리아나 이질(세균성 감염병) 같은 질병과도 싸워야 했지요. 여기에 더해 남부해방군은 밀림에 숨어 기습적으로 미군을 공격했어요. 이에 미국은 밀림을 밀어버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네이팜탄 사용하고 불도저로 숲 밀어

우거진 밀림 지형 때문에 미국은 여러 가지 무기를 사용하게 되는데요. 우선 숲으로 들어간 미군들은 남부해방군의 위치를 찾아내 알렸고, 신호를 받은 공군은 해당 위치에 폭격을 했어요. 이때 사용된 무기 중 하나가 네이팜탄입니다. 하지만 네이팜탄은 적뿐 아니라 정글 속에 있는 미군한테까지 피해를 줬지요. 이외에도 미군은 2.5t짜리 강철 칼날이 부착된 산림 벌채용 불도저로 매일 800ha(헥타르·1ha는 약 3000평)씩 숲을 밀어냈어요.

게다가 여러 화학 무기를 사용해 밀림의 나무들을 말라 비틀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미 공군은 1961~1971년 사이에 '랜치핸드'(ranch hand)라는 작전명으로 베트남에 제초제를 살포했는데, 제초제가 살포된 후 밀림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군인들 사이에서는 '고엽제(枯葉劑)'라고도 불렸습니다. 이 무기는 적군의 은신처를 드러내고 공중 폭격 지점의 시야를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적군의 식량이 되는 농작물을 없애고자 하는 목적에서 사용됐어요. 미국은 무려 2000만갤런(약 7570만8200L)의 고엽제를 비행기나 헬기로 10년 이상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 부었습니다.

고엽제는 '느린 탄환'이라고도 불립니다. 즉각적이진 않지만 인체에 서서히 각종 피부 질환, 위장 장애, 암 등의 질병을 유발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인체에 미치는 고엽제의 유해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고엽제의 위험성을 알지 못했던 병사들은 공중에서 뿌려 대는 고엽제에 무방비로 노출됐어요. 오히려 당시 군인들은 이 고엽제가 비처럼 느껴져 시원하다며 계속 맞았다고 해요.

이때 베트남 인구 중 210만~480만명이 고엽제에 직접 노출된 것으로 추정되고, 베트남 전체 산림의 5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2만㎢ 면적의 녹지가 사라졌어요. 수천㎢의 논과 밭도 반영구적으로 훼손됐죠. 우리나라의 군인들 또한 약 4만명 이상이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졌고요. 1970년이 돼서야 미 국무부는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 사용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의 밀림을 없애기 위해 이미 많은 양의 무기와 화학 무기가 사용됐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인간에게도, 환경에도 너무나 큰 비극을 가져왔죠. 베트남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돈을 쏟아 붓던 미국은 결국 1969년,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하고 앞으로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인들이 해결하도록 한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1973년 파리에서 평화 협정이 체결되며 휴전을 해요. 하지만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갈등은 계속되면서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1975년 결국 남베트남이 항복하며 비로소 베트남 전쟁은 완전히 끝납니다.
 

킴 푹의 최근 모습/미군 헬리콥터가 남베트남 메콩강 인근 밀림에 고엽제를 살포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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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9·11 테러 설계자 21년 만에 제거. 국민의 무고한 희생 용납 않는 결기와 집념이 ‘강국의 조건’이란 걸 보여준 것.

 

-팔면봉, 조선일보(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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