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 시간 개편, 일정 기간 시험 실시로 효과와 부작용 점검해보길]
[9개월 동안 뭐 하고 다시 의견 청취인가]
[근로자들 원하는 ‘추가 근로’, 근로자 위해 없앤다는 이상한 나라]
[망치질에도 철학이 있다]
대통령은 ‘노동시간’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하루 18시간 노동 버스 안내양
서비스업 확산하며 사라져
대통령, 노동시간 고민보다 ‘좋은 일자리’ 토대 마련 힘써야
28일 서울 중구 정동길 일대에서 민주노총 노동시간 개악 저지를 위한 버스킹 행사가 열리고 있다. 2023.3.28/뉴스1
정부가 제안한 노동시간 유연화를 두고 야당과 노동계가 ‘주 69시간제’라고 한 것은 악의적인 낙인에 가깝다. ‘기절 노동’이라는 비난도 터무니없는 억지다. 그럼에도 결국 노동 현장은 정부 제안에 등을 돌렸다. 대통령은 “60시간이 상한”이라며 말을 바꾸더니 엊그제 “정책 입안 과정에서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라”고 말했다. 국민 눈에는 혼란으로 비친다. 야당은 기회다 싶었는지 ‘주 4.5일 근무’ 법제화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이 사태를 지켜보는 동안 근본적인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나라 근로시간은 대통령이 유연화하자고 하면 고무줄이 되고, 야당과 노동계가 줄이자고 하면 줄어드는가. 한때 세계 최장이란 악명을 떨치던 이 나라 근로시간은 1980년대 이후 꾸준히 줄어드는 추세다. 최근만 해도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2018년 39.4시간에서 지난해 38시간으로 줄었다. 노동시간은 주는데 국민소득은 늘어 3만5000달러에 달한다. 이게 정치인들이 근로시간 줄이라는 법 만든 덕분인가.
우리나라 노동 관계법은 1953년 제정됐다.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이 그때 처음 정해졌다. 그러나 현장에서 외면당했다. 지키지 않으려 했다기보다 지킬 형편이 못 됐다. 기술 없고 생산성 낮은 나라 국민은 몸으로 벌어 먹는 수밖에 없다. 반세기 전,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 1950~60년대 버스 승하차 보조원(안내양)의 평균 근로시간은 18시간이었다. 하루 네 시간 자고 종일 흔들리는 버스에 서서 일하는 가혹한 근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걸 고치고 싶어 했다. 1970년대 어느 회견장에서 “내 집, 내 딸, 내 동생”이란 표현까지 써가며 안내양 처우 개선을 지시했다. 장시간 근로를 줄이자며 격일제 도입도 추진했다. 하지만 모두 무산됐다. 수혜 대상인 안내양들까지 “근무시간 줄이면 월급도 준다”며 반대했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결국 겨울철 버스 틈새로 들어오는 칼바람이라도 피하라며 방한복 1만 벌을 지원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버스 안내양을 장시간 노동에서 구한 것은 대통령 지시가 아니었다.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며 버스의 운송 부담에 숨통이 트였다. 국민 주머니에 여윳돈이 생기며 커진 서비스업 분야가 새 일자리를 제공했다. 마침내 1989년, 자동차 운수사업법의 안내원 승무 조항이 삭제되며 후진국형 일자리인 안내양은 이 땅에서 사라졌다. 대신, 일은 덜 고되고 보수는 더 두둑한 일자리가 등장했다. 이 나라 근무 시간 감축은 각 분야에서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다.
대통령은 이런 좋은 변화가 더 많은 곳에서 일어나게 하는 걸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대통령은 개별 사업장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대통령은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주당 근무 상한은 69시간이 아니라 60시간”이라고 해봐야 풍자 개그 소재밖에 안 된다.
북한의 천리마 운동은 실패했다. 잘사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며 더 많은 사람이 더 오래 일하게 독려했지만, 생산성은 오히려 추락했고 나라는 가난해졌다. 김일성이 모든 분야에서 만기친람하며 지시하고 확인한 데 따른 부작용이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슘페터는 부(富)가 혁신을 통해 창출되지만 그 혁신은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하거나 더 열심히 오래 일하는 것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고 했다. 나라를 업그레이드하는 혁신은 노동량과 노동시간 투입이 아니라, 신기술·신제품·새로운 조직을 통해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대통령은 그 혁신의 토대를 조성하기 위해 고민하는 자리다. 노동시간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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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 시간 개편, 일정 기간 시험 실시로 효과와 부작용 점검해보길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1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근로시간 기록·관리 우수 사업장 노사 간담회에서 주69시간제 폐기 촉구 기습시위를 하는 민주노총 청년 활동가들을 향해 시위 종료를 요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6일 ‘주 최대 69시간’인 정부의 근로시간 개편안에 대해 연장 근로를 하더라도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며 보완을 지시했다. 그간 우리 노동시장에서 주 52시간제가 너무 경직성이 강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게임 등 IT 업계와 에어컨 제조 업체처럼 특정 기간에 업무량이 몰리는 업종에서는 탄력적인 근로시간 운용이 절실하다. 이에 고용부는 일이 많을 때 몰아서 하고 쉴 때 제주도 한 달 살기도 가능한 제도라며 ‘주 최대 69시간 근무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법이 보장하는 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공짜 야근’도 적지 않은 현실에서 근로 시간만 늘어나는 현실성 없는 얘기라는 반발이 일었다. 특히 현행 산업재해 관련 고시는 ‘주 최대 64시간 근로’를 과로 인정 기준으로 삼는데 이를 넘는 근로 시간 허용이 지나치다는 견해가 적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근로자들의 다양한 의견, 특히 MZ 세대 의견을 면밀히 청취해 제도를 보완하라고 했다. 그러나 근로시간은 청년은 물론 30·40대 워킹맘,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 등 다양한 연령대들의 근무 여건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이고 사무직과 생산직의 이해관계도 다를 수 있다. 대기업·공기업 사무직 위주인 MZ세대 노조 위주로 의견을 들을 일이 아니다. 또 연장근로의 경우 통상임금의 1.5배를 받기 때문에 중소 제조업, 스타트업 등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일이 많을 때 더 일하는 것에 별 거부감이 없는 입장이다. 더 일하고 싶은 사람은 더 일할 수 있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옳다.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큰 정책의 경우 본격적인 추진에 앞서 시험 실시를 통해 효과와 부작용을 점검한 전례가 적지 않다. 근로시간 개편도 일정 기간 시험 실시를 통해 일이 있을 때 더 일하고 쉴 때 충분히 쉬는 정책 취지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아닌지 현장에서 확인 점검할 수 있다. 그 결과를 놓고 제도 개편을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시험 실시 결과 이 제도가 전체적으로 실효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 전면 수정해야 한다. 정부는 이 정책의 영향을 받는 근로 집단을 골고루 포함한 사업장을 고르고 이들을 대상으로 정책이 의도대로 작동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현장 검증해 보기 바란다.
-조선일보(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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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뭐 하고 다시 의견 청취인가
근로시간 유연화는 대선 공약.. 작년 6월 착수한 52시간제 개편
소통부족·전략부재로 반발 직면.. 노동개혁 불씨 꺼뜨리지 말아야
주(週) 52시간 근무제는 근로자들의 과로를 막고 삶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문재인 정부가 2018년 도입했다. 하지만 경직되고 획일적인 적용 탓에 다변화하는 산업 구조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52시간제의 개편 필요성에 공감했다.
하지만 막상 정부가 지난주 개편안을 내놓자 거센 논란이 일었다. 정부 안은 바쁠 땐 한 주에 최대 69시간까지 일하고 다른 주에 몰아서 쉴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근무시간을 주당 52시간에 맞춰야 하던 것을 월·분기·반기·연(年) 단위로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정부는 근로자의 근로시간 선택권이 넓어지고 실제 일하는 시간은 줄어든다고 했다. ‘한 달간 제주도 살기’ ‘주 4일 근무’도 가능해진다고 했다. 그런 정책이라면 근로자들이 반겨야 할 텐데 상황은 정반대다. 정부 노동 정책에 부정적인 한국노총·민주노총의 반발은 예상됐지만, 일반 직장인들까지 상당수 반대에 가세했다. 장시간 근무가 일상이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MZ세대(1980~2000년대 출생 세대)의 불만이 폭발했다.
정부가 역풍을 맞은 이유로는 우선 전략 부재를 들 수 있다. 새 규정대로라면 한 주에 69시간 근무할 경우 다른 주에는 40시간 일하거나 휴가를 가는 식으로 주 평균 근무시간을 52시간 밑으로 맞춰야 한다. 하지만 노동계는 69시간만 부각시켜 ‘주 69시간제’로 몰아갔다. 주 7일 아침부터 밤까지 꼬박 일하는 극단적 가정을 토대로 주 80시간 이상 일하게 된다고도 했다. 이 같은 노동계 주장이 SNS 등을 통해 퍼져 나가는데도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정부는 선택지를 늘린다면서 출퇴근 사이 11시간 의무 휴식제를 선택 조항으로 바꿨다. 그러자 주 90시간 근무가 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왔다.
개편안 자체에도 아쉬운 대목이 있다. 산업재해와 과로의 연관성을 인정하는 기준 근무시간은 4주 평균 64시간이다. 그런데 정부 개편안은 주당 근무시간 상한선을 69시간으로 설정했다. ‘과로를 조장한다’는 말을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P
소통 부족도 문제다. 개편안에 반대하는 근로자들은 ‘제도와 현실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지금도 공짜 야근을 많이 하는데 제도가 바뀌면 회사가 대놓고 야근을 더 자주 시키고, 결국 일은 일대로 하면서 돈은 못 받는 게 아니냐고 우려한다. “연차 휴가도 다 못 쓰는데 한 달 휴가가 가능하겠느냐”고 하소연한다. MZ세대 몇 사람만 붙잡고 얘기해도 들을 수 있는 내용이다. 개편 논의가 전문가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현장 근로자의 의견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근로시간 유연화는 윤석열 대통령 대선 공약이다. 주 52시간제 개편안은 정부의 노동 개혁 1호 법안이다. 하지만 누더기가 될 판이다. 윤 대통령은 개편안이 발표되고 나서 8일 만에 보완을 지시했다. “주 60시간 이상은 무리”라고도 했다. 개편안을 수정하면 경영계가 불만을 터뜨릴 수 있다. 근로자들이 만족할지도 미지수다. 정부는 작년 6월 개편 작업에 착수했다. 보완할 점이 없는지, 예상되는 반발은 무엇인지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할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의견을 청취하겠다고 한다. 한 번 뒤집힌 정책은 그만큼 신뢰를 잃는다. 정부가 노조의 회계 투명성 강화 조치와 불법행위 근절 대책 등 일부 결과물을 내놓긴 했지만 노동 개혁은 가시밭길이다. 야당에 의석 수에서 밀리고, 개혁에 동참해야 할 노조는 정부를 외면하고 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가 개혁 불씨를 스스로 꺼뜨리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김승범 기자, 조선일보(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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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들 원하는 ‘추가 근로’, 근로자 위해 없앤다는 이상한 나라
(서울=뉴스1) 유승관 기자=최승재 국민의힘 의원이 8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서 중소기업·소상공인·자영업자 단체 연합 회원들과 함께 8시간 추가 연장 근로 일몰제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다. 이들은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원자재 가격 폭등과 함께 유례없는 인력난으로 현상 유지조차 어려운 실정이라며 '8시간 추가 연장 근로제 일몰 연장'을 국회에 촉구했다. 8시간 추가 연장 근로제는 30인 미만 사업장에 한해 주 52시간제 적용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2022년 말까지 주 8시간 연장 근로를 한시적으로 허용한 제도다. 2022.12.8/뉴스1
주 52시간 근무제로 인한 부담과 부작용을 덜어주기 위해 30인 미만 사업장에 한시 도입한 ‘주 8시간 추가 연장 근로제’의 폐지 시한이 올 연말로 다가왔다. 작년부터 주 52시간제가 전면 시행됐지만 소규모 영세 사업장에 대해서는 노사가 합의할 경우 주 8시간을 더 일할 수 있도록 1년 6개월 동안 한시적으로 예외를 둔 것이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이 제도가 끝나는 연말 이후에도 주 8시간씩 추가 근로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거대 야당이 연장을 막고 있다.
이 제도의 적용을 받는 5~29인 사업장은 63만 곳이고 여기서 일하는 근로자가 600만명이다. 전체 근로자의 42%에 해당한다. 이 영세 사업장들은 최근 1년간 문 닫고 폐업한 곳 비율이 2.4%에 달해, 300인 이상 사업장(0.8%)이나 100~299인 사업장(1.2%)의 2~3배다. 그만큼 존폐 위기에 시달린다는 뜻이다. 저임금 일자리 기피로 인력 부족도 심각하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주8시간 추가 근로제’를 활용한 사업장이 91%에 달할 정도로 제도 의존도가 높았다. 추가 연장 근로제가 사라지면 75.5%가 “마땅한 대책이 없다”고 했다.
제도 연장은 사업주뿐 아니라 근로자들도 원하고 있다. 추가 연장 근로는 통상 임금보다 1.5배 많은 수당을 주도록 돼있다. 영세 사업장의 저임금을 보충하려 주 52시간보다 더 일하려는 근로자들이 많다. 내년부터 연장 근로제가 폐지되면 그만큼 소득이 줄어든다. 실제로 특근이 많은 중소 조선업계는 지난해 주 52시간제 시행 후 근로자의 73.3%가 임금이 감소했다. 원래 직장에서 줄어든 수입을 만회하려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뛰는 사람이 늘면서 근로 시간이 오히려 더 늘어난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기존 직원에게 연장 근로를 시킬 수 없게 되는 사업자로선 납품 등을 맞추려면 새로 사람을 더 뽑아야 하고 그만큼 인건비 부담이 늘어난다. 영세 업체들은 안 그래도 극심한 구인난에 시달리는데 추가 채용하기가 쉽지도 않다. 최악의 경우 생산을 줄여야 한다. 노도, 사도 모두 손해다.
강제로 일을 더 시키겠다는 것도 아니고 노사가 모두 원하는데도 민주당은 “‘정부가 노동시간을 늘리려 한다”면서 주 52시간제의 기계적 강행을 고집하고 있다. 심지어 노조 폭력의 손해배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노란봉투법’에 여당이 합의해주면 이 법도 처리해주겠다고 한다. 두 법안이 무슨 관계인가. 민주당이 노동 약자와 중소기업을 위한다는 구호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조선일보(2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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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질에도 철학이 있다
‘해머링 맨(Hammering Man)’은 일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박돈규 기자
그는 오늘도 허공에 망치질을 한다. ‘해머링 맨(Hammering Man)’은 서울 광화문 근처에 있는 22m 높이의 움직이는 조각품이다. 요즘엔 산타클로스 모자와 양말을 착용하고 있어 멀리서도 눈길을 붙잡는다. 해머링 맨이 망치를 머리 위로 올렸다가 내리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재보니 55초다. 이 동작을 하루 10시간씩 반복한다. 설치된 지 올해로 20년. 그 세월은 약 500만번의 망치질과 같다.
해머링 맨은 구두 수선공부터 과학자, 광부, 회사원, 예술가까지 ‘일하는 사람’의 상징이다.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 각자의 망치를 들고 일한다.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고 적당한 대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해머링 맨이 어느 날에는 활기차 보이고 어느 날엔 지쳐 보인다. 아마도 일터에서 느낀 감정, 일을 바라보는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일 앞에서 때로는 숙연해지고 때론 서럽다.
오래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연구 대상이다. 이순재, 신구, 박정자, 손숙 등 ‘대학로 방탄노년단’은 데뷔한 지 60년이 넘었다. 더 이상 경제적 목적으로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관객이 안심하고 선택하게 하는 이름이고,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저울 같은 캐릭터 분석이 강점이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를 흥행으로 증명하고 있다.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는 살아 있는 해머링 맨이다. 1956년부터 연기라는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번에는 연극 ‘갈매기’ 연출에 도전하면서 배우로도 출연한다. 진력나지 않을까? 왜 아직도 연기를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밖에 할 게 없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니까 합니다.” 단순하고 명쾌한 그 대답이 가슴을 쿵 쳤다.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1992)에서 대발이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 이순재
배우는 몸 전체가 망치다. 연기란 자기 몸뚱이를 가지고 자기 능력껏 표현하는 일이다.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평가받는 직종. 눈치 보지 말고 두 발 다 담가야 한다. 그러나 히트작을 내고 인기를 얻을 땐 조심해야 한다. 그 이미지는 감옥이라 갇히면 끝장이다. 이순재는 성공한 캐릭터인 ‘대발이 아버지’를 5~6년 더 우려먹을 수 있었지만 끝나자마자 버렸다. 백지(白紙)에서 다시 시작했다.
망치질에 마일리지가 있다면 백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VVIP다. 1920년생인데 여전히 강연을 하고 책을 쓴다. 김 교수는 “여든 살이 될 때 좀 쉬어 봤는데 노는 게 더 힘들더라”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일이 인생이에요. 남들은 늙어서도 그렇게 바쁜데 행복하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생각 못 하는 행복이 뭔고 하니, 내 일 덕분에 무엇인가 받아들인 타인이 행복해하는 걸 보게 됩니다. 그게 내 행복이에요.”
오래 일하면서 행복한 비결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생활이 되고 남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사람은 크게 세 부류라고 이순재는 말했다. 꼭 있어야 할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한국 사회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게 연기뿐인데 아직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기에 오늘도 연습실로 간다.
일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내 쓸모만이 아니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일한다고 관점을 바꾸면 출근길이 즐거울 수 있다. 구순이 코앞인 현역 배우와 백세 철학자가 말하는 ‘망치질의 철학’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환승(갈아타기)이 각광받는 시대라서 더 웅숭깊다. 필요한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며 이 사회를 지탱하는 해머링 맨들을 향한 응원가로 들렸다.
-박돈규 기자, 조선일보(22-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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