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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울 때면 '전쟁과 평화'] [백학의 노래]

뚝섬 2025. 1. 11. 06:52

[괴로울 때면 '전쟁과 평화'

[백학의 노래]

 

 

 

○ 트럼프, 공언했던 “러시아·우크라 전쟁 24시간 종전”을 “6개월 내”로 수정.

     포부가 거창할수록, 목표는 현실적으로.

 

-팔면봉, 조선일보(2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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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울 때면 '전쟁과 평화'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어린 시절의 내게는 소설에 나오는 그럴듯한 말을 따라 하는 버릇이 있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기라도 한 듯 등장인물이 하는 말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으로부터 잘 지내느냐고 묻기도 어려운 시절이라는 말을 듣고 하마터면 열 살 때 버릇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열 살이 아니고,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는다. 내가 따라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어요? 이렇게 정신적으로 괴로운 때에…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 같은 세상에 평온할 수 있을까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시작되자마자 나오는 말이다.

 

나는 괴로울 때마다 이 책을 편다. 나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로부터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낄 때. 그 일들이 너무도 크고 복잡하고 어지러워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참혹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란 존재의 미미함과 무능함에 내가 먼지처럼 느껴질 때. 산다는 건 뭔지 인간이라는 건 뭔지 회의감이 들 때. ‘전쟁과 평화’를 펴서 아무 데나 읽는다. 첫 페이지부터 읽기도 하고 4권의 마지막 장부터 읽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일종의 성경으로 여긴다.

 

최근에 세상에 대한 우울감이 커져 다시 나의 성경을 폈다. 책을 보다가 내가 느끼고 있는 고통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벨트슈메르츠Weltschmerz. ‘세계’라는 뜻의 벨트(welt)와 ‘고통’이라는 뜻의 슈메르츠(schmerz)의 합성어인 독일어. 그러니까 ‘세계의 고통’이라는 뜻이다. 벨트슈메르츠는 이런 것이라고 한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차갑기 그지없는 거대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 밀려드는 고통과 슬픔. 다시 말해서 나의 주체성과 자유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현실이 있고, 그런 현실의 파도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속절없이 휩쓸리는 모래알 같은 내 모습에서 오는 통증을 말한다.”(이진민,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전쟁과 평화’에는 세계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 커서 나 정도의 고통은 모래알처럼 하찮게 느껴진다.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원인, 그러니까 “이렇게 정신적으로 괴로운 때”로 몰아넣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이라는 침략자가 세계를 뒤흔들고 있어서 불안이 고조되는 러시아가 배경이다. 나폴레옹을 규탄하는 게 소설의 첫 문장일 정도. 소설은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이 살롱에 모여 사교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폴레옹을 추앙하는 사람도 있어서 신경전이 벌어지는데, 나폴레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이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삶의 가능성을 대리 충족하는 메타포라서다. 일개 중위에서 황제가 된 세계적 신분 상승의 아이콘 아닌가.

 

소설의 시간은 1805년과 1812년, 그리고 1820년을 다룬다. 1805년은 유럽을 침략해 프랑스의 영토로 만든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외교적 관계를 제안하고, 러시아는 거부하는 상황이다. 1812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사상자가 많았던 전쟁 중 하나로도 말해지는 1812년 전쟁을 다룬다. 누군가는 ‘러시아 원정’이라고 하고 러시아에서는 ‘대나폴레옹 조국 전쟁’이라고 하는 그 전쟁을. 1820년의 시점은 참혹한 전쟁이 끝난 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전쟁과 평화’를 처음부터 읽는다는 것은 1805년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4권의 마지막 장부터 본다는 것은 1820년의 시점을 읽는다는 말이다.

 

오늘의 나는 4권 마지막에서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많은 사람이 죽고 나서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가까운 사람이 죽고 난 후의 사람들은 죽음에 위축되어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미래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고인을 욕되게 하는 일로 느낀다. 결국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가버린 세계가 아닌 이 세계가 자신들이 살아야 하는 세계라는 현실 인식이다.

 

“수백만의 사람이 서로를 죽이고 100만의 절반이 죽은 사건”을 다루는 이 소설에는 역자인 박형규 선생의 말처럼 전쟁과 죽고 죽이는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질투하고, 진리와 미덕을 추구하는 이야기와 열정과 따스함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의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말한다. 오늘 나의 성경에서 발견한 문장은 이것이다. 삶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으므로 살아가야 했다.”

 

-한은형 소설가, 조선일보(2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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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의 노래

 

[자작나무 숲]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워낙 긴 소설이다 보니 ‘전쟁’은 건너뛰고 ‘평화’만 읽는다는 농담도 있다. 하지만 전쟁 이야기가 의외로 재미있음을 실제 독자들은 잘 안다. 가령 주인공 안드레이 공작이 치명상을 입고 하늘을 바라보는 대목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뒤로 쓰러진 안드레이의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직전의 전투 장면이 아닌 드높은 하늘이다.

 

무한한 하늘은 전쟁의 덧없음을 깨우쳐준다. ‘참으로 조용하고, 평온하고, 장엄하다…. 우리가 뛰고 소리치고 싸우던 것과는 다르구나. 적의와 공포에 불타는 얼굴로 프랑스인과 포수가 서로 장전봉을 잡아당기던 것과는 전혀 다르구나. 저 높고 끝없는 하늘에서 구름은 전혀 다르게 흐르는구나. 전에는 왜 저 높은 하늘을 보지 못했을까?’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캅카스와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많은 소설을 썼다. 작품 하나하나가 전쟁의 심리학(혹은 사회학) 교본인 동시에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대주제의 망원경이다. 크림의 세바스토폴 방어전을 기록한 ‘세바스토폴 이야기’는 특히 오늘의 우크라이나 사태와 겹쳐져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러시아가 프랑스-영국 동맹군에 항전하다 퇴각하고 마는 뼈아픈 역사 현장에 스물여섯 살 청년 장교 톨스토이가 도착한다.

 

처음엔 영웅적 애국심으로 피가 끓지만, 고통과 죽음의 현장을 목도한 후에는 의문에 다다른다. 대체 무엇이 악의 표정이고 무엇이 선의 표정인가? 누가 악인이고 누가 영웅인가? 한편으론 이런 기발한 발상도 해본다. 교전 중인 양편의 병사 한 명씩만 남기고 다 돌려보내면 안 될까? 8만 대 8만 병력이 싸우는 것과 일대일 대표로 싸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후자가 더 인도적이고, 따라서 더 합리적 아닌가?

 

톨스토이 말년의 반전론은 전쟁의 역설에서 진화한 것이다. 진실은 우렁찬 군악대 연주, 위풍당당한 행진, 엄숙한 전사자 장례식, 십자가 훈장, 연금 따위의 껍데기 아래 깊숙이 감춰져 있다. 그것이 이른바 ‘불편한 진실’이다. 자신이 쓰고 있는 전쟁 이야기의 주인공은 ‘진실’이라고 대작가는 말했다. 벨라루스의 2015년 노벨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아연 소년들’이라는 전쟁 보도 소설에서도 인용한 말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죽어간 병사들 유족과, 죽음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 자신의 목소리는 전승 기념일 행사나 기념비, ‘불멸의 횃불’ 등이 과시하는 위엄과 동떨어진 막장의 진실을 증언한다.

 

제목 ‘아연 소년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우선 전사자들이 아연으로 만든 관에 담겨 고향에 돌아왔고, 게다가 그들이 아직은 ‘소년’이었다는 말이다. 러시아 징병 제도에 따르면, 18~27세 남성은 1년 병역 의무를 지니며, 17세에 신체검사를 거쳐 18세부터 입영 통지를 받는다. 놀라운 것은 2021년 징집 대상 120만명 중 최종 입대자는 20% 정도에 불과하다. 어느 한 해가 아니라 대체로 그렇다. 그만큼 면제받는 일이 많고(일례로 대학생 자동 면제), 또 그만큼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는 얘기다.

 

미안한 말이지만, ‘잘난’ 청년은 징집당하지 않는다. 가난하고, 교육 수준 낮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덜 건강한 변방 청년들이 군에 간다. 더 나은 미래가 없으면, 1년 의무 기간 이후에도 군에 남는다. 30년 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그러했듯,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사자 상당수가 다게스탄, 부랴트, 칼므이크 등의 소수민족이거나 머나먼 시골 지방 출신인 것은 그 때문이다. 전쟁터의 하늘을 올려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그저 살고 싶었어요.” ‘아연 소년들’에 나오는 한 징집병의 고백이다. 사실 톨스토이는 성숙한 귀족 장교의 내면을 보여주었을 뿐, 일반 병사가 하늘에 대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미처 그려내지 못했다. 그러나 알고 싶었을 것이다. 정말 그들은, 총알받이로 죽어가던 힘없는 ‘소년’들은, 마지막 순간 하늘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다게스탄 출신 시인 라술 감자토프가 죽은 병사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민족어로 쓴 전쟁시가 있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피에 젖은 벌판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은/ 대지에 쓰러진 것이 아니라/ 하얀 학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라고.// 그들은 아직도 그곳을/ 날며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자주, 서글프게/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잊는 것이다….’ 이 시에 멜로디를 붙인 것이 바로 1990년대 드라마 ‘모래시계’ 주제곡 ‘백학(Zhuravli)’이다. 오늘의 나를 만든 노래이기도 하다. 더없는 슬픔과 아픔이 나를 러시아 문학 세계로 인도했다.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조선일보(22-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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