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아버지와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어느 아버지의 재산 상속]

뚝섬 2023. 1. 10. 09:27

[아버지와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어느 아버지의 재산 상속]

 

 

아버지와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전기도 없이 살던 25 , 치통 견디다 금니하러 병원 가던
치료비 마련 못한 아버지며칠만 있다 와도 되냐고 여쭤볼래?”
나는 헛기침하며 말했다 지켜보고 금니 씌우는 낫겠대

 

고3 여름, 집에 전기가 끊긴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던 집에서 한 달이 넘게 전기 없이 살았다. 원래도 집이 어려웠지만 때마침 아이엠에프(IMF) 외환 위기였다.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켤 때마다 아이엠에프를 얘기했다. 때마침 촛불이 환해서 아버지 얼굴이 잘 보였다. 아이엠에프를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은 늘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그 표정을 바라보는 게 어색해서 나도 늘 아이엠에프를 얘기했다. 같은 동네 누구는 이사를 갔고, 같은 반 누구는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래도 나는 아직 집에 살고 있고, 아르바이트를 안 해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아버지도 그런 내 표정을 바라보기 어색했는지, 말없이 촛불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 침묵이 쑥스러워서, 나도 말없이 촛불을 지켜보았다. 촛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꽤 컸다. 다행히도 그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의 침묵은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에 내 이빨이 아프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어색하지 않게 계절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하필 아이엠에프 시기에, 하필 전기가 끊겨서 촛불을 켜던 시기에, 너무나도 야속하게 한쪽 어금니가 썩고 있었다. 이빨은 시도 때도 없이 욱신거렸다. 다른 때는 그나마 참겠는데 밥을 먹을 때 그쪽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송곳에 찔린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필 여름방학이었고, 아버지랑 집에서 단둘이 밥을 먹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내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쳐야 했다.

 

입속에서 어금니가 내 신경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고 있어도, 태연한 표정으로 밥을 씹어야 했다. 때때로 티가 안 나게 찬물로 입을 헹구며, 조금이라도 진통이 가시기를 빌었다. 조금만 견디면 개학이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더 이상 아버지 앞에서 어색하게 연기할 일도 없었다. 아마도 내 어금니는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낮밤을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신경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너무 아파서 잠이 오지 않았다. 찬물을 입에 물고 있어도 가시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서 치약을 한가득 발라도 마찬가지였다. 침대에 엎드려 양손으로 턱을 주무르며 밤새 끙끙 앓았다.

 

다음 날, 내 한쪽 볼은 붕어빵처럼 부풀어 있었다. 아버지는 놀란 얼굴로 내 손을 붙들고 치과에 데리고 갔다. 의사 선생님은 혀를 끌끌 차며 엄청 아팠을 텐데 어떻게 참았냐고 물었다. 하루라도 빨리 금니를 씌워야 한다고, 아마도 견적이 꽤 나올 거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토록 화난 표정의 아버지는 처음이었다. 값은 신경 쓰지 말고 당장 치료를 해달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어금니의 썩은 부분을 한참 갈아냈다. 이빨 본을 뜨고 며칠 후에 금니를 씌우러 오라고 했다. 금니 계산은 그때 해도 된다는 얘기와 함께.

 

갈려진 어금니 때문에 밥을 먹을 때마다 한쪽으로만 씹기가 어색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이제 금니를 씌우면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다며, 그때까지 먹고 싶은 것을 잔뜩 생각해 놓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번쩍이는 금니를 씌우고, 아버지 앞에서 보란 듯이 이것저것 씹어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치과에 다시 가는 날은 개학 며칠 후였다. 점심시간에 아버지가 학교 앞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오늘만을 기다려왔다는 표정으로 일부러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아버지의 표정이 그날 따라 어색했다. 치과로 함께 걸어가는 내내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병원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한동안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올라가서 의사 선생님한테, 며칠만 더 있다가 와도 되냐고 여쭤볼래?” 홀로 계단을 오르며, 아버지의 표정이 왜 그토록 어색했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는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었다. 치과 입구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내려갔다.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좀 더 상태를 지켜보고 금니를 씌우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시는데…”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또다시 헛기침을 하며 길을 나섰다. 나도 헛기침을 하며 아버지를 따라갔다.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아이엠에프였고, 때마침 나 혼자 병원에 올라갔고, 때마침 아버지가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비록 한쪽 어금니는 시커먼 구멍처럼 사라졌지만, 아직 촛불을 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촛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꽤 클 테니,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어색함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조선일보(2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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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리하고 똑똑하다는 우리 어머니

 

내가 초등학교 육학년 때 육이오 전쟁이 났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우리 삼형제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다. 어머니는 밤이면 가마니 위에 누운 우리들 얼굴에 이슬이 내릴까봐 보자기로 씌어 주셨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다.

 

삼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데 가서 자라고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다. 다음날 새벽 어머니는 우리들이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서른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다.

 

나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하고 쌀자루를 맡겼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다. 나는 어머니를 놓칠까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하였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하고는 가 버렸다. 나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다. 당황해서 큰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그냥 주저앉아 있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다. 길가에 울고 있는 나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갔니?> 하고 물으셨다. 나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바보처럼 보이는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님의 글입니다. 이 글 속의 “어머니”는 시인 박목월님의 아내가 되십니다.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야단이 아니라 칭찬을 해 줄 수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칭찬 한마디가 우리 아이들의 인생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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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버지의 재산 상속

 

5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시집장가 보내고 이제는 한시름 놓은 어느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져 하루는 자식, 며느리, 사위들을 불러 모았다.

 

"네 애비가 너희들 키우고, 사업 하느라 빚을 좀 졌다. 빚에 빚이 늘어나 지금은 한 7억 정도 된다. 내가 건강이 안 좋고 이제는 벌 능력도 없으니 너희들이 얼마씩 갚아 줘야겠다. 여기 이 종이에 얼마씩 갚겠다는 금액을 좀 적어라."

아버지 재산이 좀 있는 줄 알았던 자식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중 그리 잘살지 못하는 셋째 아들이 종이에 '5천만원' 이라고 적었다. 그러자 마지못해 나머지 자식들이 종이에 마치 경매가격 매기듯 '1천만원', '1천5백만원', '2천만원', '2천5백만원'을 적었다.

수개월 후 다시 아버지가 이들을 불러 모았다. "내가 죽고 나면 너희들끼리 얼마 되지도 않은 유산으로 싸움질 하고 형제지간에 반목할까봐 재산을 정리했다. 지난번에 너희가 적어 준 액수의 5배를 지금 주겠다. 이것으로 너희들에게 줄 재산 상속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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