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 R&D, '동인도 회사'의 민관 합작 모델 적용해야]
[美, 대만·네덜란드 2개의 칼로 중국을 베다]
[공산당이 반도체 회사 직접 운영]
정부 주도 R&D, '동인도 회사'의 민관 합작 모델 적용해야

학창 시절 세계사 수업에서 ‘동인도 회사’라는 개념이 흥미로웠다. ‘16세기에 웬 회사’라는 궁금증은 제국주의와 대항해시대를 이해하는 열쇠였다. 동인도 회사는 유럽 열강이 아시아 진출을 위해 설립한 일종의 무역 회사였다. 하지만 단순한 상업 조직을 넘어 사법·치안권, 외교·군사행동권까지 행사했다. 요즘 표현으로 민관 합작 모델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자원을 수탈하면서 식민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거버넌스 관점으로만 좁혀 보면 국가의 목표를 민간의 역량으로 실현한 나름 혁신적 접근이었다. 식민지 경영을 민간이 주도하며 신속하고 유연한 의사 결정, 전문적 관리, 효율적인 자원 동원 능력을 발휘해 제국주의 팽창에 날개를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식 패권 시대는 저문 지 오래다. 하지만 총성 없는 기술 패권 시대가 막을 올렸다. 선진국은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고, 그 성과를 보급·확산하는 데 주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각종 로드맵, 이니셔티브, 프레임워크 같은 정책들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R&D 성과가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혁신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그 원인은 단순한 정책·제도·역량의 측면이 아니라 더 큰 구조적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는 기본적으로 공익과 사회적 가치 실현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연구 성과를 민간으로 이전하고 확산시키며 실용화하는 건 영리를 추구하는 시장 메커니즘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기초 연구의 성과가 ‘죽음의 계곡’을 넘어 시장에서 꽃피우려면 과감한 도전과 위험 감수가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공공 연구 기관의 기술 사업화 전담 조직(TLO)은 이런 역할 수행에 태생적·구조적 한계가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도국들은 새로운 민관 합작 모델을 창안해 냈다. 독일 막스플랑크, 영국 옥스퍼드대학, 일본 이화학연구소, 이스라엘 와이즈만 등 세계적 연구 기관들이 소위 ‘이노베이션 회사’라 불리는 민간 기술 사업화 전문 조직을 운영 중이다. 동인도 회사만큼이나 생소한 이 모델은 공공 영역의 기술에 민간의 역량과 자원을 결합해 파괴적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대표적으로 코로나 팬데믹 당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성공은 옥스퍼드대의 기술과 ‘옥스퍼드 이노베이션’의 사업화 역량이 결합한 성과였다.
최근의 혁신 경쟁은 민간 주도와 정부 지원이 상호 보완적으로 협력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주·항공, 양자 기술 같은 아직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첨단 분야에서도 민간 기업이 정부 지원과 시장의 선행 투자에 힘입어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막대한 정부 자금이 투입된 연구 성과의 원활한 기술 사업화에서 출발한다. 공적 가치와 민간의 강점을 융합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기존 TLO 체계’의 한계를 극복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를 통해 정부 R&D 성과가 파괴적 혁신의 마르지 않는 마중물이 되어야겠다.
대항해시대 서구 열강의 식민 정책을 상징하는 동인도 회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윤리적·법률적 한계를 안은 채 잘못된 항로로 나아갔지만, 동인도 회사가 펼쳤던 민관 합작의 돛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교훈을 남긴다. 공공 연구 성과와 민간 기술 이전 역량이 결합한 이노베이션 모델이 기술 패권 시대, ‘거친 혁신의 바다’를 건널 새로운 돛이 되길 기대한다.
-오상록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조선일보(25-02-25)-
______________
美, 대만·네덜란드 2개의 칼로 중국을 베다
지난달 10일(현지 시각) 대만 반도체 기업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州)에 자본금 35억달러(약 3조9000억원)의 신규 법인을 설립했다. TSMC는 앞으로 5년간 120억달러(약 13조3000억원)를 투입해 최고 공정 기술의 반도체 위탁·제조 공장을 짓는다. 5나노(1나노는 10억분의 1미터)의 가는 선폭으로 회로를 그리는 공정이다. 애리조나는 40년 전 인텔이 반도체 공장을 가동한 미국 반도체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다. TSMC의 첫 미국 공장 건설은 중국과 반도체 전쟁을 치르는 미국이 최고의 우군(友軍)을 확보함을 뜻한다. 반도체 업계 안팎에선 “미 정부가 보조금 30억달러를 약속했다”는 말도 나온다.

미국의 주요 반도체 기업
미국 연방의회는 이달 처리할 ‘국방수권법(NDAA) 2021’ 법안에 반도체 진흥 조항을 넣었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프로젝트에 보조금 250억달러를 주는 방식이 거론된다. 건당 최대 30억달러가 지원된다. 미국이 국방수권법에 반도체 진흥 조항은 넣은 건 반도체를 단순히 하나의 산업이 아니라 국가 안보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5G(5세대 통신) 등 차세대 테크놀로지의 두뇌인 반도체 분야에서만큼은 중국에 틈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비상 걸린 반도체 1위 미국
미국은 인텔·퀄컴·엔비디아·마이크론 등을 앞세워 세계 반도체 시장의 47%를 장악한 최강자다. 시장 점유율만 놓고 보면 중국(5%)은 미국에 상대가 안 된다. 예컨대 PC의 두뇌인 CPU는 인텔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통신용 칩은 퀄컴이 압도적인 세계 1위다. 인공지능 칩 분야의 1위 후보인 엔비디아도 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반도체 아성에 중국 위협론이 거론된 건 지난 6월이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반도체가 지난해 미국에서 생산되는 양을 넘어섰다는 시장조사 기관 IC 인사이츠의 집계가 나온 것이다. 반도체 생산량 점유율에서 중국은 2018년보다 1.4% 포인트 증가한 13.9%로, 미국(12.8%)을 추월했다.
고부가가치를 좇는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주로 설계만 하고 생산은 외국 기업에 맡겼다. 반면 중국은 자국 기업에 설립 자금을 대고 외국 기업 공장도 유치했다. 2019년 새로 건설된 반도체 공장 6개 가운데 4개가 중국에 지어졌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6월 연례보고서에서 “2025년이면 중국의 반도체 생산량은 전 세계 24%로, 미국보다 2배 이상 커진다”는 전망을 내놨다. 2030년엔 30%대로 급증하는 것으로 예상했다. 반도체는 산업 분야뿐만 아니라 미사일과 같은 군수 물자에도 쓰이는데, 자칫 미국 기업이 반도체 설계도를 그려서 중국 기업에 생산을 맡겨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는 보고서에서 “정부는 500억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풀어, 미국 내 반도체 생산을 확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대만 TSMC와 네덜란드 ASML 우군 확보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 “반도체 공급망 보호와 기술 투자로 중국과 경쟁에서 승리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을 완성하고 중국 반도체 싹을 자르겠다는 의지다. 이런 전략을 추진하는 핵심 동력은 미국 기업이 아닌, 대만의 파운드리 회사 TSMC와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회사인 ASML이다. 핵심 반도체 생산·장비 회사가 미·중 반도체 전쟁에서 미국 편에 섰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외국 기업에 중국 화웨이와 거래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 TSMC는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TSMC 입장에서 화웨이는 애플 다음으로 반도체 물량을 많이 맡기는 두 번째 큰 고객이다. 화웨이 입장에선 TSMC의 초미세 공정 공장이 없으면 프리미엄 스마트폰인 메이트40프로에 들어가는 독자 개발 ‘5나노 기린 9000 프로세서’를 만들지 못한다. 중국 반도체 기업이 최고의 설계도를 개발해도 TSMC 없인 제작이 불가능한 것이다.
반도체 장비 업체인 ASML 역시 중국에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판매를 중단했다. EUV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 기업만 유일하게 생산하고, 경쟁사인 일본 니콘과 캐논은 개발 실패한 상황이다. 현지 언론은 네덜란드 정부가 ASML 측에 판매 거절을 요청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EUV 노광 장비는 빛으로 회로를 그리는 장비인데 TSMC도 대당 2000억원이 넘는 이 장비를 들여다 쓰고 있다. 중국 파운드리 업체인 중신인터내셔널(SMIC)이나, 양쯔메모리와 같은 메모리 반도체 기업도 ASML 장비 없이는 첨단 반도체 생산이 불가능하다. 반도체 업체의 고위 임원은 “대체 불가능한 TSMC와 ASML은 미국 입장에서 중국 반도체 싹을 자르는 칼”이라며 “당분간 중국은 낮은 품질의 반도체라도 대량 생산에 치중하고, 최첨단 제품 제조에선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호철 기자, 조선일보(20-12-03)-
_______________
공산당이 반도체 회사 직접 운영
美에 맞선 中의 실험
중국 반도체 굴기(崛起)의 선봉인 칭화유니그룹(清華紫光)은 지난 13일 상하이은행이 주관한 채권단 회의에서 13억위안(약 2200억원)의 회사채 만기 연장에 실패했다. 애초 만기 연장에 80% 이상 채권단이 찬성했는데, 뜻밖에 중국 국유기업 채권단에서 반대표가 나왔다. 일부에선 중국 정부가 칭화유니그룹을 포기하는 것 아니냐고 분석했다. 하지만 중국 현지 언론과 전문가들은 정반대 해석을 내놓고 있다. 민간에 반도체 기업 경영을 맡기고 뒤에서 자금을 댔던 중국 정부가 미국의 정권 교체를 앞두고 국유화와 경영권 장악을 통해 반도체 산업을 직접 키우는 전략으로 선회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가 핵심 반도체 기업을 속속 국유화(國有化)하며 경영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중국은 수년간 수십조원의 자금을 쏟아부었지만, 미국 측이 건 특허 소송이나 장비 반입 금지와 같은 견제 탓에 세계 반도체 패권은커녕 중국 내 자급에도 실패했다. 이젠 민간에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공산당 주도로 반도체 업계를 재편해 일사불란한 ‘원차이나 반도체’를 만드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인적·기술적 파트너를 대만에서 일본으로 바꾸려는 시도도 뚜렷해지고 있다.

◇공산당원이 경영권 장악
중국 국립대 칭화대학이 설립한 칭화유니는 양쯔메모리(YTMC), 유니SOC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양쯔메모리는 앞으로 10년간 메모리 반도체에 8000억위안(약 134조원)을 투자할 계획이고, 유니SOC는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과 함께 중국 최고로 꼽힌다.
이런 중국 반도체 굴기의 핵심 기업인 칭화유니에 최근 큰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회사채 만기 연장 실패 이틀 전인 지난달 11일에는 국유기업 칭화홀딩스의 룽다웨이 공산당 서기가 회사 경영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현지 언론은 그가 곧 공동 회장에 취임한다고 보도했다. 지금까진 엔지니어 출신의 자오웨이궈 회장이 단독 회장(CEO)이었다. 만기 연장 거절은 공산당의 경영 참여 명분이자, 민간인 경영자에 대한 경고였던 셈이다. 중국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한 기업인은 “당의 대변인 격인 서기가 CEO 역할까지 맡는 것은 이례적이다”라고 했다.
칭화유니는 또 지난 6월에는 ‘국유기업 양강산업그룹이 지분 33%의 신규 주주로 참여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유와 시점은 밝히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자오웨이궈 회장이 창업한 민간기업 치엔퀀투자그룹의 칭화유니 지분은 49%에서 33%로 줄고, 중국 정부 지분(칭화대와 양강산업)은 66.6%가 된다.
다른 중국 반도체 기업도 속속 국유화되고 있다. 이달 중순 반도체 위탁·제조(파운드리) 업체 훙신반도체(HSMC)는 민간 지분을 모두 우한 지방정부 소유 기업에 넘겼다. 지방정부가 100% 지분을 확보한 것이다. 세계 5위 반도체 파운드리인 중신인터내셔널(SMIC)은 1·2대 주주가 모두 국유기업(다탕홀딩스 17%, 신신홍콩캐피털 15.76%)이다. D램 제조업체인 푸젠진화(JHICC)의 1대 주주인 푸젠진장산업발전그룹(35.86%)도 국유기업이다. 푸젠진화는 중국 공산당이 경영권을 완전히 가져간 사례다. 이 회사는 작년 1월 제1차 사내 당원대회를 열고 선거를 통해 신임 회장으로 루원성 부회장을 선출했다. 주주총회가 아닌 공산당원 대회에서 CEO를 선출한 것이다.
◇일본에 손 내미는 중국
지난 8월 중국 포털 바이두는 “중국 반도체의 빠른 진격에는 백전노장 일본인이 있다”는 기사를 올렸다. 당시 칭화유니의 자회사 서안칭화유니가 8기가바이트의 DDR4램을 공개했는데 그 배경에 일본인이 있다는 것이다. 바이두는 “72세 일본인인 사카모토 유키오 전(前) 엘피다메모리 사장이 작년 11월 칭화유니그룹의 고급부총재 겸 일본 지사장으로 취임해 D램 개발에 전기를 마련했다”고 전했다. 사카모토는 한때 ‘한국 타도’를 외치며,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인 엘피다를 이끈 인물이다. 사카모토는 최근 일본 니혼게이자이 인터뷰에서 “내년 봄 경쟁력 있는 D램을 내는 게 목표”라며 “일본인 최고 개발자 100명을 모으는 중”이라고 말했다.
사카모토는 지난달엔 대만인 가오치취안 D램 경영·개발 총괄이 퇴임하자, 그 뒤를 이었다. 세계 반도체업계에선 영어 이름인 찰스 카우로 유명한 가오치취안은 대만 D램 업체인 난야의 CEO를 역임, ‘대만 D램의 대부’로 불린다. 2015년 칭화유니에 와, 128단계 적층 3차원 플래시 메모리의 개발·양산을 이끌었다. 대만 인재로 한계를 느낀 중국이 일본에 러브콜을 던지는 것이다. 과거 반도체 1위였던 일본은 반도체 산업은 붕괴했지만 인재와 기술은 여전히 최고 수준이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고위 임원은 “중국은 2025년 반도체 자급 70%가 목표지만, 올해도 20%에 그쳤다”며 “실패를 인정한 중국이 국유화로 장기전을 대비하면서 일본과 연대로 돌파구를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호철 기자/오로라 기자, 조선일보(20-12-01)-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業務-經營]' 카테고리의 다른 글
["美, 5년뒤 첨단 칩 생산 2위"… 한국·대만 '반도체 아성' 무너지나] (1) | 2025.03.08 |
---|---|
[‘관세 전쟁’ 포문 열린 날 1000억$ 지른 TSMC.. 진퇴양난 韓 기업] (0) | 2025.03.05 |
[SK하이닉스, 용인 클러스터 착공...투자 계획 6년 만] .... (0) | 2025.02.26 |
[日반도체 기술 심상찮다… 낸드 부문, 한국에 한발 앞서] .... (0) | 2025.02.23 |
[공장은 TSMC, 설계는 브로드컴... '美 반도체 상징' 인텔 쪼개지나] (0) | 2025.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