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새마을운동]
[민주당과 박정희]
[한 섬에 있는 두 나라의 명암]
1970년대 새마을운동
3만3267곳 마을에 시멘트 공급… '1000년 초가' 농촌 탈바꿈
최근 농촌으로 귀농하면 빈집이나 노후 주택을 개량할 수 있도록 지원금을 주는 지방자치단체가 많습니다. 덕분에 농촌 풍경이 다채로워지고 있다고 해요.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가나 농촌은 어느 지역을 가도 모습이 비슷했습니다.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담벼락, 마을 회관 등 전국 어느 마을이나 경관이 거의 똑같았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농촌 자립의 전초지' 잇따라 소개
우리나라 농촌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초가지붕이 70% 이상이었어요. 길이 좁아 우마차(牛馬車·소나 말이 끄는 수레)도 잘 다니지 못했죠. 그런데 일부 마을에선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기와나 함석, 슬레이트 등으로 개량하고, 마을 길을 넓혀 우마차와 차량이 다닐 수 있게 했어요. 마을 주민이 단합해 식량을 증산하고 축산, 과수 재배 등을 통해 소득 증대에 힘쓰기도 했죠. 농한기에는 가마니 짜기와 개간 사업 등을 벌였어요. 심지어는 '도박 추방' '술집 없는 마을' 등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죠.
1960년대 변화하는 마을의 모습이 신문과 잡지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 1월 한 일간지는 '보람에 산다'라는 제목으로 발전하는 마을 모습을 7회에 걸쳐 소개했어요. 기사에는 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는 마을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요. 전국 꽃의 70% 정도를 생산하는 마산 꽃마을, 개간한 산지에 과일과 가축을 키워 소득을 증대한 익산 개간촌, 화전민들이 황무지 150정보(町步)를 개척한 철원 화전민 새 동네, 가정에서 만든 낚싯대로 일본산 제품을 대체하고 수출까지 하는 용인 낚싯대 마을, 갯벌을 막아 염전과 백합 양식장을 만든 오식도 섬마을, 온 동네가 닭을 길러 생산한 달걀을 미군에 대량 납품하는 순천 양계마을 등이 소개됐어요.
당시 중앙 부처였던 내무부(현재 행정안전부)는 전국 21개 마을을 선정하고, 각 마을 발전 사례를 수집해 잡지 '지방행정'(1968년 2월호)에 소개했어요. 특집 기사 제목은 '농촌 자립의 전초지를 찾아'였어요. 21개 마을에서 하는 지붕 개량과 마을 길 넓히기, 황무지 개간, 간척 사업, 원예 농업을 통한 소득 증대, 농가 부업 등을 소개했어요.
'새마을 가꾸기' 사업으로 확산
이처럼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는 변화하는 마을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특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경북 청도 신도마을과 1971년 경북 영일 문성마을을 방문했는데, 이후 이른바 '새마을 가꾸기 사업'이 전국 모든 마을에서 들불처럼 번져갔어요.
신도마을은 1950년대 후반 이후 사과를 재배하면서 경제적으로 부유한 마을이 됐습니다. 소득 수준이 향상되자 마을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마을 안길 정비, 지붕 개량, 담장 보수, 소하천 정비 등 사업을 벌였어요. 1967년에는 통일호 열차가 하루 2차례씩 정차하는 간이역(신거역)이 개통했고, 1968년에는 전기와 전화를 설치했죠. 이후 청와대와 내무부 직원, 지방 공무원이 방문해 마을을 시찰했어요. 1970년 초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직접 방문해 마을의 모습을 돌아봤어요. 박정희 대통령과 공무원은 전국 농촌 마을을 신도마을처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죠.
정부는 1970년 10월부터 전국 3만3267개 마을에 시멘트를 무상으로 336포대씩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주민은 공급받은 시멘트로 마을 길 넓히기, 작은 교량 건설, 지붕 개량, 작은 하천의 둑 개조, 공동 빨래터 만들기 등 20여 개 사업을 자체적으로 추진했어요. 전국적으로 기대 이상 큰 성과를 거뒀고, 이러한 마을 중 경북 영일 문성마을이 가장 잘 알려졌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9월 전국 시장과 군수들을 문성마을에 모이도록 했어요. 마을을 둘러보게 한 후 "전국 시장과 군수는 모든 마을을 문성동과 같이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이후 1971년 겨울부터 전국 시장과 군수, 내무부 소속 지방 공무원이 총동원돼 대대적으로 마을 개발에 나섰어요. 이 시기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새마을운동'이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했어요.
소득 증대 등 추가해 '새마을운동'으로
새마을운동은 기존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 소득 증대 사업과 정신 계발 사업을 추가한 3대 부문으로 진행됐습니다. 새마을 가꾸기 사업은 '환경 개선 10대 사업'이라는 용어로 통일됐어요.
1972년 추진된 환경 개선 10대 사업에서는 마을 단위 경쟁 체제를 도입하고, 새마을지도자를 선발해 교육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을 기초·자조·자립 3단계로 나누고, 우수 마을에는 시멘트와 철근을 더 많이 공급해줬어요. 우수 마을에는 전기도 먼저 가설해 주고, 신문과 방송사까지 나서 대대적인 홍보를 했어요. 그러자 환경 개선 사업에 소극적이었던 마을도 우수 마을을 따라가기 시작했죠.
1970년대에는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멘트, 슬레이트, 철근 등이 대량생산됐어요. 전국 모든 마을에 환경 개선에 필요한 자재가 잘 공급된 점도 이 사업이 성공한 주요 배경이라고 할 수 있어요.
1973년 겨울에는 새마을운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마을을 선정하고, 7대 일간지 1면 등에 컬러사진과 기사를 게재했어요. 당시 컬러사진에는 마을 입구의 넓은 길, 경지가 정리된 농경지, 지붕 개량이 끝난 마을의 농가, 뒷산의 푸른 나무, 열심히 일하는 농민의 모습 등이 나타나 있어요. 농촌 마을의 경관이 1000년 이상 큰 변화 없이 유지되다가 불과 3~4년 사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됐답니다.
-이환병 관악고 교감/기획·구성=김윤주 기자, 조선일보(23-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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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과 박정희
조지 워싱턴은 미국 독립을 이끈 건국의 아버지다. 미국 어디를 가도 동상이 서 있다. 하지만 그는 3000명 넘는 흑인 노예를 거느린 대농장주였다. 윈스턴 처칠은 나치의 침략 때 영국을 지키고 2차 세계 대전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인종차별과 노예제를 지지했다. 샤를 드골은 나치의 압제에서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국가 재건을 주도했다. 프랑스 항공모함과 파리 공항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권위주의적 독재를 했고 식민지에선 ‘히틀러’ 소리를 들었다.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과 통일을 이뤄 국부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토지 정책에 저항하는 국민 1만여 명을 살해했다.
▶중국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 ‘공칠과삼(功七過三)’ 문화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뚱에 대해 “공이 일곱이고 과는 셋인데 공이 과보다 크니 최고 지도자로 받들어야 한다”고 했다. ‘선공후과(先功後過)’라는 말도 있다. 공을 먼저 보고 잘못은 나중에 본다는 뜻이다. 미국, 유럽 등 세계 거의 모두가 이런 문화를 갖고 있다.
▶지금의 한국을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을 꼽으라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비전과 의지가 없었으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세계 최첨단 산업국가로 탈바꿈하는 기적은 있을 수 없었다. 1960년 한국은 1인당 GDP 82달러로 미국 원조에 의존해 보릿고개를 넘기던 나라였다. 그는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정신으로 새마을운동과 외자 도입, 고속도로 건설, 전자·중화학 공업 육성, 수출 입국 전략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 물론 독재를 하고 인권유린도 있었다. ‘공칠과삼'이다.
▶그러나 민주당에 박정희는 ‘공영(零)과십(十)’이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 우표 발행을 돌연 취소했고, 기념관에 동상 하나 세우지 못하게 했다. 여당 의원은 그를 ‘귀태’(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라고 불렀다. 전 대표는 박정희와 관련된 세력은 “궤멸해야 한다”고 했다. 박정희 묘소 참배를 “유대인의 히틀러 참배”라고 한 인사도 있었다.
▶민주당 대선 주자들이 박정희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박정희를 찬양하던 사람”이라는 공격에 “그런 왜곡은 독극물”이라고 반격했다. “박정희에게 경제 발전의 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주자도 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놓으니 욕을 하고 발로 차는 격이다. 이들은 역사 왜곡이 아니라 박정희와 같은 업적을 남기는 일에 집중했으면 한다. 그 100분의 1이라도 이룬다면 국민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배성규 논설위원, 조선일보(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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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섬에 있는 두 나라의 명암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잘루이즈 지역에 있는 빈민촌./AP 연합뉴스
로라 로크맨 미국 국무부 부차관보는 국토안보부 및 연방수사국(FBI) 요원들과 최근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를 찾았다.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암살당한 사건 직후 아이티 정부가 미국에 긴급 지원 요청을 해 급파됐지만, 도착 직후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 클로드 조제프 임시 총리, 아리엘 앙리 총리 지명자, 조제프 랑베르 상원의장이 서로 자신이 대통령 권한대행이라고 주장해 셋을 모두 만나야 했다. 이 나라의 혼란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5만명이 숨진 2010년 1월 대지진 당시 세계 최빈국 참상이 드러났던 이 나라가 달라진 게 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아이티도 한때 황금기가 있었다. 아이티는 건국부터 세계사적 의미를 지녔다. 아이티가 위치한 이스파뇰라섬은 1492년 콜럼버스 탐험대의 초창기 개척지로 스페인에 이어 프랑스가 섬 전체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섬 서부 흑인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켜 프랑스를 쫓아내고 1804년 독립을 선포하며 해방 노예들이 세운 세계 최초 국가가 됐다. 아이티는 1822년 스페인 후예들이 다수인 섬의 동부까지 점령해 22년 동안 통치했고, 중남미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카리브해 강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러나 동부 지역에 대한 폭정이 독립 투쟁을 불러와 1844년 이스파뇰라섬은 아이티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갈라졌다.
두 나라 모두 외세에 휘둘렸고, 정치적 혼란기를 거쳤지만 지금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도미니카공화국은 경제 발전과 정치 안정을 이루며 카리브해 중심 국가로 도약했지만, 아이티는 세계 최고 수준의 강력 범죄율과 질병 감염률에 허덕이는 최빈곤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지진 희생자 대다수가 허술하게 지은 무허가 건물 거주자로 드러나자 “도미니카에서 났으면 피해는 미미했을 것”이라는 지적마저 나왔다. 아이티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건국 후부터 이어진 백인 식민 세력의 견제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한 요인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 나라 역사엔 자멸(自滅)과 실기(失機) 순간이 너무 많다.
1957~1987년 군부 폭정을 거친 뒤 새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 정부가 들어섰지만, 쿠데타와 정파 대립, 무장 세력의 발호 등 혼란이 반복됐고 2004년부터 6년 동안 유엔군이 주둔했다. 20세기 들어 꾸준히 답지한 국제사회의 원조만 잘 활용했어도, 아니 2010년 대지진 때 몰린 물자와 후원금만 효율적으로 썼어도 상황은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다. 아이티 대통령 암살 직후 도미니카공화국은 국경을 걸어 잠그고 난민 대량 유입 등의 비상 상황 대비책 마련에 들어갔다. 두 나라의 명암은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는 지리적 요인이 아니라 위정자들의 능력과 안목임을 보여준다. 한반도에서 분단 뒤 70여 년을 보내면서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된 한국과 북한처럼 말이다.
-정지섭 기자, 조선일보(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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