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그 시절 학교 풍경]

뚝섬 2023. 8. 19. 08:06

그 시절 학교 풍경

 

얼마 전 부임 2년 차 젊은 초등학교 여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하였습니다. 학생지도나 학부모 응대 등 과정에서 겪은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 때문으로 보입니다. 지난 7월 29일 오후 2시에는 전국 교사 3만여 명이 땡볕 속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 광화문 앞 거리에 모여 ‘교육권 보장’을 외치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고통을 호소한 이래, 매주 토요일마다 집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의 표출입니다. 이 사건이 단순 우발적인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교육부, 현장 교육자들, 학부모와 시민사회 등이 협력하여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고 반성하여 나름대로 해결 방안을 마련하겠지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 발전 과정에서 굳어져 버린 공동체 구성원의 인식과 행태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됐는지 하는 안타까운 마음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옛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 해결책의 출발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50년대 후반의 이야기입니다. 4월에 신학기가 시작하였습니다. 봄꽃들도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는 3월이 아닌 4월이 새 학년의 시작이었습니다. 새로 만나는 담임선생님과 급우들은 모두 새로운 시작에 마음이 설렜습니다.

 

학기 초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 전원의 가정을 차례로 방문하였습니다. 학생들의 가정환경을 파악하여 생활 지도 등 교육에 참고하기 위한 가정방문입니다. 지금 같으면 사생활 보호 등 문제로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선생님이 방과 후 1번 학생 집을 방문하면 1번 학생은 2번 학생 집을 알아 두었다가 선생님을 그 집으로 안내하고, 2번 학생은 3번 학생 집으로 순차 안내하는 방식으로 상당 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가정방문입니다.

 

선생님의 방문에 맞추어 어머니들은 집 안을 청소하고 소박하나마 정성껏 다과도 준비하여 선생님을 맞았습니다. 저는 우리 집 방문을 마친 선생님을 A군의 집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제가 그 친구 집으로 안내하는 순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B군의 집으로 안내하면 B군이 A군의 집으로 안내하는 그런 순서였지만, A군은 순서를 바꾸어 제가 자기 집으로 안내해주도록 부탁하였습니다. A군은 천변 판잣집에서 할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었습니다. A군은 그 사실을 한사코 숨기고 싶었기에 어차피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저에게 안내를 부탁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집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누추한 그 친구의 집을 들여다보았다가 그 친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난처해하는 친구의 표정에 더욱 난처해진 것은 저였습니다. 그 후로 저는 그 친구의 바람대로 그 비밀을 지켜주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A군 집을 향하며 선생님에게 조심스레 순서가 바뀐 경위를 설명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흘낏 보시고 살포시 웃으셨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돈 벌러 서울로 떠난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친구는 방과 후 가끔 광주역으로 가서 서울에서 오는 기차를 기다리다가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다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하는 것이 그 친구에겐 위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 그를 따라 기차역에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가정방문에서 얻은 정보는 알게 모르게 선생님의 학급 운영에 반영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소풍날에 부잣집 아이들이 선생님 몫으로 으레 가져오는 도시락 대신에 과일, 과자 등을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가난한 아이들 몫이었습니다.

 

그때는 학교와 가정, 선생님과 학부모·학생 사이에 상호 존경과 신뢰가 있었습니다. 학생 인권, 교권이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거칠게 항의하고 고소하는, 그런 일도 없었습니다. 학교 안에서 일어난 일은 학교 안에서 해결되고 처리되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지금보다 훨씬 따뜻하고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조선일보(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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