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그의 행복을 질투할수록 작아지는 나의 행복] [금수저들이 왜?] ....

뚝섬 2024. 4. 30. 09:24

[그의 행복을 질투할수록 작아지는 나의 행복] 

[금수저들이 왜?] 

['흙수저'라 좋다, 불평등한 세상에 무릎 꿇지 않아야 청춘이다.. ]

 

 

 

그의 행복을 질투할수록 작아지는 나의 행복

 

[강용수의 철학이 필요할 때]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을 근거로 한국인이 세계에서 시기와 질투가 가장 많은 민족이라는 자조적인 한탄이 생겨나기도 한다. 물론 잘못된 편견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가장 크게 증가한 시기는 경제적 성장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던 1990년부터다. 가난할 때보다 풍족할 때 자살이 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정신적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은 배고픔이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의 증가라는 뜻이다. 누군가가 승자가 되면 누군가는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성공지향적 사회에서는 치열한 경쟁만큼 상실감과 절망감도 커지기 마련이다.

존 롤스의 ‘정의론’은 이러한 시기심(envy)과 자존감(self-respect, self-esteem)의 관계를 정치철학에서 풀어낸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자존감을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던 롤스에게 정의로운 사회란 개인의 자존감이 최소한 보장되는 체계를 말한다. 그의 사회계약론이 전제하는 인간은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과 ‘상호무관심’ 원칙에 따라 타인에 대해 시기심을 갖지 않을 정도로 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현실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자존감은 ‘좋은 것’을 두고 싸우는 무한 경쟁 속에서 발생하는 시기심에 의해 파괴되고 훼손된다. 경쟁에서 남이 나보다 더 많은 기회나 업적을 갖게 되면 나의 존재감은 낮아진다. 롤스에 따르면 불평등에 따른 시기심은 경제 활동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지만 지나친 시기심은 자존감 손상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할 경우 사회적 약자, 가난한 사람의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도록 물질적 차원뿐만 아니라 도덕·심리적 차원에서 정치적 평등이 충분히 실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자존감과 시기심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그러나 물질적인 부가 아무리 많이 축적되고 재화가 공정하게 분배된다고 해도 상대적 비교 감정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객관적인 행복지표가 높은 잘사는 나라에서도 모든 사람의 시기심을 완전히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비교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이다.

시기심은 타인의 행복에 대해 불행을 느끼는 악덕이다. 명성, 부, 성공, 지식, 사회적 위상, 인맥 등 자신이 갖고자 욕구하는 대상을 다른 사람이 가질 때 그 가치를 부정하고 싶은 이율배반의 심리다. 나는 부자가 되고 싶지만 남이 부자가 되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시기심은 성공지향적인 사회, 돈을 목표로 무한 경쟁하며 승리자와 낙오자가 끊임없이 생겨나는 사회에선 없앨 수 없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질투는 인간의 ‘마음의 평정’을 깨뜨리는 불행의 씨앗이다. 따라서 우리는 질투를 늘 경계해야 한다. 타인의 행복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결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 자존감을 갉아먹는 시기심을 줄이는 일은 사회적인 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욕심을 줄이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더 나아가 타인의 성공을 축하하고 행복에 기뻐할 수 있는 덕목도 갖춰야 할 것이다.

-강용수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동아일보(24-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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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들이 왜?

 

에드워드 베어 '마지막 황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세 살 때 제위에 올랐고 다섯 살에 나라가 망했다. 혁명정부 시책에 따라 명목상의 황제 노릇을 했는데 날마다 환관 수십 명을 매질하거나 더러운 것을 먹게 하는 등 가혹 행위를 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원전인 동명의 전기에서 작가 에드워드 베어는 "어린 푸이의 발작적인 잔학 행위는 그가 프라이버시를 전혀 갖지 못한 데 대한 일종의 초조감인지 모른다"고 분석했다.

어린 푸이는 또래의 어린이라고는 본 적이 없고, 단 한 사람 의지했던 유모마저 쫓겨난 후에 항상 자신을 지켜보는 수십, 수백 명의 어른 속에서 살았다. 그러니 얼마나 허전하고 두려웠겠는가? 그래서 자기가 두려운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함으로써 내면의 공포심을 달래려 한 것 아닐까? 사실 모든 특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독약이며 족쇄이다.

요즘 몇몇 '금수저'의 횡포가 가뜩이나 어지러운 나라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고 있다. 두정물산 2세의 대한항공 기내 난동과 동국제강 2세의 술집 난동 등은 그냥 술 취한 사람의 행패로 보기 어렵다. 그들은 자기 부모들의 막대한 재력으로도 수습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걸까? 국민 건강과 우리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 우리는 특권층 자제들을 이처럼 광폭하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청년 실업이 크나큰 문제인데 놋수저, 흙수저들이 박탈감에 빠져들고 금수저들은 또 그들대로 광폭한 반사회성을 띤다면 나라가 깨어지지 않겠는가.

한화 김승연 회장의 셋째 아들 비행(
非行) 역시 경악을 자아낸다. 아버지 김 회장은 아들이 술 먹다 벌어진 싸움에서 맞았다고 폭력배까지 동원해 몸소 '복수'했다. 김 회장이 그로 인해 받은 사회적 지탄과는 별개로 어쨌거나 아버지의 부성애만큼은 대단했을 터이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받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을 만도 하건만, 무슨 분노가 그를 그리도 난폭하게 만들었을까.

'돈도 실력'이라는 철딱서니 없는 말로 온 국민의 복장을 질렀던 정유라는 이제 기댈 실력이 전무한 영원한 중졸이 되었다. 어머니의 '실력' 올가미에 딸이 걸려 온 국민에게 중죄인 취급을 받으니 그녀의 젊음이 가련하다. 이 금수저들의 병은 부모의 돈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피와 땀을 흘리며 살게 되면 치유될 것 같은데.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일보(1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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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라 좋다, 불평등한 세상에 무릎 꿇지 않아야 청춘이다..


서른 살 배지영씨는 일본 돗토리현청 공무원이다. 관광전략과에서 5년째 일한다. 지난가을 돗토리현에 취재 갔다 그녀를 만났다. 돗토리현 골목 골목을 원주민보다 더 잘 알고 안내하던 그녀는 재바른 일 솜씨만큼 웃는 얼굴이 예뻤다. 아침 8시부터 밤 10, 주말로 이어진 강행군에도 "재미있다"며 웃었다. 미덥고 든든했다.

울산이 고향인 지영씨는 지방대 출신이다. 해외 복수 학위제가 있다는 걸 알고 4학년 때 돗토리국립대학으로 갔다가 취업에도 성공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친 2008, 일본 청년들도 일자리 잡기 어려운 시기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여러 군데 원서를 넣었지만 1차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작은 정보 서비스 업체 인턴십부터 시작했다. 일본말 서투르니 업무를 따라잡지 못해 좌절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국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국제관광서포트센터에서 한국인 스태프로 일한 게 발판이 됐다. 돗토리현청이 '국제교류원'이란 이름의 계약직 공무원을 뽑는다는 공고가 떴다. 그사이 늘어난 일본어 실력, 관광 업무 경험을 무기로 지원했고 합격했다.

"운이 좋았냐" 묻자 지영씨가 어깨를 으쓱했다. "운도 자기가 만드는 거였어요." 국제교류원은 채용 후 3년까지 평점 B 이상을 받아야 고용이 유지되고, 4~5년까지는 A 이상 받아야 재계약이 가능하다. 5년째부터는 최고 등급 S를 유지해야 한다. 관광 책자를 만들기 위해 주말이면 진짜 맛집인지 소문만 요란한 집인지 순례하며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지영씨는 4년 차인 지난해 이미 S등급을 받았다. 지영씨는 "출발이 얼마나 근사한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걸음씩 도전하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연, 실패하면서 배운 것들을 밑천 삼아 최선을 다했더니 또 다른 문이 열렸다"고 했다.

서울대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사를 읽다가 지영씨를 떠올렸다. '생존을 결정하는 건 전두엽(지능) 색깔이 아닌 수저(계급) 색깔'이라는 유서 한 줄이 가슴을 찔렀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안타까우면서도, 이 극단의 자학과 분노가 독버섯처럼 퍼져 나갈까 염려됐다.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과연 부(
)와 계급일까. '금수저'는 특혜가 될 수도 있지만 치명적인 독()이 될 수도 있다. 뛰어난 두뇌가 생존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억대 연봉이 아니어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거기가 '()의 직장'이다. 인생엔 정답과 오답, 1등과 낙오자가 있을 뿐이라 가르친 우리 교육 탓일까. 한 사람의 생존과 행복을 결정하는 변수는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흙수저 자성론'을 불 지핀 어느 대학생 글에 콧등이 시큰했다. "나는 흙수저란 말이 싫다. 부모님이 그 단어를 알게 될까봐 죄송하다. 나는 부모님에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좋은 흙을 받았다. 그래서 감사하다." 가진 것 쥐뿔도 없지만 "덤벼라 세상아!" 외치며 호기를 부리는 게 젊음이다. "요 정도로 물러설 줄 알았다면 오산이라고 전해라~" 배짱 퉁기는 이가 갑(
)이다. 불평등한 세상에 무릎 꿇지 않아야 청춘이다. 

 

-김윤덕 문화부 차장, 조선일보(15-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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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희망퇴직 한파가 12월의 추위를 더하고 있다. 말이 좋아 '희망'이지 작가 김훈의 산문 제목처럼 '밥벌이의 지겨움'을 알기도 전에 젊은이들이 퇴직한다. 실업급여 신청자 10명 중 4명이 2030세대라고 한다.

요즘 부쩍 ''이 화두다. 청년은 일자리가 부족해 아우성이고, 중년은 밥벌이 기간을 늘리느라 허덕이며, 노년은 100세 시대의 여명을 굶지 않으려 발버둥이다. '집밥'이나 '세끼'를 타이틀로 인기를 끌고 있는 TV 프로그램에서는 모조리 남자가 음식을 한다. 밥 짓기에도 이제는 남녀가 따로 없다. 그만큼 밥그릇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밥벌이는 신성한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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