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山野(草·木·花)]

[안내까지 했는데··· 구상나무 신종 발표에 발 구른 나카이]

뚝섬 2023. 11. 19. 05:29

안내까지 했는데··· 구상나무 신종 발표에 발 구른 나카이

 

[김민철의 꽃이야기]

 

구상나무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종입니다. 제주 한라산을 비롯해 지리산·덕유산 등의 고지대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무가 긴 삼각형 모양 수형이 아름다워 크리스마스트리용으로 인기 있다는 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엔 기후변화로 빠른 속도로 집단 고사해 안타까움을 주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구상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인 1920년 신종으로 등록됐습니다. 구상나무가 속한 ‘전나무속’에는 전나무, 가문비나무, 분비나무가 더 있습니다. 구상나무는 분비나무와 비슷하게 생겨 신종 등록 전까지는 다들 분비나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신종 등록까지 미·일 학자 치열한 물밑 경쟁

 

나카이 다케노신(1882~1952)이라는 일본인 식물학자도 그렇게 생각한 학자 중 하나였습니다. 나카이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식물 조사를 주도한 학자였습니다. 나카이가 조사해 신종으로 등록한 한반도 고유종이 개나리 등 497종에 이릅니다. 그땐 우리나라 근대 식물학 체계가 잡히기 전이라 우리 학자는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나카이는 1914년 제주도를, 1915년 지리산을 조사해 각각 식물조사보고서를 냈습니다. 그는 당연히 두 곳에 있는 구상나무도 보았고 이를 분비나무로 기록했습니다.

 

그 즈음 이 구상나무에 주목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의 어니스트 윌슨(Wilson) 박사로, 그는 한반도에서 가톨릭 사제인 포리(Faurie) 신부와 타케(Taquet) 신부가 보내준 식물 표본을 조사하다가 이름이 붙지 않은 한 표본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분비나무와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고 1917년 직접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한라산 백록담의 구상나무. /조선DB 

 

윌슨은 1917년 가을 한라산에 올라 이 나무를 확인했습니다. 이 한라산 탐사에는 나카이와 정태현도 동행했습니다. 정태현은 나카이와 함께 한반도 식물 조사를 한 분으로, 1937년 우리나라 식물을 처음 체계적으로 정리한 ‘조선식물향명집’을 낸 4명의 필자 중 한명입니다.

 

윌슨은 이 나무 솔방울의 비늘 끝이 분비나무와 달리 뒤로 젖혀진 것에 주목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연구를 더해 1920년 이 나무를 ‘Abies Koreana Wilson’이라는 학명으로 신종 등록했습니다. 정태현은 회고록에 이 소식을 들은 나카이가 선취권을 놓친 것을 ‘발을 구르며 억울해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나카이는 그 뒤에도 자신이 구상나무 신종 등록을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어니스트 윌슨 박사 사진. 1917년 압록강, 두만강 분기점 인근에서 찍은 것이다. /하버드대 아놀드식물원 

 

◇100년 후에도 신종 맞느냐 논쟁

 

이 나무는 그때부터 ‘구상나무’라는 이름과 ‘Korean fir(한국 전나무)’라는 영문 이름을 갖고 세계 식물학계에 한국 특산종으로 알려졌습니다. 구상나무라는 이름은 제주도에서 이 나무를 부른 이름 ‘쿠살낭’에서 따온 것입니다. ‘쿠살’은 성게, ‘낭’은 나무를 가리킵니다. 짧고 바늘처럼 생긴 잎이 가지에 다닥다닥 달린 모습이 성게와 닮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구상나무 열매가 성게 가시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구상나무와 열매. 솔방울 비늘 끝이 뒤로 젖혀져 있다. 

 

이처럼 구상나무가 신종으로 등록되기까지 미·일 식물분류학자의 치열한 물밑 경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상나무가 신종인지 논란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잠잠했다가 다시 논란이 불거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근래 들어 구상나무를 분비나무와 구분해 독립 종으로 다루는 것이 맞느냐는 견해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두 나무 차이가 솔방울 비늘 끝이 곧바르냐, 뒤로 젖혀져 있느냐 차이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비늘 끝이 젖혀진 정도가 좀 애매한 개체도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상나무를 종보다 낮은 변종으로 다루거나 아니면 아예 분비나무와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견해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한라산 구상나무와 고사목(오른쪽).

 

구상나무가 요즘 안타깝게도 기후변화로 한라산·지리산에서 빠른 속도로 말라 죽어가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저도 지난 3월 한라산을 오르면서 앙상한 뼈대만 남은 구상나무 고사목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고사목이 하도 많아 ‘멸종 위기’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지리산·덕유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구상나무의 집단 고사를 개선할 뾰족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보다 세심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구상나무가 핵심 이유와 개선 방안을 찾아야겠습니다. 풍성한 구상나무숲을 후세에 물려주는 것은 우리 세대의 당연한 의무일 것입니다.

 

-김민철 논설위원, 조선닷컴(2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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