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산-산행이야기]

[전북 회문산과 묘지 풍수] 조상들이 정한 무덤, 얼굴도 못본 후손이 멋대로 바꿔서야...

뚝섬 2019. 5. 4. 08:07

가끔 퇴근길을 전북 임실 옥정호수와 그 옆 회문산 자락으로 우회한다. 경치가 좋아서이다. 회문산은 전북 정읍·임실·순창을 접점으로 하는 명산이다. 모순으로 가득 찬 산이다. 김대건 신부의 동생 김난식(프란체스코)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회문산 자락에 숨어들었다. 동학 지도자 전봉준과 김개남도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김개남은 친구 임병찬의 밀고로 잡혀갔다. 임병찬은 옥구가 고향이었으나 이곳 회문산 자락에 들어와 살았다. 임병찬은 최익현을 모시고 이곳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사후 회문산 정상에 묻혔다.


의병장 임병찬 장군의 묘. 길지라는 전북 회문산 정상 부근에 있는 수많은 무덤 가운데 하나다.

 

강증산도 처음에 동학을 따랐으나 등을 돌리고 증산교를 창시하였다. 그는 회문산을 다섯 신선이 바둑판에 둘러앉아 있는 형국[五仙圍碁穴]에서 그 바둑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 어머니 무덤은 회문산 정상에 있다. 임병찬 무덤과 지근의 거리이다. "강증산 어머니 무덤임을 알려주는 표지는 없으나 회문산 정상 부근 수많은 무덤 가운데 가장 관리가 잘되고 있다."(전은신, 순창군청 공보계). 회문산 덫에서 필자의 외갓집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외갓집은 회문산 근처였다. 6·25전쟁이 터지자 외삼촌 중 한 분은 국군에 징집되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유해는 찾지 못하였으나 동작동 현충원에 위패를 모셨다. 또 다른 외삼촌은 인민군에 끌려가 회문산에서 죽었다. 유해는 찾을 수 없었다. 둘 다 회문산에 묻혔다. 그때 둘의 나이는 20세·18세였다. 외갓집은 양자로 대를 이었다.

이곳을 찾은 이들은 또 있었다. 수많은 풍수사와 그들에게 현혹되어 이곳에 뼈를 묻은 이들이었다. 왜 풍수사들은 이곳을 길지라고 했을까? 풍수사라기보다는 '기획 부동산 브로커'들이었다. 돈은 넉넉하되 잘 풀리지 않는 집안을 '회문산 길지'로 유혹하였다
.

왜 회문산이 '기획 부동산' 현장이 되었을까? 홍성문의 '회문산가(回文山歌)'라는 비기 때문이었다. 홍성문의 생몰연대는 조선 후기로만 알려져 있다. 서얼 출신인 그는 집안에서 쫓겨나 인근 절에 들어가 '생존술'을 깨쳤다. 이후 회문산을 자신의 '영업 무대'로 삼았다. 그는 '돌산에 장사 지낼 수 없다[石山不可葬]'는 풍수 금기를 뒤집고 '돌산에도 흙을 메워 쓸 수 있다[石山補土葬]' '혁명'을 일으켜 한반도 풍수사에 획을 그었다. 흉지가 명당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었다
.

그러한 까닭에 20여 년 전만 해도 회문산 정상과 주변 능선마다 무덤 수십·수백 개가 밀집하였다. 그러나 최근 급격히 그 수가 줄어든다. 이장을 하거나 파묘하기 때문이다. 임병찬 무덤도 후손들이 고향으로 이장해 갈 계획이란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당시 그들은 이곳이 길지라고 굳게 믿었다. 홍성문이 언급한 '24길지'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믿음과 행위들이 얼굴 한번 못 본 후손들에 의해 매정히 무화(無化)되는 것은 아닐까
?

다시 필자 집안 이야기이다. 두 해 전 '산재하는 조상 묘들을 한곳으로 집단화하겠다'는 문중회보가 배달되었다. 필자는 두 가지 이유로 반대하였다. 특정 장소에 무덤을 잡았을 당시 조상님들도 이유와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후손들이 까닭 없이 이장을 하는 것은 그 뜻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둘째, 그 일에 돈을 쓰는 것은 낭비이다. 반론이 왔다. 벌초할 후손조차 없어지는 판에 누가 관리한단 말인가? 필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 이문구 선생 소설을 빌려 재반론을 하였다
.

'
낳아서 초야에 풀처럼 살고/ 죽어서 숲 속에 풀거름이 되었다/ 지는 해 뜨는 달은 만 년을 가는데/ 싹 나자 시들으니 한세상 초로구나/ 사람들아 무덤에 풀 베지 말아라/ 인간사 덧없음을 여기서 알리라'('산 너머 남촌').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조선일보(19-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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