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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동(牛腹洞)] 진짜 ‘우복동’은 청화산 기슭인가?

뚝섬 2019. 1. 12. 06:53

청화산 용유동, 환란을 피할 수 있는 복스러운 땅 


                                                                   [청화산 남쪽 기슭에 안겨 있는 용유리 화산마을. 우복동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

 

누가 보더라도 청화산보다 속리산이 명산인데, 이중환은 왜 청화산을 더 높게 여겼던 걸까? 단순히 산의 높이와 산세의 화려함만 본 것이 아니라 산의 성질과 사람이 땅을 일구고 살 수 있는 척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등산적인 가치가 아닌 사람이 기대어 살 수 있는 가치를 더 높게 본 셈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청화산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청화산은 내외 선유동을 위에 두고, 앞으로는 용유동을 가까이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수석의 기이함은 속리산보다 훌륭하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속리산같이 험한 곳은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모두 밝고 깨끗하여 살기殺氣가 적다.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을 가린 곳이 없으니 거의 복지다.

 

이중환은 일찍이 이러한 청화산의 산수를 사랑해 그의 호를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했다청화산에서도 주목할 곳은 남쪽 기슭의 용유리다. 소의 뱃속, 즉 우복동牛腹洞이라 불리는 승지勝地가 바로 상주시 화북면의 용유리다용유리 일대는 수려한 바위산이 에워싸고 있는데 이 산줄기들을 이으면 시루봉~청화산~늘재~문장대~천왕봉~형제봉~갈령~도장산이 된다. 산의 흐름이 흡사 시위를 팽팽히 당긴 활 모양이고 그 속의 분지가 용유리다. 외부로 열린 곳이라고는 병천밖에 없다. 소의 뱃속처럼 안온한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향의 우복동, 안온한 곳은 지금의 서울 강남 같은 곳이 아니다. 떵떵거리며 잘살 곳이 아니라 전쟁과 질병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땅이다. 경제적으로 가치가 거의 없는 그야말로 숨어서 근근이 살아갈 만한 땅이었던 것이다. 산골 중에서도 가장 교통이 불편한 깊은 산골의 자급자족 가능한 은밀한 마을에 가깝다. 과거 평민 입장에선 전쟁과 난리를 피하고, 신분사회의 불합리한 횡포와 조세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과 단절된 비밀스런 터가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전쟁도 피해서 잘살 수 있는 우복동은 이 땅에 거의 없다. 시골이라도 도로가 닿지 않는 마을이 없고, 숨어서 도인처럼 상부상조하며 잘살 수 있는 이상적인 마을도 없다. 깊은 산골마을까지 이해타산으로 하루아침에 친구에서 원수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용유리 남쪽 상오리의 쉰섬마을과 우복동 명당터의 쇠뿔에 해당한다는 장각동도 모두 우복동으로 주목받는 곳이다. 우복동의 위치가 분명하지 않아 이 일대의 화북면 7개 동리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동네가 진짜 우복동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중 진짜 우복동은 어디인가?




이에 대해 풍수지리 전문가 최창조 교수는 “용유리 하산마을 우복동이 진짜 우복동인지를 따지는 것은 잡설에 불과하다”며 “많은 사람들이 우복동이라고 인식한다면 그곳이 우복동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땅의 조건을 보여 줄 가능성이 커진다”고 설명했다. 세상 어딘가에 우복동이라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등진 이들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생긴 개념이며, 그만큼 이 땅의 역사가 민초들에겐 가혹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청화산 정상 아래 산기슭에는 원적암圓寂庵이 있다. 일설에는 원적암 터를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모란형牡丹形 명당이라고도 한다. 원적암은 신라 무열왕 7(660)에 원효대사가 개산했고, 조선 고종 광무 7 (1903)에 중건했다고 한다


화북 용유리에 있는 ‘동천석’. 이곳이 우복동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사랑한 화양동계곡 

 

용유동계곡 상류 쪽으로 좀더 올라가면 계곡가 너럭바위에 ‘동천洞天’이라 새겨 놓은 멋진 글씨가 있다. ‘洞天’이란 곧 신선들이 사는 세계라는 의미로, 신선들이 살 만한 명산계곡의 승경을 이르는 말이다. 양봉래楊蓬萊가 썼다고 하는데, 그는 상주 개운동 출신의 전설적인 도승 개운조사開雲祖師로, 바위에 맨손으로 음각해 쓴 것이라 한다.

 

신선이 살 만한 계곡은 대야산에서 시작된다. 대야산에서 발원한 선유동仙遊洞 계곡이 하류로 흘러가 화양동華陽洞이란 이름을 얻었다. 백두대간의 깊은 계곡을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한 이는 조선시대 노론의 영수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이다. 송시열은 일찍이 화양동 경치를 사랑했다. 가끔 이곳을 찾던 그는 60세가 되던 1666년 금사담 위에 ‘바위에 튼 둥지’라는 뜻의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정착했다.

 

화양동의 대표 아홉 굽이로 꼽히는 화양구곡(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곶)은 우암이 정한 게 아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가 정하고, 민진원閔鎭遠이 굽이마다 전서체로 썼다.

 

화양동에는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가 있다.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1703년 화양동에 세워진 만동묘萬東廟는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의 신종, 그리고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던 사당이다. 만동萬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처음과 끝 자에서 따온 것이다. ‘황하는 아무리 굽이가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이는 원래 ‘곡절이 많지만 결국은 본래의 의지대로 된다’는 의미였으나, 나중에는 충신의 절개와 의리를 비유하는 말로 굳어졌다.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서원은 세월이 흐르며 관찰사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사 지내게 하는 등 나라 안에서 큰 힘을 자랑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았다. 화양서원은 국가적인 지원과 노론 관료들과 유생들의 재산 기증이 이어짐에 따라 재산은 불어났고, 점점 유생들의 세력 근거지로 변해 가면서 민폐의 온상이 됐다.

 

화양서원을 안내하는 문화해설사는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 중에 ‘사대주의에 빠져 명나라를 떠받들던 곳’이라 말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때로부터 500년의 세월이 흘렀고 결과론적인 역사를 두고 그렇게 평가하긴 쉽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사연과 과정이 담겨 있다. 화양서원의 문화해설사는 “이곳은 나라가 어려울 때 원군을 보내준 데 대한 의리를 지키는 공간”이라 말한다.

 

-월간산 신준범 기자, 월간산(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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