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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복지부동’이 대통령 단임제 때문일까] ....

뚝섬 2024. 1. 15. 11:21

[공무원 ‘복지부동’이 대통령 단임제 때문일까]

[官街에 '미래'가 사라졌다]

[ '자아비판' 시대]

 

 

 

공무원 ‘복지부동’이 대통령 단임제 때문일까

 

[천광암 칼럼]

지금의 ‘공무원 보신주의’ 가장 큰 원인은
대통령제-내각제 등 ‘政體’ 아닌
매번 반복되는 전 정권 비리 털기
‘직권남용죄’ 남용 여부도 숙고해봐야

 

윤석열 대통령이 8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보신주의에 빠진 관료주의 시스템에 대한 혁신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대통령 단임제에선 정부가 5년마다 바뀌니 공무원이 적당히 시간만 끌며 움직이지 않는다. 차라리 내각제에선 정치세력 교체와 상관없이 차관 중심으로 관료주의가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나왔다고 한다.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윤 대통령 생각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대통령실이나 내각에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되는 현실에서, 잘못된 처방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사실관계는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차관 중심 관료주의’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내각제 국가는 일본이다. 표면상 각 부처(일본식으로는 성청·省廳)의 장관은 여당 의원이 맡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사권을 장악하고 각 부처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장관이 아니라 내부 관료 출신의 사무차관인 경우가 많았다. 사무차관을 정점으로 한 관료집단의 힘이 워낙 세다 보니 일본은 ‘의원내각제가 아니라 관료내각제 국가’라는 개탄이 나왔을 정도다.

 

이런 시스템의 장점이 주목을 받은 시기도 한때 있었다. 변덕스러운 정치 외풍을 차단함으로써 행정의 일관성을 높였고 공무원의 전문성을 키우는 데도 기여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부처 이기주의와 칸막이 행정 같은 부작용이 순기능을 압도하면서, 관료집단은 가장 시급한 개혁 대상 중의 하나로 꼽히게 됐다.

이에 따라 나온 대표적인 조치가 2014년 내각인사국 설치다. 각 부처별로 관료집단이 틀어쥐고 있던 고위공무원 인사권을 총리와 내각의 수중으로 가져간 것. 이를 통해 개혁으로 첫발은 뗐다고 하지만 ‘망국론’까지 나오는 관료주의의 근본적인 병폐를 수술하기까지는 갈 길이 먼 상황이다.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내각제라고 해서 관료주의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단임제 여부도 마찬가지다. 임기 말이라면 모르겠지만 임기가 3년도 넘게 남은 정권에서 단임제, 중임제 따져가면서 일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공무원이 어디 있겠는가. 원인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관료사회의 보신주의와 무사안일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최근의 양상을 보면 문재인 정부 초기와 특히 비슷한 측면이 많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거의 전 부처에 적폐청산TF를 꾸려 대대적인 사정 몰이를 했다. 그 과정에서 실무자급 공무원들까지 조사 대상이 되고 심한 경우 징계나 수사 의뢰 대상이 됐다. 그러다 보니 다음 정권에서 책잡힐 일은 하지 말자’는 보신주의가 급속히 확산됐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비슷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해 공무원 피살’ ‘통계 조작’ ‘태양광 비리’ ‘월성원전 폐쇄 결정’ 등에 대한 전방위 수사와 감사가 진행 중이다. 이런 일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데, 어떤 공무원이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명백한 비리나 부정에 대해 눈을 감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4대강 감사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4번, 5번까지 이뤄지는 식의 감사는 공직사회를 움츠러들게 할 뿐 어떤 공감도 얻어내기 어렵다. 정책 판단의 영역까지 사법의 잣대로 재단하려 한다는 논란의 소지를 남기는 것도 공직사회의 복지부동을 더 고질화시킬 뿐이다. 특히 현 정부와 전 정부를 가리지 않고 ‘직권남용죄’를 적용해서 공직자들을 수사하거나 기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숙고해 볼 여지가 많다.

일본에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직권남용죄가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공무원이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뇌물이나 횡령과는 달리 추상적인 범죄여서, 주관이 개입할 소지가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 검찰은 2017∼2021년 5년간 고소·고발이나 검경의 인지를 통해 4891건의 직권남용 범죄를 접수했는데, 기소는 고작 5건에 그쳤을 정도다. 그나마도 한국처럼 공무원 상하관계에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기소하는 사례는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앞서 보도에 따르면 윤 대통령 발언과 관련한 후속 조치의 하나로 부처 간 칸막이를 허물어 성공한 해외 사례를 찾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내친김에 해외에서 주요 공직자를 개인 비리가 아닌, 정책 결정과 관련해서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하는 사례가 얼마나 있는지도 조사해 보기를 바란다.

 

-천광암 논설주간, 동아일보(24-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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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街에 '미래'가 사라졌다


지금 경제 부처를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는 경제기획원(EPB) 출신들이 주류다.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두 명의 차관 모두 그렇다. 1980~90년대 EPB는 자금 지원, 세제 혜택 같은 대증(對症)요법보다 경제의 체질 개선과 구조 개혁 같은 긴 시각의 해법을 강조하며 재무부와 함께 경제정책을 이끄는 쌍두마차 역할을 했다. 모피아의 폐쇄적인 엘리트주의와 반대로 EPB는 자유로운 사고와 참신한 발상이 돋보였다.

이런 전통은 노무현 정부 당시 경제정책을 주도한 EPB 공무원들에게 이어졌다. 박봉흠·변양균·장병완·변재진·반장식·김대기 같은 관료들이 청와대와 경제 부처에서 이상(理想)을 현실에 구현한 것이다. 2007년 당시 기획예산처에선 장관과 간부가 마주앉아 맞담배를 피우며 자주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한 번은 차관보급 간부가 장관의 지시 사항을 중간에 끊고 "말도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장관은 "허~허~" 웃으며 기개와 논리를 일부 수용했다고 한다. '비전 2030'이라는 국가 장기 전략 보고서가 나온 것은 EPB의 이런 토론 문화와 당시 정권 등용술의 합작품이었다.

지난주 '적폐(JP)지수 공포, 공무원 짓누른다'는 기사를 쓰면서 판이해진 EPB 공무원들의 요즘이 안쓰러웠다. 이 정부도 정부 부처마다 토론도 하고 회의도 많이 연다. 하지만 대다수 공무원은 지금 하는 일이 언제든 '적폐'로 몰릴 수 있다며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가 안 될 일, 지시가 있는 일만 나선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복지부동(伏地不動) 못지않게 미래 담론이 실종됐다는 점이다. 한 국장급 공무원은 "요즘은 당장 오늘만 넘기자는 생각으로 산다"고 했고, 어떤 과장은 "일자리나 구조조정 대책 등에서 장기 개혁 과제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신경 안 쓴다"고 했다. 향후 정권에서 어떤 식으로든 적폐 청산의 주범으로 몰릴 수 있으니 당장 곤란한 일만 피하는 단기(短期)주의가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 밖에선 요즘 국가마다 중장기 비전 경쟁이 뜨겁다. 기술 발전이 세계를 격동시키는 시기여서 더 그렇다. 중국은 2025년까지 세계 최고로 제조업을 만든다는 국가 목표를 세웠고, 미국과 일본은 파격적인 기업 지원책으로 경제 부활을 본격화하고 있다. 프랑스·영국도 마찬가지다. 이들 나라 정부에는 변화를 주도하지 못하면 국제 경쟁에서 탈락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하다.

이런 판국에 현 정부는 그나마 국가 전략을 수립해본 경험 있는 공무원들에게 '적폐가 아니냐'며 눈을 부라리며 손가락질하고 있다. 공무원들이 과거가 두려워 몸을 사리고 미래 대비에 손 놓고 있는 것은 개인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자 비극이다. 


-김태근 경제부 차장, 조선일보(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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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비판' 시대

 

'나는 평생 인민에게 불리한 일을 한 적 없다. 40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강의와 저술에만 전념했을 뿐이다.'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1967년 일흔일곱 살 원로학자 진인각(陳寅恪)은 '나의 성명(聲明)'을 발표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반대하는 반동(反動)이라며 자아비판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신은 역풍을 만났다. 홍위병들은 '반성하지 않는다'며 밤낮으로 그의 집 주위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비판 대회를 열었다. 수·당제국사 연구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노학자는 2년여 시달리다 심장병으로 세상을 떴다. 문화혁명 당시 자아비판을 강요당하다 자살한 지식인이 꽤 많았다.

▶6·25 당시 공산군 치하 서울에 남은 김성칠 서울대 교수는 공산당으로부터 자아비판격 '자서전'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투쟁 경력과 사상 경향 등을 자세하게 쓰라는 지시였다. '투쟁 경력: 없음' '숭배하거나 영향 받은 인물: 없음'…. 김 교수는 이어 '사상 경향'에 이렇게 썼다. '역사적 필연성을 믿었으나 성격이 다부지지 못해서 온건한 학구(學究)로 지냈음.' 그는 스스로 얼굴 붉어질 만큼 민망했다고 고백했다. 


공산 국가의 자아비판은 정적(政敵)을 숙청하고 당의 독재(獨裁)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소련 공산당 이론가였던 부하린은 스탈린 치하에서 반(反)혁명 활동을 했다고 자백하고 처형됐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도 6·25전쟁 후 '미제의 스파이'라고 자백하고 숙청됐다.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전제(專制) 권력은 숙청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아비판과 자백을 받아내는 데 집착한다고 꿰뚫어봤다.

국토교통부가 지난주 공개발표회를 열어 박근혜 정부 정책을 '자아비판'했다. 민간 전문가와 국토부 공무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박근혜 정부 당시 국토부 정책이 '빚내서 집 사라 정책'이었다며 "가계 부채가 급속히 늘어나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부동산 매매 수요 창출을 위해 빚내서 집 사라는 식의 정책을 추진한 것은 부적절했다"고 비판했다. 국토부는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며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자아비판이 의미 있는 경우도 있다. 전 정부뿐 아니라 현 정부 실책과 과오까지 겨눈다면 공감을 얻을 만하다. 부처마다 앞다퉈 나선 '적폐 청산'이 우스꽝스러운 것은 전 정부를 망신 주고 현 정부 위신만 높이겠다는 의도가 읽히기 때문이다. 권력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자아비판' 대열에까지 서야 하는 공무원들의 처지가 측은하다.

-김기철 논설위원, 조선일보(1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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