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태양신’ 할아버지]
[‘다이노 베이비’]
[적자인생 60세]
굿바이 ‘태양신’ 할아버지
조광현씨가 지난 2017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일보DB
6년 전, 그해 겨울 추위는 매서웠다. 수습 기자로 좌충우돌하며 ‘언제쯤 1인분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으로 몸부림치고 있을 때 ‘태양신(네이버 지식인 상위 등급)’을 만났다. 촌철살인(寸鐵殺人)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던 82세 조광현옹이 은퇴한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다. 수소문 끝에 조씨의 마포구 아파트를 찾아가 인터뷰를 했고, 처음으로 쓴 기사다운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태양신 할아버지, 아직 여쭤볼 게 많은데….”
그때 “여생(餘生)을 알츠하이머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내를 돌보는 데 쓰겠다”던 조씨가 지난달 27일 세상을 떠났다. 30년 넘게 치과 의사로 일하다 당뇨가 심해져 병원을 접은 그가 은퇴 후 네티즌들의 질문을 받은 시간이 15년. 전공인 치의학은 물론 생활, 상식 등 각 분야를 넘나들며 남긴 답글만 5만건이 넘는다. “잇몸이 아플 땐 어떤 성분을 먹어야 하나요?” 하고 물으면 “먹지 말고 치과에 가라”는 조씨에게 그 시절 네티즌들이 열광했다.
한창일 땐 하루에 답변을 100건도 넘게 남겼다던 조씨가 은퇴를 결심한 것은 건강 때문이었다. “은퇴 후 대장암·신장암으로 투병했고, 망막 수술을 받은 뒤엔 시력이 급격하게 나빠졌다”고 했다. 그런데도 은퇴 직전까지 지름 10㎝짜리 대형 돋보기를 모니터에 들이대며 매일 10건 안팎 질문에 답했다.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선생님을 그렇게 움직이게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말했다. “거동도 쉽지 않은 노인을 젊은 사람들이 찾아주고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원동력이었습니다. 내가 알려준 지식으로 대우받고 이득을 얻었다며 고마워할 때 보람이 컸습니다.”
노인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인 대한민국은 노인이 행복하지 못한 사회다. 어느 순간부터 시니어라면 무대에서 내려와 말을 줄이는 게 미덕인 것처럼 됐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한다는 이유로 아래 세대는 더 배울 게 없다 생각해 예전 같은 존경 어린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소외된 일부는 아스팔트나 유튜브 세상에 진출해 울분을 토하고, 이게 또 세대 갈등을 증폭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를 치유해야 할 정치권은 되레 갈등을 부추기는 담론들만 내놓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78명이었다. 단기간에 반전시키기 어려운 흐름이라면 시니어들의 경제·사회 활동 참여를 유도하고 생산성을 최대한 높이는 게 ‘수축 사회’를 대비하는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시간 때우면 돈 몇 푼 쥐여주는 ‘노인 일자리’를 넘어서 노년에도 충분히 당신의 삶이 보람찰 수 있고, 사회에 기여할 방법도 많다는 것을 보여줄 실증 모델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야 한다. 조씨가 그랬던 것처럼 소속감, 효능감, 성취감 같은 감정을 다시 느끼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 태양신이 사위가 선물한 노트북으로 인터넷 세상에 발을 들였을 때가 2002년, 그의 나이 67세였다.
-김은중 기자, 조선일보(2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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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노 베이비’
미국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셰릴 필렉스는 47세였던 2007년 구글에 입사지원서를 넣었지만 고배를 마셨다. 2014년까지 3번 더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 채용담당자가 “몇 살인지 알아야 하니 대학원 졸업 날짜를 적어라”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구글을 상대로 한 연령 차별 집단소송에 동참했다. 5년간 법정싸움 끝에 필렉스를 비롯한 원고 227명은 구글로부터 모두 1100만 달러의 합의금을 받아냈다.
▷이런 사례들을 반면교사로 삼는 기업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미국에서는 연령 차별을 이유로 한 수십 건의 대규모 소송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정년제를 폐지했고 40대 이상을 위한 ‘고용연령차별금지법(ADEA)’을 만들었지만 때로 무용지물이다. 최근에는 IBM이 나이 든 직원들을 ‘다이노 베이비스(Dinobabies)’로 부르며 “멸종시켜야 한다”고 한 내부 e메일이 공개됐다. 멸종된 공룡(dinosaur)과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를 합친 ‘다이노 베이비’는 퇴출 위기에 놓인 50∼70대를 비하하는 조어다.
▷베이비 부머(1946∼1965년생)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남다르다. 이들 중 53%는 나이 때문에 차별받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뒷방 신세가 되는 연령대는 심지어 계속 낮아지는 추세. 아마존 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30세, 페이스북은 29세다. 능력 차이가 문제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나이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차별이다. IBM을 상대로 소송을 낸 직원들은 회사가 “밀레니얼 세대 직원의 숫자가 (젊은 경쟁사들보다) 뒤처지고 있다”고 한 것도 차별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IBM의 직원 평균 연령은 48세다.
▷연령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고령화와 맞물려 한동안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2024년에는 근로자 4명 중 1명은 55세 이상이 된다. “나이가 전부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낼 모(母)집단이 커진다는 의미다. 영국에서는 89세 할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해고한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2019년 2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받아 화제를 모았다. 1970년대 이미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경우 고용연장 의무화 제도 등으로 일손 부족의 위기를 넘었다.
▷정년제와 임금피크제 등을 시행하는 한국은 미국 등 서구 국가들과는 노동 환경이나 제도가 다르다. 대기업에서 명예퇴직한 50대 임원이 연령 차별을 받았다며 제기한 소송에서는 패소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나이와 상관없이 성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기본 원칙은 다르지 않다. 유명 광고 문구처럼 ‘나이를 먹어도 늙지는 않는다’는 일할 의욕과 역량을 갖춘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어야 한다.
-이정은 논설위원, 동아일보(2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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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인생 60세
몇 년 전 국내에서도 출간된 일본 소설 ‘끝난 사람’은 한국의 중장년층 독자들에게서 큰 공감을 받았다. 대형 은행의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자회사로 좌천돼 정년을 맞이한 주인공은 끝난 사람 취급하는 주변 분위기에 침울하다. 정년퇴직은 생전에 치르는 장례식이라나. 소득이 소비보다 적어지면 사회에서 쓸모가 다했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나이가 한국에서는 60세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국민이전계정’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태어나서 27세까지는 적자인생을 살다가 28세부터 흑자를 낸 뒤 60세부터 다시 적자 사이클에 들어선다. 60세부터 월급과 사업 등으로 버는 노동소득이 쓰는 돈보다 적어지는 것이다. 2010년엔 적자인생 진입연령이 56세였는데 2016∼2018년 59세가 됐다가 2019년에 60세가 됐다.
▷우리 국민은 17세 때 최대 생애주기 적자를 낸다. 버는 돈은 거의 없는데 교육비 등으로 소비가 많기 때문이다. 1인당 노동소득은 41세 때 정점을 찍은 후 하향곡선이다. 노동소득에서 소비를 뺀 생애주기 흑자는 44세 때 최대가 된 후 내내 줄어들다가 60세부터 적자로 돌아선다. 어릴 때에는 대개 부모에게 의존해 살다가 경제활동을 하면서 제 몫을 한 뒤 60세 이후 삶이 쪼그라드는 흐름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예전처럼 나이 들었다고 자식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식이 부모를 부양한다는 의식이 흐릿해진 지 오래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두 개 부문에서 1위다. 인구 대비 취업자 수인 고용률이 OECD 회원국 평균(14.7%)의 두 배를 넘는 1위이고, 급격한 고령화 속에 노후 소득원이 마땅치 않아 노인 빈곤율도 1위다. 집 장만하느라 자녀 교육시키느라 노후 준비가 뒷전이었기에 긴긴 날을 살아가려면 무슨 일이든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노후 설계의 발목을 잡는 흔한 착각은 자신에게 80세 이후 삶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 죽음이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온다는 것이라고 한다. 전문가들은 미래를 위해 절약하고 아무리 화려한 젊은 날을 보냈다 하더라도 눈높이와 자세를 낮춰 일자리를 구하라고 한다. 적자인생에 들어서기 전에 자녀에게 ‘올인’하는 걸 관두고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의 3층 연금구조를 마련해 노후 고정수입을 최대한 확보하라고 한다. 무엇보다 호기심을 포기하지 말고 도전을 멈추지 않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하면 일상에서 삶의 기적을 발견할 수 있다니 인생, 참 심오하다.
-김선미 논설위원, 동아일보(2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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