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명 구하려 문 부순 소방관들이 배상 걱정해서야]
[퇴직 공무원 수명, 소방관 가장 짧고 판검사 가장 길다]
[일흔 아홉번의 절규 "빨리"]
인명 구하려 문 부순 소방관들이 배상 걱정해서야
광주의 한 소방서가 한 달 전 빌라 화재로 뒤탈을 겪고 있다. 화재 직후만 해도 신속한 조치로 인명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평가받았던 사건이다. 불이 난 시간은 오전 3시경이었다. 2층 주인집에서 시작된 불이 4층 빌라 전체로 번졌다. 소방관들이 한 집씩 문을 두드리며 주민들을 대피시키는데 여섯 집에서 응답이 없었다. 새벽이라 깊이 잠들어 있거나 연기에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불길이 빠르게 퍼지고 있어 지체할 새가 없었다. 소방관들은 여섯 집의 현관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갔다.
▷소방관들의 대응은 칭찬할 만했지만 현관문 수리비를 누가 부담할지를 놓고 문제가 생겼다. 통상 화재 진압 중 발생한 피해는 건물주가 든 화재보험으로 배상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화재로 사망한 건물주는 보험에 들지 않았다. 소방서가 가입한 행정배상보험이란 것도 있는데 소방관의 과실로 손실이 생겼을 때만 적용된다. 이번처럼 적절한 조치로 인한 피해는 보험 처리가 안 된다.
▷소방 활동은 불가피하게 재산 피해를 수반한다. 소방관들이 아파트 베란다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유리창을 깨거나, 유리 파편이 떨어져 주차된 차량을 파손하기도 한다. 나무 위 벌집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에 사다리를 타고 화염방사기를 쏘다가 나무에 불이 옮겨붙자 비싼 나무를 망쳐놨다며 배상을 요구받는 일도 있다.
▷소방관들의 민·형사 책임을 면제해주는 법이 몇 년 전 생기긴 했다. 하지만 피해가 불가피했음을 소방관이 입증해야 하고,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주민들 민원이 계속돼 십시일반 돈을 걷어 배상하는 일이 아직도 적지 않다. 일부 소방관들은 열쇠 전문가를 초빙해 문을 부수지 않고 개방하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소방차 진입을 막는 불법 주정차 차량에 대해선 파손해도 면책되는 법이 도입되긴 했지만 이 역시 차주들 민원과 소송 부담으로 집행 사례가 거의 없다.
▷빌라 화재 현관문 수리비 500여만 원은 소방 예산을 대는 광주시가 물어줄 방침이라고 한다.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 것이냐”는 비판도 있지만 세입자들 역시 사정이 넉넉지 않고 화재 발생에 전혀 책임이 없는 이들이다. 소방관과 주민의 문제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어느 쪽도 피해 보지 않도록 시스템을 촘촘히 만들어야 할 책임이 국가에 있다.
▷억울하게 책임을 지게 된 소방관들은 마치 근로자가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보호받지 못할 때 겪는 심리와 유사한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 소방관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몇 초 차이로 생사가 엇갈리는 현장에서 소방관들이 문을 강제로 열어도 될지, 불법 주정차 차량을 밀고 가도 될지 망설인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의 몫이다. 걱정 없이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더 많은 소방 영웅들이 나올 수 있다.
-신광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5-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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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공무원 수명, 소방관 가장 짧고 판검사 가장 길다
정상적으로 은퇴한 공무원 가운데 평균 사망 연령이 가장 낮은 직군은 소방직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평균 74.7세다. 가장 높은 판검사 직종의 82.4세보다 8년 가까이 먼저 세상을 떴다. 매년 연말이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화상 환자를 지원하기 위해 발매되는 ‘몸짱 소방관’ 달력에서 소방관은 젊음과 활력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흘러 은퇴한 소방관들은 다른 공무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셈이다.
▷공무원연금공단 자료를 보면 주요 9개 직군 가운데서도 소방직이 유독 사망 연령이 낮다. 판검사에 이어 지도직(81.7세) 교육직(81.6세) 기능직(79.3세) 연구직(79.1세) 경찰(78.8세) 일반직(78.3세) 공안직(78.1세)은 모두 78세 이상이다. 평균치인 79.7세와는 5년의 격차가 난다. 이 수치는 공무원연금 수급자 중 사망자의 평균 연령이어서 전체 평균 수명과 꼭 일치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방관이 더 빨리 세상을 떠난다는 경향성은 분명히 보여준다.
▷소방관의 수명이 짧은 건 수백 도의 뜨거운 열기와 매캐한 연기가 난무하는 극한의 화재 현장과 무관치 않다. 인명 구조를 위해 건물에 들어갔다가 추락하거나 구조물이 붕괴될 위험도 크다. 소방관들은 “화재 현장에서 불에 데고 부상을 입는 건 다반사”라고 덤덤히 얘기한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유독가스와 유해 화학물질도 소방관을 괴롭힌다. 이 같은 유독물질로 호흡기나 피부 질환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이고 장기적으론 암 같은 중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그 인과관계를 입증해 공상 처리를 받는 것은 쉽지 않다.
▷더 심각한 건 정신적 충격이다. 화마 속에서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는 긴장감은 무엇과도 비할 바가 아니다. 여기에 자신의 삶도 온전할 수 없다는 두려움, 인명을 구하지 못한 자책감, 동료들의 사고 등으로 인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노출될 확률이 크다. 24시간 주야 교대근무로 인한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최근 10년간 자살한 소방관 수는 순직자의 3배에 달할 정도다. 전문 심리 상담이 필수지만 해당 인력은 소방관 600여 명당 1명꼴로 사실상 방치되는 수준이다.
▷밤새 화재 진압을 한 뒤 검게 그을린 얼굴을 닦지도 못하고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는 소방관의 모습이 인상적인 건 그 안에 그들의 애환이 모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인력 부족과 열악한 처우 속에서도 하루 평균 100여 건에 달하는 크고 작은 화재 대응은 물론이고 응급환자 이송, 위험에 빠진 시민 구출, 벌집 제거 등 생활 속의 온갖 긴급 민원을 묵묵히 처리한다. 그래서 공무원 가운데 국민들로부터 가장 욕먹지 않는 직군으로 꼽힌다. 은퇴 후라도 더 오래 안락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서정보 논설위원, 동아일보(2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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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아홉번의 절규 "빨리"
30년 이상 된 얘기다. 사건 취재를 하던 시절인데 서울 후암동 어느 업소에서 불이 나 여럿이 죽었다. 현장 소방관 얘기를 들으니 죽은 사람들이 출입구에서 2~3m 떨어진 곳에 몰려 있었다. 정신만 차렸으면 살 수 있었을 목숨들이었다. 공황(恐慌) 상태에 빠진 것이다. 우레탄폼이 탈 때는 유대인 학살 때 썼다는 염화수소 독가스가 나온다. 한 모금만 마시면 해머로 몸통을 치는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제천 참사 희생자들도 대부분 유독가스에 숨졌다.
▶스포츠센터 2층 여탕에 갇혔던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119에 구조 요청을 했던 녹취록이 공개됐다. 차마 읽어내려갈 수 없었다. 어떤 이는 "빨리"라는 말을 79차례 외쳤다. "빨리요 빨리", "사람 다 죽어 빨리빨리" … "창문 열어, 2층이야 2층"이라고도 했다. "숨 못 쉬어" "나 살아야 돼. 아저씨 빨리 살려줘"라는 울부짖음도 있었다. 그걸 듣고 119 상황실은 현장 소방관들에게 무전으로 "빨리 2층으로 향하라"고 지시했다. 그 뒤로도 "2층 여탕에 사람들이 갇혀 있다'는 신고가 5차례 119로 접수됐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20명이 숨졌다.
▶알려진 것과 달리 2층 사망자 중 11명은 여탕 자동 출입문 밖에서 발견됐다. 문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화염과 유독가스에 막힌 것이다. 30여년 전 봤던 화재 현장과 비슷한 상황이었을 수 있다. 건물 밖으로 먼저 탈출한 사람들은 '2층에 여자들이 있다'는 얘기를 외치고 다녔다. 그러나 소방관들은 우왕좌왕했다. 2층 유리창을 깬 것은 현장 출동 43분 지나서였다. 숨진 장모씨는 먼저 바깥으로 나간 남편과 2층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17분간 통화했다고 한다. 그 통화 내용은 어땠을까.
▶소방관은 맨 처음 6명이 도착했는데 3명은 가스통에 매달렸다. 구조 전문 인력은 뒤늦게 도착했다. 소방관들은 제천에서 제일 높은 상업용 건물이라는 스포츠센터 건물 도면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 CCTV를 보면 2층 여탕 상황도 몰랐던 듯하다. 119 신고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목격자·탈출자들 얘기도 흘려들었던 것이다.
▶소방관들 고생하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시도 때도 없이 출동하고, 죽을 고비도 넘긴다. 희생자들의 '살려달라'는 환청에 시달리는 소방관도 많다고 한다. 소방관 5%가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소방관들 평균 수명은 69세밖에 안 된다. 제천 참사 유족들도 "소방관들 탓하고 싶지는 않다"고들 얘기하고 있다. 그래도 소방관들이 반성해야 하고 무엇보다 실전 훈련을 늘려야 한다.
-한삼희 수석논설위원, 조선일보(17-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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