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선, 북한군의 움직임]
[제1호 탈북민 김정수 씨]
38선, 북한군의 움직임
[임용한의 전쟁사]
1950년 6월 17일부터 38선의 이북 지역이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북한은 38선에 경비대와 보안대 병력만을 배치하고 있었는데, 주로 함경도와 평안도에 주둔하고 있던 8개 사단이 속속 투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8개 사단의 이동 배치는 21일까지 마무리되었다. 작전 명령과 침공 개시 시간은 이미 장교들에게 하달되어 있었다.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비밀은 유지할 수 없었다. 몇 명의 북한군이 부대가 38선에 배치된 틈을 타서 탈영해서 침공 정보를 알려주었다. 24일에 육군 정보부는 북한의 전면 남침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보고했다. 동시에 24일에 내린 비상대기 해지와 전군 외출, 외박령 취소를 건의했다.
채 총장은 이를 거부하고 특수팀을 파견해 적정을 고찰하고 25일 오전 8시까지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남침 경고는 이전부터 발령되고 있었다. 3월 위기설, 5월 위기설. 덕분에 전군에 비상대기가 계속 발령되어 병사들이 한계 상황이었다. 채 총장은 이것이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채 총장의 고민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3월, 5월에 북한군 주력은 38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북한군의 이동 같은 침공 징후를 탐지할 체계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당시에는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당시 한국군은 전면전을 대비한 방어 시스템이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미국은 지원을 거부했고, 정부는 돈이 없고, 국회는 정치놀음이 우선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소문만 듣고, 병사들만 괴롭혔다. 외출, 외박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었는데, 병사들만 전시 상태처럼 몰아붙였다.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대응이었다.
정작 육군본부의 인사, 기타 정책은 전쟁 준비와는 반대로 움직였다. 4월에 전군 사단장을 한꺼번에 교체했다. 고민과 행동에 일관성이 없고 항상 정치 논리가 작용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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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호 탈북민 김정수 씨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
윤석열 대통령(가운데)이 1월 16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통일부에 ‘북한이탈주민의 날’을 제정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동아일보DB
탈북 후 중국에 숨어 있을 때, 나는 매일 한국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에선 가끔 탈북민 입국 소식과 누적 입국자 수를 소개했다.
2001년경엔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이 1300여 명이었다. 그걸 들으며 “난 1500명 안에는 들어가야겠다”라고 결심했다. 하지만 공안에 체포돼 북송과 감옥 생활, 재탈북을 반복하다 2002년 3월 한국에 입국했을 때 나의 입국 순서는 2100번대였다.
‘그새 참 많이도 왔네. 너무 늦게 왔으니 내가 할 만한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엔 내 뒤로 3만 명 이상이 더 오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2024년 3월 말 기준 탈북민은 모두 3만4121명이다. 이 중 사망한 사람도 있고, 해외에 간 사람도 많아 현재 한국에 사는 탈북민은 3만 명이 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실제 거주자에 대한 통계는 없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탈북민 집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가끔 들었다. 아쉽게도 이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다양한 정보를 접하는 기자인 나도 몰랐으니 탈북민 중에서 제1호 탈북민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로 올해 7월 14일이 ‘북한이탈주민의 날’로 제정되면서, 탈북민의 뿌리를 파 봐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후 취재를 통해 찾은 정답에 기자는 적잖게 놀랐다. 제1호 탈북민이 실향민 세대 이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정부 기록상 제1호 탈북민은 1948년 9월 15일 입국한 김정수 씨였다. 1925년 3월 10일생인 김 씨는 진남포(현재 남포시)에서 살다가 23세에 체제 불만으로 탈북했고, 1986년 7월 8일 6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호 탈북민이 자유의 세상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너무 일찍 돌아간 것 같아 아쉬웠다.
그렇다면 광복 이후 많은 사람들이 월남했는데 공식 집계는 왜 1948년 9월부터 시작됐을까? 이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같은 해 9월 9일 북한 정부가 출범한 것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때부터 한반도에는 2개의 정부가 존재한 셈이고, 이후 월남자부터 탈북민으로 계산한 것. 물론 이때엔 탈북이나 귀순이란 말도 공식화되지 않았다.
6·25전쟁 3년 동안 수백만 명의 북한 주민이 월남했다. 그러나 이들은 탈북민으로 인정되지 않고 실향민으로 간주됐다. 전쟁 중엔 귀순자도 많았지만, 이들도 탈북민은 아니었다.
탈북민 집계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휘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이때는 귀순용사라고 불렀다.
정부 기록상 귀순용사 1호는 정전 나흘 뒤인 7월 31일 중동부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온 안창식 대위이다. 그는 귀순용사 1호이자, 전쟁 직후 첫 탈북민이다. 함경남도 갑산군 출신인 안 대위는 북한군 15사단 사령부에 근무하다가 월남했는데, 이후 49년 동안 한국 국민으로 살다가 2002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귀순용사 2호는 1953년 9월 21일 미그 15기를 몰고 귀순한 21세 노금석 상위다. 공산권 최신 전투기를 몰고 온 노 상위는 10만 달러의 상금과 미국 시민권을 받았다. 그는 전쟁 중에 남쪽에 와 있던 어머니와 함께 1954년 5월 미국으로 건너가 연구원, 교수 등을 지내다 지난해 1월 91세로 사망했다. 그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탈북민 1호라 할 수 있다.
귀순용사들에 대한 대우는 시대별로 들쑥날쑥했다. 1980년대 귀순용사에 대한 처우가 가장 좋았는데, 엄청난 보상금과 함께 서울 중심부 아파트와 원하는 직업을 주었다. 1983년 2월 25일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상위는 당시 강남 은마아파트를 80채나 살 수 있는 15억6000만 원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탈북자라는 용어는 1994년 처음 등장했다. 1997년 4월 20일 입국한 황장엽 노동당 비서는 815번째 탈북민으로 이름을 올렸다. 탈북민 수는 집계 58년 만인 2006년 2월에 1만 명을 넘겼고, 4년 뒤인 2010년 11월에 2만 명, 2016년 11월에 3만 명을 각각 넘겼다.
최근 탈북에 어려운 난관들이 중첩되면서 지난해의 경우 196명에 그쳤다. 현재 추세라면 탈북민 4만 명 시대가 올 것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다만 탈북민 4만 명 시대 전에 고향으로 가는 날이 오기를 모든 탈북민은 바라고 있다.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동아일보(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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