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자 200명 넘은 LG 의인상]
[풍수·사주로 풀어본 故 신격호 회장 일생]
['마지막 거인' 신격호]
[기업 보국(企業報國)]
['93세 청년' 신격호의 83兆 구멍가게]
수상자 200명 넘은 LG 의인상
2015년 1월 경기도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에 시민 여럿이 갇히자 한 남자가 밧줄을 타고 내려가 불길 속에서 열 명을 구해냈다. 사람들은 ‘동아줄 의인‘이라고 했다. 뉴스를 보고 감동한 생전의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개인적으로 돈을 보냈지만 의인은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구 회장은 이런 의인을 공적으로 포상하고 사회적으로도 ‘선행의 선순환’ 기풍을 진작하고 싶었다. ‘LG 의인상’이 그렇게 시작됐다.
▶그해 9월 나온 첫 수상자는 교통사고로 다친 이를 길에서 보고 응급처치하다가 자신도 트럭에 치여 사망한 특전사 소속 정연승 상사였다. 평소 장애인 시설과 양로원을 찾아 다니며 목욕과 청소 봉사를 하고 소년소녀가장을 도운 사실이 알려지며 의인상을 받았다. 그다음 달엔 정년을 앞두고 순직한 경찰관이, 12월엔 화재 현장에서 쓰러진 소방관이 받았다. 군인·경찰·소방관의 잇단 수상은 ‘제복 입은 이’들의 헌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숨어서 의를 행하거나 위급한 현장에 용감하게 뛰어든 시민들에게도 감사를 전했다. 창원에서 50년 넘게 예식장을 운영하며 형편 어려운 1만4000쌍에게 무료 결혼식을 지원한 백낙삼씨, 50년 넘게 김밥을 팔아 모은 전 재산 6억원을 어려운 이웃에 쓰라며 기부한 박춘자 할머니가 그들이다. 신장 투석 병원 간호사 현은경씨는 화재가 나자 마지막까지 남아 환자를 대피시키다가 쓰러지는 모습이 병원 CCTV에 찍혔다. 그 숭고한 희생도 기렸다.
▶기업이 시민의 선행을 포상하는 대표적인 상으로 자리 잡은 LG 의인상이 198~201번째 수상자를 배출하며 8년 만에 200명을 돌파했다. 많은 의인이 수상에 그치지 않고 또다른 가슴 훈훈한 사연을 피워냈다. 25년간 헌혈하고 헌혈증까지 백혈병 어린이에게 모두 기부한 권재준 경위는 그 사실이 알려져 받은 상금까지 소아암과 혈액암을 앓는 이들 치료비로 기부했다. 수상자 5명 중 한 명이 상금을 다시 세상에 내놨다.
▶구 전 회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희생한 의인에게 기업이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LG뿐 아니다. SK는 “나라의 미래는 인재 양성에 달렸다”는 고(故) 최종현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50년 넘게 장학퀴즈를 지원하는 등 인재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삼성은 이건희 전 회장이 평생 모은 미술품을 그의 타계 후 ‘국민 컬렉션’으로 사회에 기증했다. 금호문화재단은 손열음 조성진 임윤찬을 키워냈다. 좋은 물건 만들어 파는 것을 넘어 기업의 힘으로 사회와 국가에 기여한다는 ‘기업보국(企業報國)’이 이런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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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사주로 풀어본 故 신격호 회장 일생
신격호 회장 사주엔 五金이
고향 땅 양지바른 곳에 소박하게 꾸민 롯데 창업주 신격호 회장의 묘.
지난 1월 19일 롯데 창업주 신격호(1921~2020) 회장이 100세 나이로 별세했다. 국내 5대 그룹 창업주들 가운데 마지막이자 최장수 인물이었다. 다른 창업주들은 선대에서 물려받은 재산으로 출발하였거나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반면 신 회장은 일본롯데를 일으킨 자수성가형이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투자 요청을 받고 일본 자금을 들여와 한국의 롯데그룹을 일구었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내고, 작은 부자는 근면함에 있다(大富由天 小富由勤)"고 '명심보감'은 말한다. 주자(朱子) 같은 성현도 사주와 풍수를 신봉하여 "부귀영달은 탐내고 원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일대기를 추적하다 보니, 신 회장은 분명 하늘이 낸 인물이다. 하늘이 어떻게 신 회장을 대부(大富)로 만들었는지 풍수와 사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생가 터 일대가 풍수상 '신령스러운 거북이 물을 마시는 형국[靈龜飮水形]'의 길지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그 마을이나 그 집에서 신 회장만 태어난 것은 아니다. 또 터만 가지고 100세라는 최장수를 설명하기도 어렵다. 왜 그만이 한·일 양국에서 우뚝 선 큰 부자가 되었을까? 이러한 곤란함을 술사들은 사주로 빠져나간다. 한 사람의 성공에는 풍수보다 명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一命, 二運, 三風水'라는 격언이 있다. 첫째는 타고난 명(命), 둘째는 타이밍[運], 그리고 셋째가 풍수라는 것이다.
그의 사주는 아직까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필자는 우연히 신 회장 사주를 볼 수 있었다. 사주 여덟 글자[팔자] 가운데 신 회장을 상징하는 생일의 천간[日干]은 경(庚)이다. 경(庚)은 광산에서 캐낸 원철[金]로 순수하면서도 힘이 세다. 위기를 모면하는 임기응변의 재주가 탁월하다. 난세의 영웅 사주로, 자기를 격하하는 말을 들을라치면 무섭게 돌변하기도 한다.
팔자의 오행 구성을 보면, 자신을 상징하는 경(庚)을 포함하여 금(金)이 다섯 개다. 팔자에 금이 하나인 것을 금(金·황금)이라 한다. 금이 두 개인 것을 병(鍂·황금으로 만든 귀한 악기)이라 한다. 금이 세 개인 것을 흠(鑫·황금이 많아 크게 기쁨)이라 하고, 금이 네 개인 것을 보(?·황금이 아주 많음)라 하고, 금이 다섯 개인 것을 만(鏋·황금이 가득 참)이라 한다.
청나라 황제로서 장수(89세)를 누린 건륭제의 사주 구조 및 내용과 흡사하다. 10여 차례 정복 사업을 펼쳐 중국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인물이다. 건륭제가 무력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면, 신 회장은 상품으로 시장을 정복하였다. 두 사람의 본질적 차이는 무엇일까?
별세 후 고향에 조성된 그의 무덤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생전 고향을 그리워하여 그곳 양지바른 언덕에 묻히는 것이 고인의 뜻이었다. 천 리를 달리던 말이 안장을 벗어 놓고 편히 쉬는 주마탈안형(走馬脫鞍形)이다. 무덤은 가로·세로 5m 안팎의 좁은 묘역에 일반인 봉분 높이 절반도 안 된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 묘역의 규모나 화려함의 20분의 1도 안 된다. 무덤의 소박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정자(程子)는 주역 겸괘(謙卦)를 "크게 소유하면[大有] 가득 채워서는 안 되고 반드시 겸손함과 덜어냄[謙損]에 있음"이라고 풀이하였다. 신 회장의 뜻이 바로 겸괘에 있다. 그래서 군자가 아름다운 마침을 얻을 것이다[君子有終]. 군자의 죽음을 종(終), 소인의 죽음을 사(死)라고 한다. 종(終)은 시작[始]을, 사(死)는 소멸을 전제한다. 종(終)은 부활을 의미한다. 그의 무덤은 겸괘의 종(終)을 구현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조선일보(20-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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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거인' 신격호
청년 신격호는 '문청(문학청년)'이었다. 일제 말 고향 울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것도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젊은 시절 그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빠졌다. 롯데라는 사명(社名)도 베르테르의 연인 '샤롯테'에서 따와 지었다. 롯데월드타워 앞에 괴테 동상까지 세울 정도였다. 그는 롯데 브랜드를 만든 것이 "내 일생일대 최고의 선택"이라고 했다.
▶그의 청년 시절은 낭만주의로 채색돼 있지만 23세 때 창업한 후로는 '꼼꼼함'을 트레이드 마크로 달고 다녔다. "23개 전 계열사에서 생산되는 1만5000가지 제품의 특성과 생산자·소비자 가격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롯데호텔을 지을 땐 세계 유명 호텔을 다 다녀본 뒤 카펫과 벽지 색깔까지 지정할 만큼 일일이 다 챙겼다. 백화점에 나가면 매장 진열 상태부터 나사못 하나까지 지적해 임직원들 혼쭐을 빼놓기 일쑤였다. '거인'이란 말을 좋아해 야구 구단 이름도 '자이언츠'로 지었지만 경영 스타일은 한없이 세심했다.
▶그는 일본에서 번 돈을 외교행낭에 숨겨 들여와 46세 때 한국에 롯데제과를 세웠다. 고국 진출 당시 신문 광고까지 내고는 "조국을 장시간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툰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된다"면서도 성심성의를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약속은 투자로 실행됐다. 호텔·백화점·음료·레저업에 속속 투자하며 롯데를 5대 그룹으로 키웠다. 그 마지막 결정체가 123층짜리 서울의 랜드마크 롯데월드타워였다. 디자인을 23번이나 바꿔가며 입지에서 설계·시공까지 직접 챙겼고, 완공 후엔 한동안 49층 레지던스에서 말년을 보냈다.
▶경영인으로서 그의 원점은 일본이었다. 한국 진출 이후 40여년간 홀수 달은 한국, 짝수 달은 일본을 오가는 '셔틀 경영'을 계속했다. 일본에서 축적한 자본과 경영 노하우를 가져왔지만 한국에서 더 큰 경영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롯데를 매출 기준으론 일본롯데의 20배, 종업원은 30배로 키웠다. 그는 한국에서 번 돈은 모두 한국에 재투자하겠다 약속했고 평생 지켰다.
▶1921년생 신 회장이 영면했다. 이병철(1910년생) 정주영(1915년생)에 이어 1세대 기업인 최후의 생존자였다. 기업의 목표는 '이윤 극대화'라 하지만 우리 1세대 창업주들은 '기업 보국(報國)' 정신으로 무장한 산업 전사(戰士)들이었다. 애국심을 기반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사업에 뛰어들어 성장의 기회를 찾았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마지막 거인이 퇴장했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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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보국(企業報國)
사익과 공익은 충돌하기 마련이다. 기업(企業)과 보국(報國)의 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보이지만, 어느 차원에 들어가면 서로 만나게 된다. 그 어느 차원은 무엇인가? 사익이 극대화되면 공익의 차원으로 진입하게 되는 시점이 있다. 돈이 너무 많아지면 자기 돈이 아닌 것이다. 기업도 커지면 보국을 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대립하는 명제 같지만, 깊이 들어가면 맞닿게 되어 있다. 의상대사가 당신의 박사 논문인 '법성게(法性偈)'에서 이러한 이치를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이라고 설파했다. '진리의 세계(理)와 현실의 세계(事)가 둘인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어두컴컴해서(冥然) 분별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만석꾼 부자인 경주 최 부자 집도 기업 보국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 만석꾼은 수많은 소작농을 거느리고 있으므로 기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 '흉년에 땅 사지 않는다', '벼슬은 진사 이상 하지 않는다.' 이는 자기 집안을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지키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처신이면서 동시에 주변 공동체를 배려하는 보국의 철학이었다. 경상도 남인이었던 최 부자가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집권하고 있던 노론 정권에 돈 뺏기고 몸 뺏기는 고초를 당하였을 것이다.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재벌이 인촌 김성수이다. 최근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주대환)를 읽어보니까 인촌은 빨갱이 소리를 듣던 죽산 조봉암을 끝까지 포용하였다고 나온다. 죽산은 토지개혁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이북의 토지개혁은 지주의 땅을 빼앗아 국가가 소유권을 갖는 것이었지만, 남한의 토지개혁은 소작농에게 싼값에 토지를 분배해주는 것이었으므로 그 파급 효과는 남한이 더 컸다. 남한 최고의 재벌이었던 인촌이 '지주 땅을 뺏어서 소작농에게 나눠주었던' 죽산을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당에 합류시켰다는 점은 놀랍다. 고려대학교, 동아일보, 경성방직도 일제시대라는 제한된 여건 속에서 인촌이 행한 기업 보국의 사례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기업 보국'이라는 말을 처음 제조한 인물은 삼성의 창업자였던 호암 이병철이다. 삼성이 이 타이밍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조용헌, 조선일보(1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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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세 청년' 신격호의 83兆 구멍가게
70년 묵은 오너 경영이 만든 내부 견제 없고 순환 출자 얽힌 '매출 83조'
구멍가게의 內戰 '막장의 끝'은 어디일까
1941년 봄, 종축장에서 일하던 19세의 청년 신격호는 일본 시모노세키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에 몸을 싣고 현해탄을 건넜다. 수중에 쥔 것이라고는 면 서기 두 달치 봉급 83엔이 전부였다. 갖은 고생 끝에 와세다고등공업학교(지금의 와세다대) 야간부 화학과에 진학한 그에게 한 일본인이 선반용 오일을 만드는 사업을 해보라며 자금을 빌려줬다. 이 계기로 사업가가 된 청년은 패전의 상흔이 짙은 일본 땅에서 미군이 던져주던 달콤한 추잉껌을 보고는 껌을 만들기 시작했다. 1948년 일본에 세워진 롯데제과는 껌, 과자, 초콜릿을 성공시키며 일본 제과업계 신성(新星)으로 떠올랐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양국을 오가는 문이 열리자 한국에도 롯데제과를 세웠다.
1973년 4월 26일자 조선일보 2면에는 '반도호텔-구(舊)아서원-국립도서관 대지에 日 롯데서 대규모 호텔'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큼직하게 실렸다. '일본 롯데주식회사가 4800만달러의 투자·차관 자금으로 36층짜리 호텔을 짓는 외자 도입안을 승인한다'는 뉴스였다. 나라 전체에 외자 한 푼이 아쉬웠던 시절 박정희 정부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했어도 외국에 10년 이상 영주하면 외국인 대우를 해준다'는 법 조항을 만들고 신격호를 비롯해 재일교포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팔 걷고 나섰다. 특별 대접을 받으며 호텔 산업에 진출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세계적 호텔을 짓는다는 건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1970년대 오일 쇼크로 롯데호텔 투자비는 당초의 3배 가까운 금액(1억4500만달러)이 들었다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와 맞먹는다. 그래도 투자를 포기하지 않은 건 가난한 조국을 더 낫게 만들고 싶어 돌아온 기업 보국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70여년 전 83엔을 손에 쥐고 떠난 청년이 83조원 매출을 올리는 한국 5위의 재벌그룹 총수가 되기까지 얼마나 열정과 끈기가 남달랐는지 일화는 숱하다. 90 넘어서도 매일 계열사와 현장을 챙겼다. 오랫동안 지켜봐 온 이인원 롯데그룹 부회장은 그를 "아흔 나이에도 꿈꾸는 청년"이라고 표현했다. "회장님께 좀 쉬셔야 한다고 하면 대답은 한결같다. '나는 24시간 생각해. 꿈을 꾸고 설계를 하는 거야. 뭐든지 하고 싶어서 못 견디겠다는 거야.'"
일에만 열심이지 말수도 조용해 언론 인터뷰도 잘 안 했던 그가 어쩌다 짙은 분장에도 숨길 수 없는 쇠잔한 얼굴로 TV 화면에 등장해 떠듬떠듬 "롯데는 내가 70년 동안 일궈 왔다"고 말하는 초라한 신세가 됐을까. 일본 미쓰이물산 전략연구소는 롯데의 성공과 약점을 이렇게 분석했다. '일본과 한국 양쪽에 기반을 두고 양국 간 경제 격차를 활용해 기업을 성장시켜 왔다. 그러나 지주회사나 그룹의 의사 결정을 하는 공식 구조가 구축돼 있지 않다.'
오늘의 롯데를 키운 것도, 작금의 롯데 막장극도 공룡처럼 커진 그룹을 창업자 혼자 70년 전 열정, 30년 전 꿈으로 끌어오는 데 익숙해온 '오너 1인 경영'의 명암이다. 두 아들 싸움에 친·인척까지 등장한 '롯데 활극'은 막장 드라마 한 편 본 셈 치면 된다. 문제는 이참에 들여다본 롯데그룹의 민 낯이 불투명하고, 주먹구구식 경영이 판치는 '83조원짜리 구멍가게'라는 데 있다. 그건 롯데가(家)의 문제가 아니라 몸담은 18만명 직원과 그 가족들, 수만개 협력업체에 영향 미치는 사회적 사안이다.
93세에도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달려나가는 창업자에 대해 "시대가 달라졌다" "그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내부 견제 장치라고는 없는 지배 구조, 무려 400개 넘게 꼬이고 꼬인 계열사 간 순환 출자, 총수는 100만원 단위까지 꼼꼼히 살피고 검소하다지만 직원들 월급까지 지나치게 검소해 협력업체에 도 넘은 갑질 횡포와 금품 유혹을 종종 드러내는 후진적 기업 이미지가 오늘의 롯데그룹이다.
고령화를 연구해온 아툴 가완디 하버드의대 교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가르쳐 준 건 굴하지 않는 인내와 끈기였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아버지가 삶의 마지막 여정을 걷는 걸 지켜보면서는 한계를 극복하는 용기보다 더 어려운 게 바로 직면한 한계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려놓는 용기임을 알게 됐다"고 했다.
남다르게 역경을 극복한 인물일수록 자신의 한계와 나이 듦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신격호 회장은 입버릇처럼 "내 남은 꿈은 한국에 세계 최고의 제2롯데월드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도 휠체어 탄 몸으로 123층짜리 제2롯데월드 공사 현장을 찾았다. 만약 그가 123층 건물을 짓겠다는 30년 꿈에 집착하는 대신 30년 전부터 '포스트 신격호'에 대신 꿈꾸어 줄 123명 후계자군을 키우겠다는 포부로 회사 경영과 지배 구조를 선진화했더라면 롯데그룹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집안의 진흙탕 싸움에 '83조원짜리 구멍가게'를 움켜쥔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해 남달랐던 애국심과 경영 성과마저 송두리째 폄하되는 상황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큰 구멍가게가 얼마나 투명하고 선진화된 기업군으로 변신할지는 우리 사회 전체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내야 할 롯데그룹의 최대 숙제임에 분명하다.
-강경희 경제부장, 조선일보(15-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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