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통치자 두테르테에게 양날의 칼이 된 ‘범죄와의 전쟁’]
[두테르테 ‘이상한 은퇴’]
철권통치자 두테르테에게 양날의 칼이 된 ‘범죄와의 전쟁’
11일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선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홍콩 방문 후 귀국하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80)을 인터폴 형사들이 에워쌌다. 재임 시절 범죄자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했던 철권통치자 두테르테에게 형사들은 체포영장을 내밀었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반인도적 살상 범죄 혐의로 발부한 영장이었다.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는 거야!” 그는 역정을 냈지만 형사들에게 붙들려 ICC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로 압송됐다.
▷두테르테는 “범죄자 10만 명을 죽여 물고기 밥이 되도록 강에 버리겠다”는 공약으로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필리핀 제2의 도시인 다바오시 시장 시절 범죄 용의자 1700명을 즉결 처형하는 극단적 방법으로 범죄를 척결했던 그다. 취임 후 공약대로 대대적인 범죄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마약 등 강력범죄 혐의자에 대해선 체포에 저항하면 사살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죽음이 적지 않았다. 사법절차 없이 처형된 용의자가 정부 집계로만 6000여 명이다. ICC는 1만2000∼3만여 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필리핀에선 두테르테의 초강력 리더십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국제사회의 비판이 거셌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그에게 “범죄 소탕은 올바른 방법으로 하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ICC가 2018년 인권 유린 수사에 착수한 게 큰 위협이었다. 두테르테는 ICC 회원국 탈퇴로 맞섰고, 2022년 후임으로 선출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도 수사를 막아줬다.
▷그렇게 수사를 피해 온 두테르테가 결국 체포된 건 마르코스가 방패를 거둬들인 결과다. 몇 달 전 “ICC가 두테르테를 체포할 경우 협조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2022년 대선 때만 해도 둘은 굳건한 동맹이었다. 필리핀의 오랜 독재자의 아들인 마르코스는 퇴임 때까지 인기가 많았던 두테르테의 딸 사라가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나서준 덕에 당선됐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사이가 틀어졌다. 마르코스는 사라에게 국방장관직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친미 외교를 펴 아버지의 친중 노선을 계승하려는 사라와 건건이 부딪쳤다. 급기야 여당 주도로 사라가 탄핵될 위기에 놓이자 다음 대선에서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려 했던 두테르테는 마르코스와 정적 관계가 됐다.
▷ICC에 구금된 두테르테가 어떤 처벌을 받을진 아직 불분명하다. 과거 반인권 범죄로 기소된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10년 넘게 실형을 산 전례가 있다. 필리핀에선 마르코스가 정적 제거를 위해 해외 사법기관을 끌어들였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냥 놔두면 큰 위협이 될 두테르테를 위해 그가 구명에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두테르테에게 초법적인 범죄와의 전쟁은 대통령에 오르게 해준 정치적 자산인 동시에 스스로를 나락으로 내몬 양날의 칼이었다.
-신광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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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 ‘이상한 은퇴’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가문 간의 싸움이며 국민은 구경꾼일 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아키노 로하스 마르코스 등 소수의 정치 가문이 선출직 자리를 꿰차고 정치와 경제를 주무른다는 뜻이다. 필리핀의 변방 민다나오섬 출신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76)이 2016년 당선되자 필리핀의 후진적 족벌정치에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런데 두테르테 일가가 필리핀의 새로운 정치 가문으로 주목받고 있다.
▷내년 대선에서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던 두테르테 대통령이 돌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차기 대선에서 대권에 재도전해 대통령 단임제 규정을 우회할 것으로 예상됐는데 여론이 나빠지자 부통령 도전을 포기한 것. 그 대신 후임 대통령으로는 장녀인 사라 두테르테 다바오 시장(43)이 거론된다. 필리핀 정가에선 두테르테가 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다시 그 자리를 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두테르테 부녀는 다바오 시장과 부시장 자리도 주거니 받거니 했었다. 아버지가 다바오 시장이던 2007년 딸은 부시장이었고, 2010년 아버지가 시장 3연임 제한 규정에 걸리자 딸이 시장, 아버지는 부시장 자리로 바꿔 앉았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서 딸은 시장 자리로 복귀하고 부시장 자리는 두테르테의 장남이 차지했다. 2019년 장남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로는 차남이 부시장 자리에 앉았다.
▷사라는 변호사 출신에 터프한 정치 스타일이 아버지를 닮았다. 대형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경관 얼굴에 주먹을 날린 일화로 유명하다. 이혼한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뒤로는 영부인 역할을 하면서 중앙 정치 무대에서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마약과의 전쟁에 미온적이고, 미중 전쟁에서 방관자론을 제안하며 아버지의 친중 노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대선 후보 1위 주자인데 최근엔 지지율이 28%에서 20%로 급락했다. 복싱 영웅 매니 파키아오 상원의원이 12%로 바짝 추격 중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앞세워 당선됐지만 그의 장남과 사위, 그러니까 사라의 남편은 마약 밀반입 연루 혐의를 받았다. 서민 대통령을 표방하며 대기업과 날을 세우면서도 친한 기업은 챙긴다는 뒷말이 나왔다. 최근엔 정부와 가까운 기업에서 방역 물품을 고가에 구매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다. 엘리트 가문정치 청산을 공언하고도 이제는 딸까지 동원해 정권 연장의 꼼수를 부리고 있다. 한때 ‘피플 파워’로 아시아 민주화를 선도했던 나라에서 벌어지는 족벌정치 소동은 민주주의를 시작하기보다 지켜내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인지 보여준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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