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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세습 독재의 평화적 이양] [말레이지아 재발견] ....

뚝섬 2024. 4. 17. 07:11

[성공한 세습 독재의 평화적 이양] 

[말레이지아 재발견]

[말련(馬聯)]

 

 

 

성공한 세습 독재의 평화적 이양

 

말레이 반도 끝에 붙어있던 가난한 섬나라 싱가포르가 말레이연방에서 1965년 쫓겨났을 때 이 나라 미래는 끝난 듯했다. 변변한 자원도 없었다. 식량과 물도 부족해 말레이시아에 의지해야 했다. 그런 나라를 청년 리콴유가 떠맡았다. 1959년 36세로 집권해 31년간 통치하며 물고기잡이로 살던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을 400달러에서 1만2700달러까지 끌어올렸다.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잘살게 만든 비결로 ‘공포의 효능’을 꼽은 적이 있다. 일본 식민지 시절, 범죄자가 교수형 등 엄벌을 받는 걸 보며 “국가를 다스리고 사람을 지배하는 다양한 방식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나태한 국민을 채찍으로 일으켜 세우는 ‘엄한 아버지’ 리더십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마약 사범은 처형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 자는 태형으로 다스렸다. 굵기 1.27㎝ 회초리는 석 대만 맞아도 살이 터지고 유혈이 낭자해진다.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선고한 매질 횟수는 다 채우는 철저한 법 집행으로 국민 뇌리에 준법 의식을 심었다.

 

▶장남 리셴룽 총리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는 국제 금융 지수 3위, 인적 자원 경쟁력 2위 등 모든 국가 경쟁력 지표를 세계 최상위로 올려놓았다. 법인세를 줄이고 상속세를 없애 사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 세계적 기업이 몰려들었다. 2022년 1인당 GDP 8만달러를 돌파해 아버지 때보다 6배 넘게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다. 문화 인프라도 약진했다. 한국에선 7만명을 수용할 공연장이 없어서 무산된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 아시아 투어를 올해 초 유치해 동남아 전역의 팬을 불러 모았다.

 

▶성공의 빛이 밝은 만큼 그림자도 짙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잘사는 북한’ ‘사형 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라는 말을 듣는다. 집회·시위·언론의 자유가 없다. 엄벌주의에 대한 불만도 높다. 집권 인민행동당의 인기도 전만 못하다. 2020년 총선에선 처음으로 야당에 두 자릿수 의석인 10석을 내줬다. 갤럽의 국민 행복도 조사에선 세계 148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국민이 변화를 원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리셴룽 총리가 20년 집권을 끝내고 다음 달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아버지의 31년 통치를 더하면 51년간 나라를 번영시킨 ‘리콴유 가문 통치’를 스스로 끝내는 것이다. 세습 독재가 성공하는 것도, 그 독재가 정변 없이 물러나는 것도 유례가 드물다. 리콴유는 생전에 “인생의 마지막 날 내가 갖고 싶은 것은 싱가포르의 성공”이라고 했다. 물질적 풍요에 이어 정치 민주화에도 성공하기를 하늘에서도 바라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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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재발견


20년 전 동아시아에 외환 위기 폭풍이 불어닥쳤을 때 한국은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를 받아들여 혹독한 계절을 보냈다. 말레이시아는 정반대였다. 구조조정은 커녕 자본시장 문을 걸어 잠그고 IMF 권고와 거꾸로 갔다. 무모하다는 걱정이 많았지만 말레이시아는 외환 위기 방어에 훌륭하게 성공했다. 국가 자존심도 세우고 위기도 막아 환란(換亂) 사태의 최대 수혜국이 됐다. 간단치 않은 국가 저력이었다.

당시 미국식 자본주의에 독설을 퍼부으며 투기 자본과의 전쟁을 지휘한 것이 마하티르 총리였다. 영국식 교육을 받은 그는 20여년간 총리를 지내며 말레이시아의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말레이시아뿐 아니다. 동남아 국가의 지도층은 대체로 선진국을 제대로 배운 엘리트이다. 싱가포르의 국부(
國父) 리콴유는 런던정경대학을 거쳤고, 그의 아들 리셴룽 현 총리도 케임브리지를 나왔다. 과거엔 영국 유학파가 주류였지만 요즘은 미국·호주 유학도 많이 간다고 한다


 

영국·네덜란드 등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에는 유럽식 엘리트주의 전통이 여전하다. 인도네시아 주재 대사를 지낸 한 외교관은 "동남아 엘리트 수준은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했다. 그들과 대화해보면 국제 정세를 보는 식견과 해박한 지식에 놀란다는 것이다. 특히 ·중 양극 체제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취하면서 다()차원으로 대응하는 동남아식 외교술은 국제정치학의 연구 대상이다. 국가 발전은 늦었지만 이런 엘리트 계층이 나라를 움직여가는 것이 사실이다.

김정남 독살 사건에 접근해가는 말레이시아 경찰의 능력과 태도가 눈길을 끌고 있다. 처음엔 제대로 수사가 될까 걱정도 많았지만 차근차근 증거를 찾아내고 용의자를 식별해 결국 북한 소행임을 밝히는 데 성공했다. 특히 경찰청장의 깔끔한 브리핑이 화제에 올랐다. 끊을 것은 분명하게 끊고 밝힐 것은 밝혔다. 외신기자들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다. 국내 인터넷에서도 "한국 경찰보다 낫다"는 반응이 많이 나온다. 말레이시아 재발견, 동남아 재인식이다.

▶1970년대 초까지 동남아 국가들은 우리보다 앞서갔다. 태국에 유학 가고, 필리핀 막사이사이상을 받는 것이 영예로 꼽혔다. 경제가 역전되면서 언제부턴가 동남아를 한 수 아래로 보는 풍조가 생겨났다. 동남아 노동자들을 무시하고 어글리 코리안 관광으로 물의 빚기 일쑤다. 반면 일본은 아세안 중시 전략을 버리지 않고 동남아에 확실한 네트워크를 구축해왔다. 그 힘이 일본 언론의 이번 사건 취재에서도 드러났다. 구미(
歐美)와 중·일에 편중된 세계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박정훈 논설위원, 조선일보(17-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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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련(馬聯)

 

나라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메르데카컵 축구 대회'..


1981년 취임한 말레이시아 4대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맛의 꿈은 원대했다. '비전 2020.' 40년 후를 내다본 야심 찬 국가 전략을 세웠다. 그 핵심 사업이 신공항 건설이었다. 1998년 완공된 쿠알라룸푸르(KL) 공항은 단순한 비행기 터미널이 아니다. 말레이시아인들의 미래 염원을 담은 건축물이다. 1996년 기초 공사가 한창이던 이곳을 취재한 후 4년 만에 다시 들렀다가 첨단 시스템에 놀란 기억이 난다. 이 나라의 자존심 같은 바로 이곳 KL공항에서 북한 김정은의 이복(異腹)형 김정남이 독살당했다.
 

 

▶말레이시아는 우리나라 중장년층에는 '말련(馬聯)'이라는 약어로 친숙하다. 이 나라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메르데카컵 축구 대회' 1960~70년대 현장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중계되면서 우리에겐 친근한 나라가 됐다. 2000년대 중반 노무현 정부가 수도를 이전하려고 할 때는 말련의 행정 도시 푸트라자야가 주목받았다. 상당수 공무원, 연구원이 푸트라자야 방문을 위해 KL행 비행기에 올랐다.

 

 

▶말레이시아는 국교인 이슬람과 비동맹 외교의 영향으로 독자 노선을 강조해왔다. 마하티르는 한국과 일본의 경제 발전을 본받아야 한다는 동방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미국에 대해선 비판적이었다. 그는 "서구의 가치관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말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시아 외환 위기 때도 이 나라는 우리와는 정반대 길을 선택, 국제통화기금(IMF) 처방을 거부했다. 

 

▶이런 전통 때문일까. 말레이시아는 우리보다 13년 늦은 1973년 북한과 수교했지만 평양과도 꾸준히 관계를 발전시켜왔다. 북한 사람도 무비자 입국하도록 함으로써 거점 공관 역할을 하게 했다. 1994년 제네바 미·북 합의 후 양측 협상이 KL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 외교부를 출입했던 중견 기자들은 'KL 북대(북한 대사관) 뻗치기' 취재를 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 1997년 우리 국정원 출신이 이곳 대사로 나간 데도 이런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가 지금 이병호 국정원장이다. 

 

▶말레이시아 부총리가 김정남 독살 사건 수사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신을 북한에 인도하겠다는 방침부터 밝혔다. 이 나라가 견지해 온 독자 노선과 비교적 끈끈한 북한 유대 관계가 그 배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정남 피살은 훗날 한반도 정세의 변곡점이었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는 사건이다. 치열한 외교전이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외교력은 지금 변두리를 돌고 있는 것만 같다. 나라 사정이 이래서인가. 

 

-이하원 논설위원, 조선일보(17-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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