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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父가 바꾼 공화국의 운명] [아프리카의 식민지 역사] ....

뚝섬 2024. 3. 14. 09:18

[國父가 바꾼 공화국의 운명] 

[아프리카의 식민지 역사] 

['황금의 땅' 西아프리카, 어쩌다 '테러의 땅' 됐나] 

 

 

 

國父가 바꾼 공화국의 운명

 

서아프리카 세네갈이 지구촌에서 유명해진 건 22년 전이다. 월드컵 축구 데뷔전이던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전에서 과거 자국을 식민 통치한 우승 후보 0순위 프랑스를 격침했다. 서울 상암 경기장에서 열린 이 경기는 지금도 세계 축구사 대이변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다.

 

그 세네갈이 이번에는 정치 반전 스토리로 국제사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후임자를 뽑는 대선을 전격 연기하며 권력 연장을 꾀하려던 마키 살 대통령이, 국민적 저항에 이은 헌법위원회(대법원 격)의 제동으로 대선 날짜를 조기 확정하고 임기 종료 뒤 물러나겠다고 밝히며 백기를 든 것이다. 반정부 시위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진통도 있었지만, 쿠데타나 내전 같은 파국이나 외세 개입 없이 자체 역량으로 사태를 수습한 것은 아프리카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다.

 

보다 주목받는 것은 권력자의 폭주 조짐이 나올 때마다 자력으로 안정시키는 자정 시스템이 세네갈 현대사에서 되풀이돼 왔다는 점이다. 직전 대통령 압둘라예 와데 집권기(2000~2012)의 시작과 끝은 세네갈 민주주의의 저력을 극적으로 보여줬다. 와데는 독립 후 이어지던 사회당 1당 장기 집권 체제를 선거로 종식시킨 주역이다. 국제사회는 아프리카에서 선거를 통한 여야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는 데 한 번 놀랐고, 그 과정이 순조롭다는 데 두 번 놀랐다. 그 와데가 3연임은 않겠다는 약속을 뒤집고 무리하게 대선에 나섰지만, 국민들은 투표로 장기 집권을 막았고 와데는 결과에 승복했다.

 

와데에 이어 대통령이 된 살도 임기 막판 대선을 돌연 연기하며 권력욕을 내비쳤지만 분노한 민심과 대선 연기에 대한 사법부의 무효화 결정에 뜻을 접었다. 이탈 직전 스스로 궤도로 돌아오는 세네갈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시성(詩聖)으로도 이름을 떨친 초대 대통령 레오폴 상고르(1906~2001)다. 프랑스에서 교사로 살았던 그는 아프리카 정체성을 앞세워 독립을 이끌었으면서도 국가 초석을 다지는 과정에 프랑스에서 경험한 서구식 시스템을 이식했다. 사회주의 노선을 지향했지만, 편향되지 않고 개방성·민주성을 추구했다. 프랑스어권 지식인이라는 상고르의 개인 이력은 건국 초기 정치·경제적 안정에도 도움이 됐다.

 

인구의 90% 이상이 무슬림인 나라에서 가톨릭교도 출신임에도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상고르는 일당독재가 당연시되던 1976년 다당제를 도입했고, 그로부터 4년 뒤 스스로 물러났다. 권력은 유한하며 그 원천은 국민이라는 원칙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 신념이 옳았음을 지금의 상황이 보여준다. 1959년 함께 독립하며 한때 세네갈과 연방을 이룬 니제르·말리·부르키나파소는 2020~2023년 잇따른 군부 쿠데타로 혼돈 상태에 빠져있다. 국부(國父)의 안목과 신념이 신생 공화국의 운명을 바꾼다는 사실을 1만3000㎞ 떨어진 두 나라, 한국과 세네갈이 보여준다.

 

-정지섭 기자, 조선일보(2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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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식민지 역사 

 

15세기 포르투갈, 인도와의 무역 위해 식민지화하자 영국·프랑스 등도 진출
17~19세기 1500만명 사냥하듯 잡아 브라질·서인도제도 등에 노예로 보내
 

 

얼마 전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 피랍된 한국인이 구출됐죠. 지난 13일에는 부르키나파소 수도 와가두구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이슬람 무장 테러 집단으로 추정되는 괴한의 총격으로 피살당하기도 했어요. 프랑스 식민지였던 부르키나파소는 국민의 30%는 가톨릭 신자, 60%는 이슬람교 신자입니다.

사실 서부의 라이베리아와 동부의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아프리카의 나머지 국가들은 대부분 유럽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어요. 부르키나파소 인근 국가인 말리, 니제르, 알제리 모두 프랑스의 식민지였죠. 앙골라, 모잠비크는 포르투갈 식민지였고요. 콩고민주공화국은 벨기에 땅이었습니다.

 

세네갈 식민군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프랑스는 식민지 세네갈 출신 원주민을 군에 입대시켜 아프리카 다호메이 왕국과의 전쟁에 투입합니다. /위키피디아 

 

그래서 아직도 식민 지배 당시 영향이 남아 있죠. 공용어로 영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등을 사용하는 나라가 많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도 많은 것처럼요. 그러나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대로 그어 놓은 국경선 때문에 한 국가 안에서 부족 간의 분쟁이 계속됐어요. 최근에는 정세가 불안한 아프리카에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가 침투해 테러 위협에 떨게 하고 있어요.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를 알아볼까요?

◇인도로 가기 위한 '보급기지'

아프리카에 가장 먼저 식민지를 개척한 유럽 국가는 포르투갈이었어요. 포르투갈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는 데 적극적이었어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1488년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인 희망봉에 도착했고, 1498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부에 도착하는 항로를 개척했어요. 무역기지로서 아프리카가 꼭 필요했던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부의 적도기니, 앙골라와 동부의 모잠비크 등을 식민지로 삼았어요.

16세기 전반부터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도 아프리카에 진출했어요. 다만 이때까지는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 내륙까지 진출하지 않고 해안에 머물렀어요.

◇17세기부터 '노예 보급기지' 돼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에 알려집니다. 이 발견은 17세기 후반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이 성행하게 하는 뜻밖의 부작용을 낳았어요. 왜일까요?

당시 스페인 등은 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을 동원해 사탕수수, 담배, 커피 등을 대규모로 경작했어요. 그런데 유럽인이 아메리카에 전염병을 옮기면서 원주민 수가 급격히 줄었죠. 일손이 모자라자 열강은 아프리카인을 붙잡아 노예로 삼기 시작합니다.

노예 상인들은 서남아프리카인들을 사냥하듯 붙잡아 불에 달군 낙인을 찍은 뒤 노예선에 태웠어요. 17~19세기 동안 약 1500만명이 붙잡혀 노예가 됐다고 해요. 500만 명이 브라질로, 450만명이 서인도제도로 끌려갔다고 해요.

◇유럽이 정한 '아프리카 분할 원칙'

19세기 제국주의가 유럽을 휩쓸면서 열강은 각종 자원을 얻기 위해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 국가끼리 갈등을 빚기도 했어요.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콩고강 유역에서의 소유권을 주장하자 먼저 콩고강 주변에 진출해 있던 프랑스, 포르투갈 등이 반발한 사건이 대표적이죠. 결국 유럽 열강은 베를린 회의(1884~1885)를 열고 '아프리카 분할 원칙'을 정했어요. 아직 점령되지 않은 곳은 먼저 교역로를 확보하거나 원주민과 협약을 맺는 등 '실효적 지배'를 한 국가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원칙이었죠.

이 원칙은 유럽 국가들의 경쟁심을 부추겼고 아프리카의 식민지화는 더욱 본격화됐지요. 20세기 초에는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지역이 식민지화되어요. 아프리카 국가들은 20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독립할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고 있어요. 빈곤도 심하고 치안 상태도 좋지 못하죠.

[아프리카에 이슬람교가 많은 이유]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교가 창시되고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침략하면서 이집트 지역에 파티마 왕국, 아이유브 왕국 등 이슬람 왕조가 들어섭니다.

이슬람 상인들은 사하라 사막을 건너 지중해와 서아프리카를 잇는 교역로를 개척했는데, 아프리카 서부에서 무역과 금광으로 번영했던 아프리카의 말리 왕국, 송하이 왕국 등이 모두 이슬람 문화 영향을 받습니다. 또 인도양과 통하는 동부 아프리카 해안가에는 아랍 상인들이 무역 거점 기지로 삼은 도시들이 번성했어요.

지금도 아프리카에 이슬람교 신자가 많은 이유랍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교사/기획·구성=양지호 기자, 조선일보(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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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땅' 西아프리카, 어쩌다 '테러의 땅' 됐나

 

최근 부르키나파소·니제르 등서 연쇄 테러 38명 사망 

 

한국인 장모씨가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 인질로 잡혔다가 프랑스군에 의해 구출된 서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또 연이틀 테러가 발생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13일(현지 시각) 수도 와가두구에서 성모 마리아 조각상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던 가톨릭 신자들이 총을 든 괴한의 습격을 받아 4명이 살해됐다. 전날 북부 다블로시의 한 성당에도 무장 괴한들이 습격해 6명이 사망했는데, 또다시 가톨릭을 겨냥한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부르키나파소와 인접한 니제르에서는 15일 무장 괴한들이 니제르군을 기습해 군인 28명이 사망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는 자신들이 배후라고 주장했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부르키나파소를 비롯해 니제르·말리·나이지리아 등 서아프리카 사헬지대(사하라사막 이남 지역)에서 기아와 빈곤, 정부의 무능 탓에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가 급격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서아프리카 지역은 9세기 무렵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한 아랍 세력을 통해 이슬람교를 처음 접했다현재는 3억8000만명 인구 중 약 70%가 이슬람 신자다. 과거 서아프리카는 사헬지대 인근 초원에서 농경·목축을 하고, 매장량이 풍부한 황금을 바탕으로 북아프리카·중동과 교역을 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13~17세기에는 사헬지대와 나이저강 일대를 장악한 말리제국과 뒤를 이은 송가이제국이 '황금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부를 자랑했다. 14세기 초 말리제국의 왕 만사 무사는 1만2000여명의 수행단을 데리고 메카 순례에 나서 지나는 곳마다 황금을 나눠줬다는 일화도 있다.

15세기 중반부터 서유럽 국가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유럽 국가들이 노예무역을 벌이면서 서아프리카 인구가 급감했고, 사헬지대의 사막화로 농경·목축도 쇠퇴해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다. 19세기에는 프랑스·영국 등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에 놓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하나둘 독립을 되찾았지만, 극심한 정쟁과 이로 인한 정치 불안이 이어지면서 빈곤과 기아가 만성화됐다. 특히 1970년대부터 30여년간 극심한 이상 가뭄이 이어지면서 100만명 이상이 아사(餓死)했다.

정치 불안과 빈곤은 이슬람 극단주의가 싹을 틔우는 토양이 됐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이슬람국가(IS)'는 2014년 전후로 중동 내 세력이 줄어들자 무슬림 인구가 많은 서아프리카 사헬지대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기 위해 테러·무장 단체를 전략적으로 육성했다. 무장 단체나 테러에 가담하는 이들은 주로 빈곤과 정부의 무능, 부정부패에 분노하는 청년층이었다. 아프리카 내 미군 특수부대를 지휘하는 마크 힉스 소장은 "알 카에다와 IS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서아프리카 내에 세력 팽창을 추진했고, 지금 그들의 성공을 목격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지에 말했다.

미군 내 정보기관에 따르면 현재 서아프리카 내 극단주의 무장 단체의 병력은 총 1만1000명이 넘는다. 일부 테러·무장 조직은 아예 자체 영토를 확보하고 세를 불리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무장 반군 '보코하람'이 북부 지역을 사실상 통치하며 '칼리프 국가(이슬람 신정일치 국가)' 건설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말리도 '카티바 마시나' 등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가 북부 사막지대를 지배하며 수도 바마코 등이 있는 남부로 진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들은 각국 정부를 전복하고 칼리프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주목표지만, 테러와 몸값을 받아내기 위한 인질 납치를 서슴지 않는다. 인명 피해도 급증하는 추세다. 지난해 아프리카에서 테러 및 무장 단체의 공격으로 발생한 사망자 수는 9300여명인데, 이 중 절반가량이 서아프리카에서 발생했다. 부르키나파소와 말리·니제르에서는 지난해 총 1100여명이 숨졌는데, 지난 2년간 사망자 수가 해마다 2배씩 늘었다.

서아프리카에서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는 서방군 내에서는 "현지 정부들이 테러 조직을 막는 데 관심이 없고, 도리어 테러 조직의 확산을 돕고 있다"는 불평도 나온다. 말리와 부르키나파소의 경우 정부가 자위(自衛)를 명분으로 민간의 총기 소지와 자경단 구성을 허용해준 탓에 도리어 테러 조직들이 총기를 확보하고 세를 불리기 더 좋은 여건이 됐다고 한다. 한 서방군 관계자는 "말리와 나이지리아에선 사실상 손을 뗐고 부르키나파소와 니제르에서 테러 조직 확산을 저지할 경계선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지에 말했다.

-배준용 기자, 조선일보(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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