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명품 조연] ["유해진을 아십니까?"]

뚝섬 2023. 9. 20. 06:47

[명품 조연] 

["유해진을 아십니까?"]

 

 

 

명품 조연 

 

스무 살 청년 변희봉의 첫 직업은 배우가 아니었다. 지방에서 법대를 중퇴하고 상경해 제약 회사에 다니며 방송국 문을 두드렸지만 거푸 낙방했다. 겨우 서게 된 무대에선 악역만 맡았다. 인기 드라마 ‘수사반장’에서도 최불암에게 쫓기는 범인이었다. 그래도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고 마침내 ‘조선왕조 500년’에서 간신 유자광 역으로 떴다. ‘00은 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대사는 유행어가 됐다. ‘감기 몸살은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제약 회사 광고도 찍었다.

 

▶1990년대 들어 긴 침체를 겪었다. 사극이 시들해지고 시트콤이 각광 받으며 설 자리를 잃었다. IMF 외환 위기 때는 수입이 끊겨 낙향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플란다스의 개’에 경비원 역을 맡아 달라고 했다. 시시한 배역으로 보였지만 봉 감독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조연이라고 했다. 수십 년 변희봉이 출연했던 작품을 줄줄 꿰며 하는 설득에 감복해 출연하겠다고 했다. 조연 변희봉의 두 번째 전성기가 그렇게 시작됐다.

 

▶변희봉은 조연으로는 드물게 소설 제목에도 나온다. 이장욱의 단편 ‘변희봉’에서다. 소설 속 변희봉은 주인공 ‘만기’만 그의 존재를 알 뿐, 인터넷 검색에도 나오지 않는 무명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만기 아버지가 진한 부산 사투리로 묻는다. “니, 밴히봉이라고 아나?” 아들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아들은 자기 말고도 ‘대배우 변희봉’ 팬이 있다는 게 반가웠다.

 

▶명품 조연 변희봉의 대표작이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다. ‘살인의...’에서 형사 변희봉은 엉뚱한 이를 범인이라며 잡고 한껏 들뜬 표정으로 기념사진까지 찍는다. ‘실수를 반복하며 사는 게 인생’이란 메시지를 그 표정에 담았다. 많은 이가 그 연기에 위로받았다고 했다. ‘괴물’에선 괴물에게 최후의 일격을 당하기 직전, 가족을 향해 “어여 가!”라며 손을 흔드는 연기로 객석을 울렸다. 훗날 그를 만난 더스틴 호프먼이 반색하며 눈앞에서 재연해 보였다던 명연기다.

 

▶변희봉은 일흔다섯을 넘긴 2017년 봉준호 영화 ‘옥자’로 칸 영화제 레드카펫 위에 섰다. 기자들이 소감을 묻자 “70도로 기운 고목에 꽃이 핀 기분”이라며 감격에 겨워했다. “죽는 날까지 연기할 준비가 돼 있다”던 그가 영면에 들었다. 소셜미디어엔 아쉬운 작별 인사가 줄을 잇는다. 소설 속 변희봉은 세상에 알아주는 이가 둘밖에 없었지만, 현실의 변희봉은 수많은 이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연기자는 그렇게 불멸을 얻는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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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을 아십니까?" 

 

코미디 영화 '럭키'의 흥행어둡고 무거운 세상을 웃음으로 균형 회복시켜

단역부터 올라간 유해진은 상투적이지 않은 유니크함 쌓아

 

올가을에 가장 큰 위로를 준 배우는 유해진(46)이다. 그가 주연한 영화 '럭키' 600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2014년 초 '수상한 그녀' 이후 오랜만의 코미디 흥행이다. 냉혹한 킬러 형욱(유해진)이 목욕탕에서 넘어져 기억을 잃고 무명배우 재성(이준)과 인생이 뒤바뀌는 이 영화를 보고 귓바퀴에 맴돈 대사가 있었다.

"저를 아십니까?"

형욱은 세상을 향해 묻는다. 자신이 누구이고 뭘 하던 사람인지 아느냐고. 기억 상실은 이 영화에서 비극이 아니라 기회이고 선물이다. 그는 얼결에 분식집에서 칼 솜씨를 발휘하는 처지가 되지만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긴 기린 그림이냐, 그냥 그린 기린 그림이냐"를 입에 달고 배우 훈련에 몰두한다.

보통 사람도 과거를 말끔히 지우고 삶을 리셋(reset·초기화)하고 싶을 때가 있다. 배우는 직업적으로 그게 가능하다. 이 사람 인생에 세 들어 살다 저 사람 인생으로 건너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유해진은 장동건·이정재·정우성·강동원과는 출발점이 달랐다. 그들은 데뷔할 때부터 정상을 밟은 스타였지만 유해진은 암벽을 타듯 이름 없는 단역부터 붙잡고 올라가야 했다. 조폭으로 존재감을 보여주면 한동안 조폭 배역만 들어왔다. 덤프1(영화 '블랙잭') 양아치1('주유소 습격사건') 어깨2('간첩 리철진') 넙치('신라의 달밤') 짭새('광복절 특사') 쌍칼('공공의 적')…. 대중은 유해진이 '왕의 남자'에서 육갑이, '타짜'에서 고광렬을 연기하면서부터 그를 알아보았다.

'럭키' 상영관에는 웃음이 흥건하다. 사랑받는 영화는 이 사회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최근 무겁고 어둡고 비판적인 영화들로 기울어졌던 탓에 잃어버린 웃음을 '럭키'가 되찾아준 셈이다. 일종의 균형 회복이다.

누가 잘되면 배가 아플 수 있는데 유해진은 정반대다. 제발 잘되길 응원해주고 싶은 사람이다.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생각할수록 대중은 평범하고 좋은 사람이 보답 받기를 바란다. 인성과 노력, 연기력을 다 갖춘 유해진의 성공에는 영화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것 같다.

 

 

육남매 중 막내인 그는 고교 때 청주 청년극장에서 극단 생활을 시작하며 인생의 항로를 정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꿈이었다. 친구들은 "거울은 안 보니?"라며 빈정댔다. 유해진은 대학 연극과 입시에 거듭 낙방하고 엉뚱하게 의상과에 진학했다가 군 복무 후 서울예대를 거쳐 오태석이 이끄는 극단 목화에 들어가 기초를 다졌다.

조상건, 박영규, 김일우, 정진각, 정원중, 한명구, 손병호, 김병옥, 정은표, 성지루, 박희순, 임원희, 황정민(), 장영남 유해진…. '오태석 사단'이라 불리는 배우들은 이름만 나열해도 단단한 골격이 만져진다.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태석은 "배우란 레미콘을 등짐으로 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레미콘은 탱크 안에서 자갈과 모래, 물과 시멘트가 계속 돌아간다. 멈추면 굳어버린다. 배우도 그렇게 부글부글 끓는 상태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태석은 "배우에게 가장 나쁜 것은 오만"이라며 "늘 부족하다 생각하고 잘되고 있을 때 더 의심하라"고 가르친다.


유해진은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이다. 그러지 않고는 좋은 배우가 되기 어려운 것 같다. 각본에는 작가도 메우지 못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배우는 몇 가지 단서만 가지고 살아 있는 인물을 구축해야 한다. 유해진은 배신했던 두목을 찾아가는 배역의 행동이 납득되지 않아 며칠을 고민하다 두목과 같은 파마머리를 하고 나타났고('신라의 달밤'), 산적들에게 수영을 설명할 땐 "'음파~ 음파~' 이것만 기억하면 되는겨. 등신마냥 '파음~' 하면 뒤지는겨" 같은 핵폭탄급 애드리브를 지어냈다('해적: 바다로 간 산적').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윤석 선배가 '넌 애가 참 유니크(unique). 심지어 너는 출연료도 유니크해'라고 한 적이 있어요. 주연 배우들과 조연 배우들의 출연료가 다르잖아요. 저는 진짜 그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어요. 그런데 '유니크하다'는 그 말이 진짜 좋더라구요. 더 유니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고."

유해진이 걸어온 길은 삶이 결코 행운이나 로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럭키'에 대해선 "하찮은 인생이란 없다는 메시지에 끌렸다"고 했다. 여전히 자신을 의심하기 때문일까. 그는 자주 보아도 상투적이지 않고 유니크하다. 흔히 연극을 '세상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연극이 세상을 거꾸로 비추어서 바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럭키'와 유해진을 보면서 나는 잘 살고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박돈규 여론독자부 차장, 조선일보(1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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