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교황권(敎皇權)]
[카노사의 굴욕.. 눈밭에 맨발로 사흘간 빌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이슬람과 타협해 예루살렘 되찾은 황제… 교황에겐 이단으로 몰려 파문당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1194~1250)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어요. 당시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되찾는 일은 신이 내린 의무였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제6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황제였어요. 그는 차분하게 오랜 세월에 걸쳐 군사와 장비를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 다다랐을 때는 정작 전투를 벌이지 않았어요.
당시 상대편이던 이슬람 측 지도자는 술탄 알 카밀입니다. 그 역시 현실 정치에 밝았던 인물이지요. 황제와 술탄은 길고 긴 협상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둘은 합의에 이릅니다. 예루살렘의 성역(聖域)은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이곳에 오는 유럽 순례자들의 안전도 보장한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라는 평전을 쓴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이는 합리적인 타협이었습니다. 기독교도들은 오랫동안 원하던 성지를 얻게 되었고, 이슬람 측 입장에서는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며 자기들 땅에 다시 쳐들어올 명분이 사라졌으니까요. 이제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는 평화롭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로마의 교황은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해 버립니다. 교황의 눈에는 황제가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 위해 너무 오래 준비한 것이 성전을 피하려고 꼼수를 부린 것으로 보였고, 이교도(이슬람)와 타협했다는 사실 자체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교황은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성스러운 땅을 피를 흘려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슬람 측에서도 술탄의 협상을 수치로 여겼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교에서도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파문을 당했어도 프리드리히 2세는 강력한 황제였습니다. 이후로 황제와 교황 사이에 날카로운 대결이 이어졌지요. 프리드리히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앞세웠습니다. 말하자면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했던 셈이지요. 반면, 당시 기독교는 ‘교황이 태양이라면 황제는 달’이라는 표현처럼 교회가 세상의 모든 권력 위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고대 로마제국처럼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켜 안정된 제국을 다시 만들려고 했습니다. 반면 교황은 모든 권위는 오직 신에게서 나오며, 황제의 권력은 교회를 넘어서면 안 된다며 강하게 맞섰지요. 그 결과 황제는 세 번이나 파문을 당하며 이단으로 몰리고 말았습니다.
황제와 교황 가운데 누구의 말이 맞았을까요? 황제가 죽은 후 중동의 평화는 깨졌습니다. 십자군이 중동 지역에 세운 국가들은 최후를 맞았고, 교황의 권위도 땅에 떨어지고 말지요. 혼란한 시대, 프리드리히 2세 시대의 정치 현실을 살펴보며 우리에게 필요한 혜안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조선일보(2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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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권(敎皇權)
3세기 기독교 확산하며 커져… 한때 황제도 무릎 꿇어
①기독교의 확산으로 교황은 황제권을 수여하는 권한까지 갖게 됐어요. 지금의 북부 이탈리아와 독일 지방까지 통치하게 된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800년 성탄절에 피에트로 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 ②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1077년 1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사죄하는 모습. 이를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불러요. ③교황이 묵인하던 면죄부 판매를 지적한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 /위키피디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일(현지 시각) "현재 유엔(UN)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을 해결할 힘이 없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어요. 국제 전쟁이나 분쟁을 해결할 만한 실질 권한이 없는 국제기구 한계를 지적한 건데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교황이 해서 더 의미가 새롭게 보이는 건 과거엔 교황이 유럽 국가 간 분쟁을 조율하거나 심판하는 등 역할을 담당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聖人 베드로 후계자
교황(敎皇)은 라틴어로 '파파(papa)'라고 해요. 이 말은 원래 '아버지'를 의미했지만, 서방 교회에서 각 교회 공동체의 장(長), 특히 수도원장과 대주교를 '파파스'라고 불렀어요. 그러면서 '공경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게 됐죠.
교황의 탄생은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는 과정과 관련이 있어요. 기원 후 1세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받고 인류애에 바탕을 둔 기독교가 창시됐어요. 로마 제국은 외래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었으나, 기독교가 다신교(多神敎)를 부정하고 황제 숭배도 거부하자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죠. 2세기 말 정치·사회적 위협을 겪던 기독교인들은 수장(首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에 로마 교구 교구장을 예수 12제자 중 대표 지도자 격이던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교황(敎皇)으로 삼고 서방 교회를 총괄하게 합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보는 의견도 있어요.
박해받던 기독교는 3세기를 거치며 로마인 중 10%가 믿을 정도로 세력을 넓혔어요. 이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결국 기독교를 공인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2년 기독교를 로마 제국 국교로 삼기에 이르지요. 황제 주도로 기독교 공동체에 막대한 재정적 지원이 이뤄지고, 로마와 예루살렘 등지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어요. 독실한 로마 귀족들은 교회에 자기 재산을 기부했고 교회가 부유해지자 교황 권세도 점차 높아지게 됩니다.
황제권 수여 권한까지 가져
교황권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나눠진 뒤 더 높아집니다. 이때 '교황령(敎皇領)'도 등장하는데요. 교황령은 교황이 세속적인 지배력을 갖는 지역을 뜻해요. 현재는 바티칸 시국으로 작아졌지만 한때 이탈리아 중부를 거의 아우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게르만족 침략으로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구심점을 잃은 서유럽은 여러 나라로 분열했어요. 이런 혼란 속에서 동로마 제국 영역에 있었던 로마 교구 교황 스테파노 2세는 게르만족 중 한 갈래인 롬바르드족에게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 서로마 땅에 세워진 또 다른 게르만족 나라인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교황을 통해 왕권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어했던 피핀 3세는 교황을 도와 롬바르드족으로부터 중부 이탈리아 지역을 빼앗은 다음, 교황에게 땅을 헌납합니다. 이게 교황령의 시초입니다.
이후 교황은 황제권을 수여하는 권한까지 가집니다. 피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샤를마뉴는 롬바르드 왕국을 무너뜨리고 지금 북부 이탈리아, 독일 지방까지 통치하게 됩니다. 그러다 800년 성탄절에 피에트로 대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 관을 받으며 대제(大帝)의 칭호를 얻어요. 교회라는 거대 조직을 가진 교황에게 지위를 인정받아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한 거예요.
황제보다 높았던 교황 권위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카노사의 굴욕' 사건입니다. 11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교회 개혁이란 명분으로 성직자 임명권을 황제로부터 가져오려고 했는데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던 하인리히 4세가 반발하자 그에게 폐위 선고를 내리죠. 이에 황제는 1077년 1월 추운 알프스산을 넘어 교황이 잠시 체류하던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성으로 가 교황에게 사죄해야 했어요.
십자군 전쟁 거치며 교황권 쇠퇴
그러나 교황권은 13세기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차츰 쇠퇴하게 됩니다. 원래 이슬람 세력 지배하에 있던 기독교 성지(聖地)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는 목표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200년 가까이 이어가면서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느라 힘이 빠져 교황과 교회 권위가 점점 떨어졌기 때문이죠. 교회가 점차 세속화되면서 타락과 부패도 심해졌어요. 중세 말기에는 성직자들이 '돈을 내면 죄를 사하여 준다'는 면죄부를 돈 받고 팔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도 높아집니다.
이 시기 교황 위신이 추락했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1309년 '아비뇽의 유수(幽囚·잡아 가두다)'입니다. 로마 교황청이 약 70년간 남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간 사건인데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성직자에게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어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반발했지만, 결국 황제 권위에 굴복합니다. 이에 새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이후 차례로 6명 프랑스인이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프랑스 왕이 교황청을 자신의 지배 아래 뒀던 시기이지요.
독일 신학자 마르틴 루터(1483~1546)는 1517년 교황이 묵인하고 있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반박문'을 발표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종교 개혁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어요. 종교 개혁가들로부터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 세력이 탄생했고, 이들은 교황 중심 로마 교회에서 이탈하고자 했지요.
교황권은 유럽 열강 세력 다툼 속에서 더욱 쇠퇴합니다. 유럽 절대 군주들은 이제 교황의 종교적 우위권을 거부했어요. 19세기 이탈리아 통일을 주장하는 세력들이 교황청 총리를 살해하고, 교황 비오 9세가 몰래 로마를 빠져나오는 일도 일어납니다.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시가 주권을 가진 독립 국가로 인정된 건 1929년입니다. 교황이 정치적 현안에 휩싸이지 않고 본연의 종교적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 정부와 바티칸 사이에 '라테라노 조약'이 맺어졌어요. 오늘날까지 교황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자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식되면서, 교황은 세계 정치와 외교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주고 있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 교황 비오 11세는 "나치주의와 공산주의를 단죄해야 한다"고 공표하기도 했지요.
[교황 선출 회의 '콘클라베']
추기경들이 모여 교황을 선출하는 회의를 '콘클라베'(Conclave)라고 해요. '열쇠로 걸어 잠글 수 있는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지요. 추기경들은 밀폐된 장소에 머무르며 교황을 선출해요. 역사상 가장 길게 이어진 콘클라베는 1268년으로 3년이나 끌었다고 하는데요. 이 결과 교황으로 선출된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는 1274년 콘클라베 규정을 엄격하게 제도화했어요. 사흘이 지나도 교황이 선출되지 않으면 저녁 식사에서 한 가지 요리밖에 먹을 수 없고, 닷새가 지나도 성과가 없으면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빵과 와인, 물만 제공됐다고 하네요.
-정효진 양영디지털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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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눈밭에 맨발로 사흘간 빌었다
파문 거두라고… 황제의 굴욕과 복수
1077년 이탈리아 카노사 성문 밖에 독일 왕 하인리히 4세가 서 있는 '카노사 굴욕'을 묘사한 그림. 하인리히 4세가 말총으로 만든 참회복을 입고 눈 위에서 맨발로 서서 카노사성에 머물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파문을 거둬달라며 용서를 빌고 있다. 영국 화가 아서 C 마이클 작품(1913년). /게티이미지코리아
1077년 1월, 독일 왕이자 장차 황제가 될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 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역인 카노사(Canossa)의 성에 찾아왔다. 이곳에는 그에게 파문 선고를 내린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머물고 있었다. 엄동설한 맹추위에 말총으로 만든 참회복을 입고 눈밭에 사흘 동안 맨발로 서서 용서를 빈 결과 교황은 파문을 거두어들였다. 이것이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사건이다.
국왕이 석고대죄하는 희대의 사건
국왕이 교황을 찾아가 석고대죄하는 희대의 사건은 어떤 맥락에서 벌어졌을까? 교과서적 설명에 따르면 이 사건의 원인은 서임권(敍任權) 투쟁에 있다. 서임권이란 주교나 수도원장 같은 교회 고위직을 임명할 권리를 뜻한다. 이 권리를 누가 행사하느냐, 교황이냐 아니면 황제나 국왕 같은 세속 지배자냐를 놓고 다툰 것이 서임권 투쟁이다. 곧 교회와 세속 권력 중 누가 더 우위에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카노사에서 벌어진 사건만 놓고 보면 국왕이 무릎을 꿇고 교황이 완승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전모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20여 년 거슬러 올라간 1056년, 황제 하인리히 3세가 죽었을 때 아들 하인리히 4세는 여섯 살에 불과했다. 독일 왕, 이탈리아 왕, 부르고뉴 왕 같은 왕위는 차지했지만, 황제위는 교황에게서 대관식을 승인받아야 가능했다. 그러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어린 국왕의 힘이 미약함을 이용해 독일 각지에서 귀족들이 분쟁과 봉기를 일으켰다. 특히 이전 황제에게서 영토를 많이 잠식당한 작센 지역 귀족들은 차제에 국왕의 간섭을 벗어던지고 그동안 빼앗긴 땅을 되찾고자 했다. 한때는 쾰른 대주교가 하인리히를 유괴하여 자기 통제하에 두기도 했다. 그렇지만 국왕은 점차 세력을 회복하여 귀족들의 봉기를 차례로 진압했다. 동시에 종교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자기 사람들을 주교와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 이 문제로 교황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교황은 세속인이 교회 인사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성직 매매(simony)죄에 해당한다면서, 그런 죄를 부추긴 하인리히의 부하들을 파문하며 압박했다. 교황에게 파문당하는 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내세에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치적 권위의 추락도 면하기 어렵다. 국왕이 교황의 견제를 당하는 것을 본 작센 귀족들이 공공연히 봉기에 나서자 하인리히는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교황은 국왕의 무도한 행위를 비난하는 서한을 보냈다. 파문당한 신하들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면 왕이라도 미사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교회 고위직 인사 문제에서 교황과 상의하지 않은 점을 맹렬히 비난했다. 결론은 세속 군주들은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에게 파문당한 독일 왕 하인리히 4세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을 둘러싼 투쟁을 벌인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15~1085년). /위키피디아
하인리히는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다. 1076년 독일 지역 주교 26명을 보름스에 소집하여 '보름스의 회신'을 작성해서 보냈다. '찬탈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성스러운 기름 부음을 통해서 된 왕이, 교황이 아니라 거짓된 수도사인 힐데브란트(그레고리오의 속명)에게'라는 서한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서한은 이렇게 주장한다. '당신이 찬탈한 사도 자리에서 내려와서 포기하라. 다른 사람이 성 베드로의 보좌에 올라가도록 하라. 나 하인리히는 신의 은총에 의한 왕으로 우리의 모든 주교와 함께 당신에게 말하노니, 내려가라, 또 내려가라, 저주받은 자여.'
교황에게 '당신이나 사퇴하라'는 식의 모욕적 답신을 보낼 때는 의기양양했겠으나 그 직후부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갔다. 교황은 서신에 서명한 주교들의 권한을 정지시켰고, 하인리히를 파문하면서 모든 기독교 신자가 그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독일 귀족들로서는 그들을 억압하던 국왕이 파문당하는 게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국왕에 대한 저항이 종교적으로 완전히 합리화되자 일부 귀족이 다시 반란을 일으켰고, 하인리히의 모든 권한을 문제 삼는 일종의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실제로 교황은 이 사태를 결말짓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일이 이쯤 되니 하인리히가 다급해졌다. 불온한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가는 것을 본 하인리히는 교황이 독일로 들어오기 전에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교황이 카노사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인리히는 카노사의 성주인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에게 교황 면담을 요청했다. 국왕이 철저하게 참회하는 모습을 연출하니, 교황으로서는 난감하게 되었다. 파문을 거두어들이면 더 이상 국왕을 압박할 수단이 없어지고, 그렇다고 파문을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용서를 모르는 사악한 교황이 된다. 장고 끝에 교황은 국왕을 용서하기로 결정했다.
두 교황과 두 국왕 간 다툼
하인리히가 진심으로 참회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곧 분명해졌다. 교황이 파문을 거두어들이자마자 하인리히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그레고리오가 교황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클레멘트 3세라는 이름으로 새 교황을 옹립했다. 그동안 독일 귀족들은 하인리히를 폐하고 루돌프(Rudolf von Rheinfelden)라는 인물을 새로운 독일 왕으로 선언했다. 이제 세상에는 두 교황과 두 독일 왕(다시 말해 예비 황제)이 다투는 최악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상황은 막장으로 치달았다. 1080년 대립 국왕 루돌프가 사망하고 독일 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고 판단한 하인리히는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갔다. 교황은 남부 이탈리아에 주둔 중이었던 노르만인들을 불러들였다(왜 여기서 노르망디 출신 용병들이 등장하는지는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자). 양측이 여러 번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1084년 로마가 약탈당했고, 여기 맞서 로마 시민들이 봉기하자 교황은 노르만인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신했지만 얼마 후 생을 마쳤다. 그 전에 하인리히는 그가 추대한 교황 클레멘트 3세에게서 황제 관을 받았다.
장래 황제가 될 인물이 맨발로 눈밭에 서서 용서를 구할 때에는 교황이 이긴 듯하지만, 그가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가 교황을 축출했을 때는 황제가 최종 승리를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교황과 황제 중 누가 더 우위를 차지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최종적 결말이 나지 못했다. 장기간의 소모적 투쟁 끝에 양측이 타협을 모색한 것이 1122년의 보름스 협약이다. 이 협약에 따르면 추기경과 수도원장은 교회에 의해서만 자유롭게 선출된다고 천명했으니 이 점은 황제가 양보한 것이다. 한편 황제는 선거에 출석할 수 있으며 만일 다툼이 있으면 황제가 개입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으니 이는 교황이 양보한 것이다. 하늘 아래 누가 최고 권한을 쥐는가 하는 문제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큰 문제로 남게 된다.
["교황청 지켜낸 女전사"]
카노사성 성주였던 토스카나의 여백작 마틸다(1046~1115년). /위키피디아
토스카나 여백작 마틸다는 하인리히 가문과 구원(舊怨)이 있었다. 황제 하인리히 3세가 그녀와 어머니를 인질로 잡아가서 감옥에 가두고 토스카나의 영토를 빼앗으려 했기 때문이다. 겨우 풀려나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다음 철저한 교황주의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카노사 사건 당시 독일로 여행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안전을 보장해 준 것은 거의 전적으로 마틸다의 공적이다. 하인리히 지지 세력이 교황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마틸다는 군사를 동원하여 교황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카노사의 성으로 피신시켰다. 하인리히가 바깥에서 참회 퍼포먼스를 하는 동안 성안에서는 마틸다가 교황에게 이 사태를 해결할 조언을 했다. 위기에 맞서 '오직 베드로의 딸 마틸다만이 저항했노라(sola resistit ei Mathildis, filia Pétri)'. 이런 공적을 인정하여 교황청은 17세기에 마틸다의 시신을 베드로 성당 내부로 이장했다. 여성으로는 유일하다. 천재 조각가 베르니니가 마틸다의 조각상을 세우고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교황청을 지켜낸 마틸다 여백작은 고대 아마존 전사에 필적한다'는 비명을 썼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0-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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