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는 왜 박서보를 버렸나]
["6·25 때 느그 아버지는 뭐 하셨노"]
광주는 왜 박서보를 버렸나
[김윤덕 칼럼]
군부독재에 침묵했다고 기습 시위한 집단에 떠밀려 ‘박서보賞’ 폐지한 비엔날레
광주는 저항서 화해로 가는데 80년대 매몰돼 예술을 정치화
그들은 예술가도 뭣도 아니다
‘코 없는 코끼리’는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작품이다. 초등생은 물론 중장년 관객까지 흰색 분홍색 연두색으로 칠해진 대형 코끼리 조형물을 만져보고 신기해하며 사진을 찍는다. 코끼리에게 코가 없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들고 작가 엄정순은 시각장애 어린이들과 함께 살아 있는 코끼리를 만져보고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들어본 뒤 그 형상을 점토로 만들게 했다. 한 아이는 코끼리에게 먹이를 주다 손이 코끼리 코로 빨려 들어간 바람에 코끼리가 재채기를 하고 콧물이 튀는 소동을 겪었다. 그 아이는 코끼리를 진공청소기의 호스 모양으로 빚었다.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견에 사로잡히는 건 아닌지 반문한 이 작품은 광주비엔날레가 처음 제정한 ‘박서보 예술상’을 수상했다. 폐암 3기로 투병 중인 91세 단색화 거장 박서보는 무명이나 다름없던 작가에게 상금 10만달러를 전달하며 “첫 수상자가 한국인 여성이라 기쁘다”고 했다.
(좌)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 2023.4.5/뉴스1/(우) 올해 광주비엔날레가 제정한 제1회 박서보 예술상 수상작인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의 일부. 시각장애인 아이가 진공청소기의 호스 모양으로 빚은 코끼리를 대형화한 것이다. /광주=김윤덕 기자
그러나 이 흐뭇한 광경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제정 첫 회 만에 박서보 예술상이 폐지됐기 때문이다. 미술계 일부 그룹과 시민 단체들은 개막식에 기습적으로 나타나 “광주 정신 먹칠하는 박서보 상을 폐지하라”고 외쳤다. 군부독재 시절 침묵했다는 이유다. 일부 비평가도 가세했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이며 도발적인 작업을 통해 예술 담론의 틀을 제시해야 할 광주비엔날레가 박서보의 작품 한 점 가격에 비엔날레의 권위를 팔았다고 비판했다. 비엔날레 측은 “원로 작가를 어디까지 망신 줄지 걱정돼 폐지를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소동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관람객들로부터 역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쉽고 재미있고 따뜻해서다. 붉은 머리띠 두르고 종주먹 내두르는 걸개그림 아니면 도통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기 힘든 영상물, 난해한 설치물들이 즐비해 관람 자체가 고문이었던 과거 비엔날레와는 달랐다.
살벌한 정치 구호가 빠진 자리엔 위트와 촌철, 성찰이 들어찼다. 흙 향기 물씬한 숲속에 물의 정령들이 나와 상처투성이 된 심신을 치유해줄 것 같은 아프리카 작가의 ‘영혼 강림’을 비롯해, 식민 지배와 강제 이주의 아픈 역사를 어린아이가 그린 듯 맑고 담백한 색채로 승화한 캐나다 이누이트 원주민들의 그림까지,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의 삶과 철학,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을 보며 관객은 모처럼 예술이 주는 치유를 경험했다.
예술 감독을 맡은 이숙경 테이트모던 수석 큐레이터의 공이 컸다. 그는 “관객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뉴스를 보는 듯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상에서 정치적 요구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만 할 수 있는, 예술의 힘으로 풀 수 있는 것도 많다”고 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의 타이틀도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다. 노자 도덕경 ‘유약어수(柔弱於水)’에서 차용한 이 문구는 5·18민주항쟁 43주년을 맞아 ‘저항’에서 ‘화해’ ‘용서’로 진화해가는 광주 정신을 보여주는 듯했다. 말레이시아 작가 팡록 술랍이 5·18 시민군에게 건네는 주먹밥을 장미꽃으로 바꿔 그린 ‘광주, 꽃피우다’ 앞에서 많은 이들이 뭉클해하며 멈춰 선 이유다.
그 틀에서 보면 박서보 예술상 폐지는 치졸했다. 80년대에 매몰돼 미래를 열지 못하는 자폐적 집단의 선동이자 아집이었다. 박서보도 한때 전위예술,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였다. ‘국전’에 반대했고, 반정부적 작품이라고 전시장에서 철거 당한 이력도 있다. 그러나 민중미술이 지배하던 80년대 한국 화단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현대미술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맹주이기도 했다. 이우환 윤형근과 함께 단색화를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게 한 일등공신이다. 거장이 되기까지 영욕의 세월이 없는 작가 있을까. 작품 값이 수십억대면 예술이 자본의 시녀로 전락한 건가. 그들의 낡은 논리대로라면 김환기 백남준 등 그 어떤 작가도 미술상을 만들 수 없다.
시위 소식을 접한 박서보는 페이스북에 썼다. ‘어떤 이견도 없는 것보다 훨씬 좋은 현상이다. 역사는 반동하며 발전한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치열함이 없다. 사실관계도 맞지 않고 사유의 흔적도 읽을 수 없다.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엄정순 작가가 10년 넘게 천착해온 ‘코 없는 코끼리’ 프로젝트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를 비튼 것이다. 작가는 “시각은 여러 감각 중 하나일 뿐, 예술은 촉각 후각 청각 등 오감과 생각이 다 함께 만들어내는 거란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자기가 눈으로 본 것만 진실이라 우기고, 그와 다른 의견을 내면 적으로 상정해 단죄하려는 이들이 새겨야 할 말이다. 그들은 예술가도 뭣도 아니다.
-김윤덕 선임기자, 조선일보(2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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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느그 아버지는 뭐 하셨노"
전쟁 당시 부친의 굴곡진 인생… 유종호·윤명숙 등 진솔한 회고
처벌·고문당해도 세상 원망 안 해… '말 없는 아버지들'의 의미 새겨야
내일이 6·25다. 팔순 넘은 문학평론가와 그 연배의 화가 아내가 쓴 부친 회고를 읽었다. 남에게는 쉽게 꺼내기 힘든, 애증(愛憎)의 고백이었다.
우선 예술원 회장을 지낸 유종호(84) 전 연세대 석좌교수부터. 호되게 추웠던 충북 증평의 겨울. 친구들의 토끼털 귀마개를 탐내던 소년 유종호에게 부친은 '날 추워서 귀먹은 사람은 지금까지 없다'고 타박을 놨다. 인색했던 아버지. 청주농업학교가 학력의 전부였던 부친은 아무리 팔을 안으로 굽혀도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는 아니었다고 아들은 썼다. 그런데도 해방 이듬해 중학교 '국어 선상님'이 되었다.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으로 국문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던 시절의 행운이랄까. 하지만 새옹지마였다. 6·25 발발. 굼떴던 부친은 뒤늦게 피란을 떠났지만, 인민군에게 추월당해 사흘도 못 돼 멋쩍은 얼굴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특별한 소신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인민군 치하의 학교 운동장에서 농업학교 졸업생답게 채소나 키웠다. 그리고 석 달 만의 국군 수복. 목청 큰 동료 교사는 소년의 아버지에게 '부역자' 주홍글씨를 새겼다. "아니 그래, 그까짓 석 달을 못 참아 부역을 한단 말요?" 좋아하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부역자의 아들'은 속으로 이렇게 항변했다고 한다. "아니 석 달이 될지, 3년이 될지 어떻게 압니까. 누군 하고 싶어 부역했습니까."
두 번째는 윤명숙(81) 선생의 기억. 단색화 1세대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하고 있는 박서보 화백이 그의 남편이다. 스스로도 미술을 전공한 이 예술가의 아내는 지금도 마른오징어를 보면 심사가 복잡하다. 그림과 서예에 남다른 재능이 있던 부친은 6·25 당시 서울의 인민군인지 보위대인지에게 불려가 플래카드며 포스터를 그렸다고 했다. 아마 돈도 좀 받았던 모양이다. 당시 초등 6년생이던 딸에게 "제일 먹고 싶은 것 말해봐라"고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니까. 사실은 돈 벌러 나가지 말고 자기랑 놀아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딸의 입에선 자기도 모르게 오징어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장미와 오징어의 나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울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온 후 아버지는 붙잡혀서 혼쭐이 났고, 고문까지 당했다고 한다. 평생 날개 한번 못 펴고 생을 마감했지만, 자신에게 포스터를 그리게 한 이도, 자신을 고문한 이마저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딸은 썼다. "인민군 치하에서 건강한 남자라면 알게 모르게 부역에 동원되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때 아버지가 한 일은 오직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좌도 우도 없는 천국에서 부디 마음 편히 사시라."
두 편의 부친 회고를 길게 인용한 까닭은, 편 가르기 이분법에서 벗어나 지금 우리를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그리고 하나 더. 목청 한번 질러보지 못한 소심한 인생이지만, 이 삶들이야말로 우리 가정과 나라를 지탱해 온 평균적 인생 아니었을까 하는 점이다. 가난하고 공부도 별로 하지 못했지만, 닥치는 대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삶. 너는 누구 편이냐 캐묻기보다, 자부도 체념도 없이 묵묵하게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
내 아버지는 나라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너희 아버지는 그때 뭐 했냐고 묻던 국회의원을 기억한다. 당연히 부친에 대한 존중과 자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를 하지 않아서 오히려 지킬 수 있었던 '말없는 아버지'들도 있다. 가족을 버리지 않았고, 자기 자리를 버리지 않았고, 상대를 미워하거나 복수하지 않았던 아버지. 훈장이나 보상을 원하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더욱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어수웅 주말뉴스부장, 조선일보(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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