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제2의 신혼', 정말 불가능한 걸까요?]

뚝섬 2023. 9. 3. 05:44

'제2의 신혼', 정말 불가능한 걸까요?

 

저희는 평범한 40대 부부입니다. 서로 좋아 결혼했고, 지금껏 딴마음 품지 않고 남편으로 아내로 열심히 살았으니 서로를 인생의 귀인으로 생각하는 게 맞지 싶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애정이 샘솟는 순간보다는 심술과 오기가 발동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희한한 것은, 서로가 눈앞에 없을 때면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는 겁니다. 방금 전 내 대답이 무성의했나 싶고, 남편이 오기 전에 립스틱이라도 발라볼까 싶습니다. 하지만 막상 남편을 마주하면 저는 이내 드세고 야박한 마누라로 돌아가지요.

돌이켜보니 대략 7년쯤은 그나마 서로 조심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저희에게 닥쳐온 작은 시련을 현명하게 넘지 못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실망해버렸죠. 그 뒤로는 서로를 가차없이, 함부로 대해왔네요. 그렇게 7년의 신혼, 7년의 권태기를 지나 올해가 15년째입니다. 새 다이어리에 새해 소망을 적는데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7년간, 제2의 신혼기를 보낼 수는 없을까? 남편과 다시 한번 연애를 해볼 수는 없을까?

하지만 저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습니다. 설사 우리가 어렵사리 감정의 불씨를 되살린다 해도 그 연애는 한 달을 못 가 끝나고 말 거라는 걸 너무 잘 아니까요. 왜냐하면 지난 7년 동안 우리는 그런 짧고 허무한 연애를 두 번이나 했었거든요.

2014년 1월의 일입니다.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저희 네 식구는 야심찬 해외 여행을 떠났더랍니다. 목적지는 우리가 처음 만난 미국 시골의 한 도시. 두 아이에게 엄마 아빠의 '성지'를 참배케 하고 우리도 그 시절의 초심을 되찾아보자는 간절한 의미였죠. 하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셋째 날은 강풍이 불고, 눈비마저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래도 두어 시간만 더 가면 목적지에서 밤을 맞을 수 있다 싶어 길을 서둘렀죠. 그런데 불과 일이십 분 사이에 날씨가 급격히 험악해지는 겁니다.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폭설이 휘몰아치며 1m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필이면 운전대를 제가 막 잡은 참이었는데,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아 차선을 넘나들며 좌우로 헤매고 말았죠. 그때 어디선가 경적 소리가 부웅 나더니, 옆으로 거대한 뭔가가 아슬아슬하게 지나쳐가는 게 아니겠어요. 대형트럭이었습니다.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놓아버렸죠. 그때 남편이 제 손을 꽉 잡더니 침착하게 지시하더군요. 비상등 켜고 차 세워. 남편은 차에서 내렸고 저는 엉금엉금 옆자리로 기어갔습니다. 잠시 뒤 차가 움직이더군요.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어느새 남편이 핸들을 잡고 있었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빙판길을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미끄러지듯 달리는 겁니다. 그렇게 얼마를 꾸준히 달려 폭설 구간을 벗어나고서야 남편은 놀란 아이를 어르듯 부드럽게 말하더군요. '안 보일수록 멀리 봐야지. 겁내지 말고.'

그날 밤, 어느 허름한 모텔에서 저는 가슴 떨리는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남편이 얼마나 멋지고 대단하게 보이던지요. 예전에 남편을 오빠라 부르며 무조건 따르던 그 마음이 단번에 살아나더군요. 그날 밤 저는 남편 곁에 누워 다짐했습니다. 앞으로는 남편을 무조건 존경하고 연장자로 대접하겠다고요.

하지만 그 결심은 24시간도 못 가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날씨가 좋아지고 보니 자동차 범퍼 모서리가 깨져 있지 않겠어요. 트럭과 스쳤을 때, 실제로 사고가 난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남편은 화를 내며 제 탓을 했습니다. 렌트 비용이 추가로 몇 백 달러는 더 나오게 생겼다며 씩씩거리는데, 정말 사람이 그렇게 좀스러워 보일 수가 없더군요.

결국 그 여행은 초심을 돌이켜주지 못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이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각방(?)을 쓰는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했으니까요. 잠드는 시간대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숙면을 취하고 싶다는 이유로 남편은 안방 침대를 쓰고 저는 소파를 쓰기 시작한 것이 벌써 수년째. 굳이 따지자면 제가 먼저 방을 나온 거지만, 남편도 붙잡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 저희 부부를 놀라게 한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평소 건강을 자신하던 남편이 웬일로 복통을 호소하여 같이 병원을 찾았을 때입니다. 검사 결과를 살펴본 주치의 선생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암'일 가능성이 보이니 당장 정밀검사를 하자고요. 정말 눈앞이 캄캄하더군요.

 

그날 밤, 저는 베개를 들고 남편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여자의 자존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대로 건강할 줄 알고, 우리의 젊음을 귀찮아했던 게 후회스러웠습니다.

조직검사 결과는 다행히 음성이었고, 우리 네 식구는 기쁨에 취해 서로를 부둥켜안았지만 부부의 동침은 20여일 만에 끝이 났습니다. 지난 토요일 저는 다시 베개를 들고 소파로 나왔고 남편은 굳이 붙잡지 않았죠.

그날은 미세 먼지가 극성을 부려 외출을 자제하라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눈 붙였다 깨어보니 남편과 아들이 보이지 않는 겁니다. 왠지 불안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한참만에야 받더군요. '지금 놀이터에서 배드민턴 치고 있는데 왜? 걱정마. 미세 먼지는 거의 안 보여.' 남편의 무신경이 기가 막혔지만 저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천천히 말했습니다. '미세 먼지는 원래 안 보여. 그러니까 그만 치고 들어와.'

그러자 남편이 잠시 말이 없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홱 바꿔서 저한테 시비를 걸더군요. '넌 왜 내가 즐거운 꼴을 못 보니? 하는 일마다 왜 트집이야. 내가 그렇게 밉니?'

그 순간, 저는 20일간 꾹꾹 참아온 뭔가가 봇물 터지듯 터지는 걸 느꼈습니다. 잘해 보려던 내 노력이 짓밟힌 것 같아 더 화가 났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일부러 어깃장 놓는 거 아냐?'

그 살벌한 통화 한 번으로 우리의 두 번째 연애는 막을 내렸죠. 그리고 저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남편과 이별하기 전에는, 남편과 연애할 수 없다고요.

어젯밤 다이어리를 쓰다 말고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은 껄껄 웃으며 쉽게 답하네요.

'나도 지난번 당신 수술받을 때 울며 다짐했지만, 그게 안 되더라고.'

 

-조선일보(18-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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