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웅크린 이들에게 주는 위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뚝섬 2022. 12. 31. 05:40

[웅크린 이들에게 주는 위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웅크린 이들에게 주는 위로

 

TV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리오넬 메시(35)를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에서 직접 보면서 신기한 점이 있었다. 메시는 웬만해서는 뛰지 않는다는 것이다. 냇가에 놀러 나온 할머니처럼 천천히 경기장을 노닌다. 공이 넘어오면서 급박하게 공격이 전개될 때도 세상 관계없는 사람처럼 걷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눈에 들어오는 모습이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린다. 아르헨티나가 공격하든, 수비하든, ‘도리도리’를 하는가 싶을 정도로 고개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메시가 달린다. 분명히 다를 게 없는 상황인데도 달려온 메시가 공을 받고 누군가에게 넘겨주니 찬스가 생긴다. 아니면 직접 몰고 가서 골을 넣는다. 그렇게 대회 7골 3도움이라는 가공할 만한 공격력을 보였다. 체감상 메시가 달리면 최소한 상대 간담이 서늘할 정도는 되었다. ‘축구의 신’에게만 보이는 길이 있는 듯했다.

 

메시도 20대 초반에는 부리나케 뛰어다녔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스피드와 현란한 드리블로 상대를 기만했다. 이때도 당연히 막기 어려웠지만, 공을 잡으면 바로 달렸던 덕에 이중 삼중으로 붙으면 어찌어찌 그를 멈춰 세울 수는 있었다. 여러 좌절한 메시는 기다림을 배웠다. 넋 놓고 멍 때리는 게 아니라 빠르게 박찰 때를 신경을 곤두세우고 찾는 기다림이다. 걷고 있다고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순식간에 달려와 골을 넣는 지금의 메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육중하면서도 민첩한 미국 프로농구(NBA)의 지배자 르브론 제임스(38)도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막을 수 없는 선수다. 20대까지는 이를 남용했지만, 지금의 제임스는 필요할 때를 빼고는 뛰지 않는다. 제임스는 “20대보다 지금의 내가 농구를 더 잘한다고 확신한다”고 했다. 테니스의 로저 페더러(41·은퇴), 골프의 타이거 우즈(47) 등 달인의 반열에 오른 선수들의 공통점은 느긋해 보일 정도로 침착하게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치타와 비슷하다. 육식동물 중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은 치타에게 사냥에서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만약 실패하면 다음 사냥에 나설 체력이 없어 결국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잇감을 포착하면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찰나의 순간에 숨통을 끊는다. 치타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속도가 아닌 기다림이다.

 

손흥민도 이번 월드컵에서 같은 결의 모습을 보여줬다. 16강 진출이 달린 포르투갈전에서 50m를 달리다가 잠깐 멈추면서 이목을 집중시키고, 상대 수비수 다리 사이로 패스를 보내 황희찬의 역전 골을 도왔다. ESPN은 뭔가를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정심이라고 손흥민의 인내를 예찬했다.

 

손흥민은 그 잠깐을 멈춰선 덕분에 한국 축구의 역사를 바꿨다. 손흥민은 2초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이틀, 2개월, 어쩌면 2년일지도 모른다. 각자에게 필요한 기다림의 시간이 다른 탓이다. 지금은 바짝 웅크리고 있더라도 계속 치열하게 준비하며 기다린다면 새해에는 인생에 한 번뿐인 기회를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영빈 기자, 조선일보(22-12-30)-

_________________ 

 

 

세렌디피티(Serendipity)

 

우연히 다가오는 행운은 없다

운이란 준비와 기회의 만남이다"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기면 그저 운(運)이 좋았다고 한다. 겸손한 정답이긴 하지만 뭔가 2% 부족한 표현이다. 이럴 때 세계적 고수들은 생각지도 못한 행운, 즉 ‘세렌디피티’라고 한다. 그러나 인생에서 대가 없이 요행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재물뿐이다. 파스퇴르는 “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고 했다. 농구에서 종료 신호와 함께 성공된 골(버저비터, Buzzer Beater)처럼 일견 완벽한 우연으로 보이는 일도 사실은 미지의 강력한 긍정과 노력의 힘에서 잉태된 것이리라. 이번 연말에 이런 말은 아낄 이유가 없다. “오늘 당신을 만난 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세렌디피티입니다.”

 

-이동규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조선일보(22-12-30)-

__________________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

 

[신수진의 마음으로 사진 읽기]

 

강운구, 조세희, 경기 가평, 1993.

 

“사람들 얼굴 위로 빛과 그늘이 부단히 교차한다. 시간은 시계 속에 그대로이고 사람들은 지나갔다. 흐르는 것은 사람이다.”(강운구)

 

사람과 때가 만나 시절의 운이 생긴다. 때는 사람을 그 자리에 있게 하고 떠나게도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도 때에 따라 모임과 흩어짐이 달라진다. 나의 때와 누군가의 때가 엮이고 섞이면서 또 한 해가 저문다. 그렇게 사람도 흘러간다.

 

강운구(1941~ )는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자존심이다. 꼿꼿하고 빈틈없는 성품에 두꺼운 애호가층과 열렬한 추종자들을 거느린 사진계의 ‘선생님’이다. 그의 책 ‘사람의 그때(2021)’에는 이십대 시절부터 최근까지 이런저런 인연으로 만난 문인,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사진가 등의 초상이 실렸다.

 

강운구의 인물 사진이 특별한 것은 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들의 함께 보낸 시간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에 담긴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들’은 스쳐 지나는 사람이 아니다. 동시대를 살아낸 그들은 공기처럼 스며들어 서로를 메우는 사이였다. 그 시간을 기록한 강운구는 우연을 필연으로 붙잡아 두는 인연의 연금술사처럼 그때의 그 사람을 소환한다.

 

소설가 조세희(1942-2022)와 사진가 강운구는 여행 동무였다. 술을 마시지 않는 습성이 같고 고운 심성이어서 죽이 잘 맞았다고 회상하는 남은 동무는 삼십년 전 이 사진이 찍힌 곳을 ‘그 친구의 고향 근처’라고 전한다. 산업화와 자본이 이끄는 고속 성장 시대의 갈등과 앙금, 소외와 좌절은 치열하게 그 시절을 살아낸 두 사람에게 공통된 관심사였다.

 

마치 촬영 세트처럼 온전하게 주인공을 감싸 떠받치는 폐자재는 저 너머 촘촘한 숲과 잔잔한 풀꽃들을 가린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낭만을 말할 수 없는 이야기꾼의 운명을 받아들이듯이 정면으로 선 소설가의 눈빛은 미묘하게 카메라와 어긋나 있다.

 

오랜 인연은 종국엔 헤어짐의 슬픔을 남긴다지만, 강운구의 사진 속에 성성하게 살아있는 주인공들은 새로운 시간 속에서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 갈 것이다. 흐르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말이다.

 

-신수진 예술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조선일보(22-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