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중립국의 역사]
[바티칸시국]
스위스
나치 침공도 막은 '무장 중립국'… 지금도 군사 동맹 안 맺죠
스위스 중부 그린델발트 지역의 협곡 전경. 스위스는 국토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이뤄져 있어요. 이 때문에 농업이 큰 규모로 발전하기 어렵죠. /위키피디아
최근 스위스 정부는 냉전 시대에 만든 방공호 시설을 대대적으로 개선하겠다고 발표했어요. 방공호 현대화 사업에 무려 3500억원을 투입한다고 해 화제가 됐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이어 다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까지 침공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스위스도 전쟁에 대비한다는 이유였어요.
그런데 정작 스위스는 나토 회원국이 아니랍니다. 게다가 스위스는 국제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영세 중립’ 정책을 펼치는 중립국이지요. 1∙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전쟁의 격랑을 피해 갔고요. 이런데도 스위스는 국민 대부분이 집에 총기를 갖고 있고, 정기적으로 군사 훈련도 할 정도로 항상 전쟁을 대비하는 나라예요. 중립을 지키면서도 누구보다 전쟁 대비를 철저히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강대국 사이의 중립국, 스위스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용병의 나라 스위스
스위스는 유럽 중앙에 있는 작은 나라예요. 면적은 약 4만1000㎢로 대한민국의 40% 정도 크기이고, 인구는 890만명이에요. 알프스산맥을 끼고 있어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입니다. 스위스는 유럽의 강대국들로 둘러싸여 있어요. 북쪽으론 독일, 서쪽으론 프랑스, 남쪽은 이탈리아, 그리고 동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죠.
국토 대부분이 산지인 탓에 식량 생산 능력이 부족한 스위스는 유럽에서 늘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어요. 재산을 모으기 어려워서 장남이 아니면 부모에게 무언가를 상속받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죠.
스위스인들이 가진 자원은 오로지 인적 자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위스인들이 생계를 위해 선택한 방법은 바로 돈을 받고 전투에서 싸우는 ‘용병’ 활동이었어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2세기쯤부터는 유럽 각지에서 스위스 용병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산지에 사는 스위스 사람들은 폐활량과 체력이 뛰어났고, 인근 국가들과 전투가 잦아 전쟁 기술도 발달했거든요. 특히 스위스 보병의 밀집 대형 전술은 상대 기병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고 합니다.
스위스 용병은 ‘마지막 한 명까지 싸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용맹했어요. 만약 용병이 전장에서 도망친다면 그를 다시 고용하는 사람이 없겠죠. 따라서 이들에겐 고용주와의 신의를 지키는 것이 공동체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어요. 신용을 잃는다면 스위스 경제가 무너지기 때문이에요.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당시엔 스위스 용병 786명이 도망가지 않고 루이 16세를 끝까지 지키다 전원 전사합니다. 이들에겐 죽음보다 신뢰를 잃는 것이 두려웠던 거죠.
용병 활동은 스위스가 중립국이란 정체성을 갖게 된 계기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특정 국가와 동맹을 맺고 전쟁에 끼어든다면 용병을 고용해 줄 ‘고객’들을 잃게 되니까요.
세계대전 중에도 중립 지켜
스위스가 공식적으로 중립국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1815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빈 회의를 통해서입니다.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쓴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유럽 강대국들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무너진 왕정들을 복위시키고 각국의 영토를 재조정하려고 했어요.
이때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를 비롯한 강대국들은 스위스를 서로 자신의 영토로 편입하고자 했지만, 이로 인해 분쟁이 생기는 것을 막고자 결국 스위스를 영구 중립국으로 남겨두기로 합의해요.
이후 스위스는 스스로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침략에 대비해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유럽 국가가 전쟁에 휘말린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시기에도 스위스는 ‘무장 중립’을 유지하죠. 당시 독일은 벨기에나 스위스를 거쳐서 프랑스를 침공하려고 했는데요. 스위스는 알프스산맥이라는 자연 방어선을 이용해 촘촘하게 요새를 세워 독일군이 벨기에 쪽으로 이동하게 만들었죠.
바티칸 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병들이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식’을 하고 있어요. 오늘날에도 교황 근위대는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돼요. /위키피디아
스위스는 모든 국민이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국민개병제’를 운용해 유사시 예비군 수십만 명을 동원하는데요. 1차 대전 당시 참호전으로 독일과 프랑스 전선이 고착화되자, 스위스는 25만명 규모의 군대를 국경 지대에 배치해 전선이 스위스로 확장되는 것을 저지했어요. 이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교전을 벌이자 스위스 정부는 양측과 협상을 벌여 두 국가의 군대가 스위스로 들어오지 않도록 요구해 중립을 유지했어요.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발발한 2차 세계대전 때도 비슷했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국민 총동원령을 내리고 군대 규모를 당시 인구의 20% 수준인 43만명까지 늘렸어요. 독일의 침략 조짐이 보이자 어린아이와 노인을 제외한 인원을 끌어모아 군대 규모를 85만명까지 불렸죠. 알프스 산악 지대에 전 국민과 병력을 수용하는 요새를 짓고, 자동차 운행과 식량 생산도 통제하며 ‘장기전’을 불사하는 모습을 보여준 끝에 독일의 침공을 피하고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답니다.
스위스의 중립은 ‘중립 선언’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어요. 스위스는 군사·외교적 노력을 통해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중립을 유지해 온 것이죠.
지금도 중립 전통 이어져
스위스의 ‘무장 중립’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스위스 국민도 중립을 중요한 국가 정체성으로 여기죠. 2016년 스위스에서 진행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스위스 국민 중 96%가 계속 중립국으로 남아있길 원했다고 해요.
실제로 스위스는 1945년 설립된 유엔에도 가입하지 않다가 2002년에서야 가입했고, 지금도 유럽연합(EU)이나 나토 같은 군사동맹엔 참여하지 않고 있어요.
중립국 지위를 지키는 덕분에 많은 국제 단체의 본부가 스위스에 있기도 합니다. 국제 인도주의 단체인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본부가 스위스 제네바에 있지요.
-정세정 장기중 역사 교사/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5-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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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국의 역사
스위스는 나폴레옹 몰락 후 강대국들의 완충지대
지난해 5월 17일 사울리 니니스퇴(왼쪽) 핀란드 대통령과 마그달레나 안데르손(오른쪽) 스웨덴 총리가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방침을 밝히고 있어요. /신화 연합뉴스
최근 스웨덴과 핀란드가 국방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우크라이나와 협력 중이었던 두 국가도 안보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죠. 스웨덴과 핀란드는 지난해 5월 오랫동안 유지했던 중립국 지위를 포기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신청했어요. 새로운 국가가 나토에 가입하려면 30개의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하는데요. 튀르키예만 두 국가의 가입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어요. 튀르키예가 '테러 단체'로 규정한 쿠르드족 분리주의 무장 단체들을 스웨덴과 핀란드가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죠. 튀르키예 때문에 나토 가입이 지연되자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까지 나서서 "스웨덴과 핀란드가 나토에 가입할 시기가 왔다"고 튀르키예를 설득하고 있답니다.
스웨덴과 핀란드가 중립국이었다는 사실을 잘 몰랐을 수도 있을 텐데요. '중립국'이라는 지위는 어떻게 인정되는 걸까요?
중립국 되는 방법, 국가마다 달라요
중립국은 특정 전쟁에서 교전국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모든 분쟁에서 영구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국가를 뜻합니다. 그래서 보통 나토나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와 같은 군사 동맹에 가입하지 않죠. 중립국의 권리와 의무는 국제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44국의 대표가 모인 제2차 헤이그 평화 회의(1907)에서 처음으로 체계화됐는데요. 협약에 따르면 교전국은 중립국의 영토를 침범할 수 없으며 만약 중립국이 침입을 받아 군사적으로 저항하더라도 중립성이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국가마다 중립국이 되는 과정이 다른데요. 보통 주변국과의 조약 또는 UN 선언 등에 따라 중립국이 될 수 있어요. 오스트리아는 1955년 소련과 '모스크바 각서'를 체결하면서 영세중립의 지위를 보장받았어요. 투르크메니스탄은 1995년 유엔 총회에서 영구 중립을 선언하고 승인받았지요.
국가마다 주장하는 중립의 기준도 다르답니다. 코스타리카는 중립국으로서 아예 군대를 두지 않았지만, 스위스·오스트리아는 혹시 모를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요. 오스트리아는 UN 평화유지군과 유럽연합에도 참여하고 있답니다.
보통 주변국들이 조약을 승인하면서 영세중립국 지위가 확립되지만, 주변국이 그 조약을 파기하면 중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벨기에는 1839년 런던 조약으로 영세중립국이 됐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침공을 받아 결국 영세중립국 지위를 포기했어요.
중립국의 대명사, 스위스
중립국이라고 하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국가는 스위스인데요. 스위스가 중립국으로서의 입지를 확립한 것은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이후부터입니다. 스위스는 1798년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위성국이 됐는데요.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유럽의 강대국들은 스위스에 프랑스·오스트리아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기대했어요.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의 사후 수습을 위해 모인 빈 회의에서 프랑스·영국 등 유럽 열강들은 스위스의 독립과 중립국 지위를 승인했답니다. 이후 스위스는 영세중립국 지위를 엄격하게 지키려 노력했어요.
스위스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난민을 수용하면서도 군사적으로는 어느 쪽 편도 아니었어요. 1920년에 결성됐던 국제 연맹은 공식적으로 스위스의 중립성을 인정하고 제네바에 본부를 세웠습니다. 실제 스위스는 오늘날까지 중립국으로서의 상징성을 가장 강하게 가진 나라예요. 스위스의 남서부에 있는 제네바에는 국제적십자위원회·세계보건기구 등 많은 국제기구가 설치돼 있어 '평화의 수도(Peace Capital)'라고 불린답니다.
2002년 스위스는 국민투표로 유엔 가입이 결정되면서 유엔의 190번째 회원국이 되었는데요.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스위스가 더 이상 엄밀한 의미의 중립국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해요. 반면 범세계적인 집단 안보 체제인 UN에 가입하는 것은 중립성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어요. 또 스위스가 UN 가입 신청서에 '중립성의 원칙'을 명시했기 때문에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지요.
스웨덴과 핀란드의 경우
스웨덴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전통적으로 중립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 동맹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제1·2차 세계대전에서도 중립 노선을 유지해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지 않았지요. 20세기 내내 스웨덴은 국제 평화와 안보를 증진하기 위한 외교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냉전 기간에도 중립적 위치를 이용해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결을 완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스웨덴은 우리나라의 남북 관계에도 관여하고 있는데요. 남북 간의 분쟁 방지와 조정을 위해 만들어진 '중립국 감독위원회'에서 스위스와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핀란드는 중립국으로서의 역사가 길지는 않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독립한 후에도 영토 내에 러시아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어요. 1948년 소련과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할 때 조약 서문에 '핀란드는 강대국 간의 갈등에서 벗어나 UN 원칙에 따라 평화를 유지한다'는 내용을 넣어 중립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죠. 이 조약은 체결국 간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는데요. 서로에 대항하는 군사 동맹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있었죠. 냉전 기간에 소련 군대가 핀란드에서 철수하면서 점점 다른 국가들도 핀란드의 중립성을 인정했답니다.
사실 스웨덴과 핀란드가 군사 동맹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1994년부터 나토의 평화 협력 프로그램에 가입해 협력해 왔는데요. 이번에 나토에 가입하게 된다면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모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는 북대서양조약 5조에 따라 처음으로 핵보유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 중립국 지위를 포기하게 돼요.
☞바티칸 시국(市國)
바티칸은 영세중립국 중 특수한 유형인데요. 바티칸의 주권은 교황한테 있고 교황청은 정치적 중립성을 가진 종교 기관이기 때문에 바티칸도 영세중립국으로 인정받고 있어요. 1929년 이탈리아 정부와 맺은 라테란 조약에 바티칸의 영구중립성이 명문화돼 있지요.
(시계방향으로) 스웨덴과 스위스의 ‘중립국 감독위원회’ 대표들이 2008년 3월 5일 경기 의정부에서 열린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감독하기 위해 참석해 착용했던 유니폼 패치. 왼쪽은 스웨덴, 오른쪽은 스위스 패치입니다./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 본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적십자위원회 본부와 국제보건기구/위키피디아
-기획·구성=안영 기자/윤서원 단대부고 역사 교사, 조선일보(23-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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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시국
전 세계적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빗장을 걸어 잠갔던 유럽 국가들이 이달부터 속속 관광객을 받을 예정이라고 해요. 특히 지난 3월부터 폐쇄 중이던 이탈리아의 대표적 관광 명소인 바티칸시국(市國·하나의 시로 이루어진 국가)의 바티칸 박물관도 1일부터 다시 개관한다고 밝혔답니다. 바티칸 박물관은 고대 로마·이집트 유물과 르네상스 걸작 미술품을 보유한 세계적 박물관으로, 매년 1억달러(약 1228억원) 안팎의 수입을 올리며 교황청의 재정적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바티칸시국이란 로마 시내에 있지만 이탈리아 정부가 아닌 교황이 지배하는 영세중립국이에요. 면적이 0.44㎢로, 여의도(2.9㎢) 면적의 6분의 1도 안 되는 크기로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입니다. 인구는 약 900명에 불과하지요. 이렇게 작은 바티칸시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을까요?
◇754년 교황령 등장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274~337)는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주었어요. 이후 독실한 그리스도교 귀족들의 기부로 교회 재산은 점점 불어났어요. 콘스탄티누스 1세는 순교한 성인(聖人)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해 교황에게 바쳤습니다. 이후 바티칸은 로마 교황이 거주하는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어요.
6세기 이후 로마 귀족들이 너도나도 자기 재산을 기증하면서 교회는 더욱 부유해졌어요. 이렇게 해서 쌓인 교회의 토지 재산을 '베드로의 세습령'이라고 불러요. 교황은 점차 영토 안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정치적인 지배력을 갖게 되었지요.
754년 교황에게 땅을 바치는 프랑크 왕국 피핀 왕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오른쪽 사진은 0.44㎢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시국의 성 베드로 성당 모습이에요. /위키피디아
교황이 세속적인 지배력을 갖는 지역을 뜻하는 '교황령(敎皇領)'은 754년 프랑크왕국의 초대왕 피핀이 이탈리아 북동부 라벤나 지역 등을 교황에게 바친 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사건을 '피핀의 증여'라고 불러요. 당시 교황이었던 스테파노 2세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랑고바르드족(게르만족의 하나)으로부터 큰 위협을 받고 있었어요. 이에 교황은 프랑크왕국의 새 왕조를 연 피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요. 당시 피핀은 안정적인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교회와의 결탁이 필요했어요.
피핀은 '피핀의 증여'를 통해 교회의 보호자가 되길 자처합니다. 자신이 정복한 도시들의 성문 열쇠를 베드로의 무덤 위에 놓고 교회에 바친다는 증여식도 거행했어요. 여기에 호응해 교황은 피핀과 그의 두 아들에게 성대한 도유식(몸에 기름을 발라 병을 낫게 하고 악마를 쫓아낸다는 종교적 의식)을 행해주었지요. 이후 교회는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단절하고 서유럽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피핀의 증여'는 '교회 국가'가 탄생하는 시초가 되었고 도유식은 서유럽 왕들이 교황에게서 왕관을 받는 대관식으로 관습화되었습니다.
◇1870년 이탈리아 통일로 사라진 교황령
그러나 세속적 정치 권력과 교회 권력의 결탁은 새로운 분쟁을 낳기도 했어요. 중세시대 성직자는 교회에 속해 있었지만 세속 군주로부터 토지를 받은 봉신(封臣·땅을 받은 신하)이기도 했거든요. 특히 962년 교황으로부터 황제 왕관을 받은 독일 국왕 오토 1세는 전략적으로 교회의 힘을 사용했습니다. 교회의 권위를 빌려 지방 제후들을 견제했고 성직자와 수도원장을 직접 임명해 부와 권력을 주고 충성과 군사적 지원을 요구했어요.
이후 수세기 동안 교황은 서유럽의 세속 군주들과 권력 투쟁을 벌였어요. 교황령은 교황의 권력에 따라 확대되거나 축소되기도 했지요. 14세기엔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긴 적도 있었고(아비뇽 유수·1309~1377), 16세기 초엔 로마 등을 포함한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장악한 적도 있었어요. 1798년에는 프랑스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해 로마 공화국(1798~1800)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801년 나폴레옹 1세가 교회와의 친선을 위해 '정교(政敎) 협약'을 맺으면서 비로소 교황령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어요.
19세기 유럽에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가 북동부 지역을, 교황은 로마를, 프랑스가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지배하는 등 분열돼 있었어요. 하지만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북서부 사르데냐 왕국을 중심으로 통일 운동이 전개돼 1861년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왕국'이 탄생했고, 1870년에는 베네치아와 로마 교황령을 모두 합친 '통일 이탈리아'가 완성됐습니다. 당시 교황 피우스 9세는 합의되지 않은 합병에 반발했으나 결국 모든 영토를 잃게 되었어요. 이후 교황들은 바티칸 내 성 베드로 성당에서만 지내게 됐고,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지요.
◇무솔리니와 맺은 '라테란 협정'으로 탄생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간 불편한 관계가 해소된 것은 파시즘 정권을 수립한 무솔리니(1883~1945) 때입니다. 무솔리니는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했어요. 학교, 병원 등에 십자가를 걸고 초등학교에서는 가톨릭 교리 교육을 실시하도록 했지요. 또 신학생들의 병역을 면제해주었습니다.
1929년 무솔리니와 교황청 특사 가스파리 추기경 사이에 '라테란 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이 협정으로 바티칸시국은 교육, 세금, 주교 임명, 교황 선거 등에 대한 독자적 권리를 인정받았어요. 교황청은 이탈리아 정부에 바티칸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교황령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거액의 보상금도 받았어요. 이때부터 교황령은 바티칸시국으로 한정되었고, 현재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특별 헌금과 바티칸 박물관 입장료, 관광 수입으로 국가를 유지하고 있답니다.
-윤서원·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기획·구성=박세미 기자, 조선일보(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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