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당신을 구원할 영웅은 당신뿐이다] [대한민국은 왜 200년 전.. ]

뚝섬 2024. 5. 4. 09:22

[당신을 구원할 영웅은 당신뿐이다]

[대한민국은 왜 200년 전 꼰대 독일 철학자에 빠졌나] 

[정치권 말싸움] 

 

 

 

당신을 구원할 영웅은 당신뿐이다

 

[윤평중의 지천하 3]

 

가히 ‘쇼펜하우어 신드롬’이다. 국내 성인 10명 중 6명이 지난해 1년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현실(문체부 ‘2023 국민 독서 실태’)임에도 쇼펜하우어 책은 수십만 권 팔렸다. 그의 화두가 한국인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쇼펜하우어(1788~1860)는 고통의 본질을 설파한 철학자다. 그래서 정년 퇴임 직전인 2020년 2학기, 나의 마지막 강의라는 생각으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코로나 사태로 힘든 젊은이들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학생들은 친구나 교수도 만날 수 없었고 캠퍼스에 갈 수도 없어 방에 유폐된 상태였다. 빛나는 청춘에 닥친 암흑의 시절이었다.

 

지금의 ‘쇼펜하우어 열풍’도 중대한 시대적 징후다. 팬데믹이 끝났는데도 사람들은 괴롭고 외롭다고 느낀다. 체감하는 삶의 고통은 줄기는커녕 더 예리해졌다. 민생과 정치가 어지러운 것도 이유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많은 이가 삶에 출구가 없다고 호소한다.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초(超)저출산 현상이 단적인 증거다.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도 OECD 국가 최악이다. 취업·고용·노후에 대한 불안이 한국인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하지만 ‘고통의 멘토’ 쇼펜하우어의 삶은 정작 고통스럽지 않았다. 거상(巨商)이었던 부친이 물려준 재산으로 ‘경제적 자유’를 누렸다. 아침엔 독서와 집필, 1시간 플루트 연습, 점심과 저녁 식사는 고급 식당에서, 밤엔 연주회를 즐기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녔다. 그럼에도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몰라보는 세상을 평생 원망했다. 교수가 되지 못하자 철학 교수들을 사기꾼이라고 매도하는 ‘모욕의 기술’을 펼쳤다. 24권짜리 전집을 낸 유명 소설가였던 모친과도 절연해 장례식에도 불참했다. 그의 여성 혐오는 극악한 수준이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인간적 결함이 그의 업적을 가리진 않는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한 선구자였고 삶의 부조리를 해부한 천재였다. 그러나 괴팍하고 음울했던 쇼펜하우어도 나이 들어 유명해지자 행복한 노인이 됐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흔들리는 추와 같다고 비극적으로 설파한 생(生) 철학자는 명성의 절정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는다. 그는 우리 모두처럼 결함과 모순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고통에 압도된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대신 풀어줄 ‘해결사’를 끝없이 찾아 헤맨다. 그게 곧 문명과 정치의 궤적이다. 하지만 삶의 고통을 단번에 해소할 비책(祕策)이 있을 리 만무하다.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건 어느 스승도, 어떤 종교나 철학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삶에 각인된 고통을 어떤 멘토가 나를 위해 지워주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를 절망의 늪에서 건져내 줄 영웅에게 보내는 환호는 순간의 마취제에 불과하다. 잠깐의 ‘힐링’이 사라지면 현실은 더욱 쓰라리다.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치는 것이야말로 담대한 첫걸음이다. 욕망과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쁨을 찾고 의미를 가꾸어 나가는 삶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앞에 놓인 ‘지금과 여기’다. 출구는 저 멀리 구름 위에 있지 않다. 진정한 해답은 나날의 작은 일상 안에 있다.

 

인간은 나치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새기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환경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고 각자 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태초에 의미가 있었다.’ 매 순간 의미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태도가 우리를 만든다. 우리는 사람들과 연대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엔 홀로 나아간다. ‘힐링 전도사들’의 위안 없이도 우리는 잘 살아갈 수 있다. 철학은 가끔 삶의 진실을 섬광처럼 폭로한다. 당신을 구원할 영웅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진실을.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조선일보(24-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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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왜 200년 전 꼰대 독일 철학자에 빠졌나

 

연말 서점가 휩쓰는 쇼펜하우어 열풍 

 

요한 셰퍼가 그린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초상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대학교 도서관

 

“현명한 사람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에 손을 집어넣어 화상을 입고는 고독이라는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불이 타고 있다고 탄식한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사회를 ‘불’에 비유했다.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것은 ‘정중함과 예의’라고도 했다. 그는 ‘고독’을 찬양하고 ‘허영심’을 경계했다.

 

괴팍하고 냉소적이던 200년 전 독일 철학자에게 2023년 대한민국이 푹 빠졌다. 현재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는 강용수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8위는 쇼펜하우어의 책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19위도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다. 인스타그램에서도 쇼펜하우어의 글귀를 담은 ‘#쇼펜하우어’가 1만 건을 넘겼다. 배우 하석진이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읽고 있다”고 밝힌 후, 아나운서 전현무도 “나도 이거 읽는다”고 말했다. 왜 지금 한국인은 쇼펜하우어에 빠져든 것일까.

 

베스트셀러 종합 1위를 달리고 있는 철학 교양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격언을 모은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마라’,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도 인기다.

 

디지털 디톡스

 

쇼펜하우어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투신 자살을 했다. 어머니는 스무 살 많던 남편이 사라지자 막대한 재산을 무기로 사교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어머니에 대한 실망감. 사춘기의 쇼펜하우어는 ‘사교’를 증오하고 ‘고독’을 찬양했다. 그는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교의 욕망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방증”이라며 “타인을 통해 얻는 가치는 행복의 본질이 아니다고 했다.

 

쇼펜하우어가 재조명되는 첫 번째 이유, 이런 그의 말이 ‘풍요 속의 빈곤, 군중 속의 고독’을 겪는 MZ세대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분석이다. 요즘 세대는 소셜미디어로 수천, 수만 명과 연결돼 있지만, 너무 외롭다. 동호회와 모임으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만날 수 있지만, 거꾸로 쓸쓸하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모(38)씨는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며, 소셜미디어와 약속을 줄이고 있다”며 “디지털 디톡스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디톡스도 되는 기분”이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파이어족

 

쇼펜하우어는 부(富)의 가치를 잘 알았다. 많은 철학자가 돈을 벌기 위해 강의한 반면, 그는 상속 재산으로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했다. 지금 MZ세대가 원한다는 ‘파이어족(경제적 독립족)’이었다 그러나 부를 과시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진짜 부자는 부를 자신의 장점을 계발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가짜 부자는 남에게 과시하거나 방탕하게 돈을 쓴다. 여기서 그가 뜬 두 번째 이유, 과시적 삶’에 지친 젊은이들의 마음을 울린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을 만큼 재산이 있고 여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자. 남을 신경 쓰지 말고, 호감 가는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라고 그는 말한다. 출세 등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사는 삶, 자존감 높은 삶을 살라는 것이다.

 

진짜 행복이란?

 

평소 쇼펜하우어는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만약 태어났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차선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염세적이었다. 그러나 1831년 독일 베를린에 콜레라가 만연하자 살기 위해 베를린을 탈출한다. 이런 모습은 마지막까지 학생들 곁에서 철학을 강론하다 콜레라에 전염돼 세상을 떠난 헤겔과 비교돼 조롱받기도 했다.

 

그는 관심 없는 척했지만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성공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30대에 독일 베를린대에서 강의할 기회를 얻은 그는 일부러 헤겔과 같은 시간에 강의를 개설한다. 그러나 빈 강의실에서 강의해야만 했다. 쇼펜하우어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45세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재구성한 수필집 ‘소품과 부록’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60대에는 세계 여러 대학에서 그의 철학을 주제로 강의가 열렸다. 70세 생일엔 세계의 축하 편지를 받았다. 당시 그는 말했다.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 철학자는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성공을 갈망했기에, 고독을 찬양하고, 예의를 중시하고, 권태를 증오했다. 그는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하면서도 “삶의 지혜는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기술이라고 말했다. 지금 한국에서 쇼펜하우어의 인기가 많다는 건 ‘진짜 행복’을 찾으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신호다.

 

-이혜운 기자, 조선일보(2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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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말싸움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유작(遺作) '논쟁술'에는 말싸움에서 이기는 법 36가지가 나온다. 이런 대목들이 있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라/ 상대방 주장을 과장하라/ 상대가 피하는 약점을 몰아붙여라/ 전문 지식이 부족한 청중을 이용하라/ 질 것 같으면 딴소리를 하라/ 반론할 게 없으면 모른다고 하라….' 우리 정치권에서 흔히 봐와서 낯설지가 않다. 

 

▶TV 토론에 나온 정치인이 대통령 말을 '위헌'이라고 하자 반대쪽 사람이 "무슨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대통령이 무슨 말만 하면 종소리 듣고 침 흘리는 개처럼 위헌 얘기부터 한다"고 맞받는다. 그다음부터 정상적인 대화와 토론이 힘들어진다. 상대 당 정치인의 떡볶이집 방문에 대해 "떡볶이집에 가지 마십시오. 손님 떨어집니다"고 했더니 즉각 "떡볶이집 망하라고 저주를 퍼부은 막가파식 발언"이라는 반격이 돌아왔다. 상대를 궁지로 모는 기술이다.

 

▶정치권 말싸움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았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말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16년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선 TV 토론 장면이다. 힐러리가 트럼프의 음담패설을 물고 늘어지자 트럼프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과거 성추문으로 응수했다. "내가 한 것은 말뿐이었지만 클린턴이 한 것은 행동이다. 훨씬 나쁜 짓이다." 상대 약점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마지막 방법은 '인신공격'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인신공격이나 모욕을 주라'고 했다. 여기까지 오면 갈 데까지 갔다는 얘기다. '사이코패스''괴물'까지 등장한 우리 정치권은 갈 데까지 갔다. 

 

▶여야 간 '독재자'를 둘러싼 말싸움이 한창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을 겨냥해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이라고 하자 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진짜 독재자 후예는 김정은인데 그 대변인 역할만 하고 있다"고 맞받았다. 여당 대변인은 "독재자의 후예라고 한 적 없는데 제 발 저려 저런다"고 하고, 야당 대변인은 "독재자 후예 타령은 자신을 향한 독재자 비난이 뼈저려서 그렇다"고 했다. 여권을 향해 '남로당 후예가 아니라면…'이라는 비난도 나왔다. 상대를 인정 않으니 타협의 여지가 사라지고 논리와 내용 없는 감정적 말싸움만 이어진다. 여야 모두 '내년 총선에서 지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말싸움은 더욱 격해질 것이다. 그런데 5년, 10년 후에 이 나라가 무엇을 먹고 살 건지 걱정하는 사람이 누가 있기는 있나.

 

-이동훈 논설위원, 조선일보(19-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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