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곳’이 안전하지 않은 새로운 양상의 금융 위기]
[SVB, CS 이어 도이체방크… 짙어지는 ‘뱅크데믹’ 그림자]
[“금융 위기는 반드시 다시 온다, 겸손하라”]
[나치 침공도 막았던 스위스 은행의 굴욕]
[미·유럽 잇단 은행 위기, 우리도 ‘충당금 방파제’ 미리 더 쌓아야]
[예금자보호 한도액 23년째 5000만 원]
‘안전한 곳’이 안전하지 않은 새로운 양상의 금융 위기
독일 베를린에 있는 도이체방크 지점.
지난 주말 독일 최대 투자은행 도이체방크의 주가가 한때 14.9% 폭락하고 부도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도 8.3% 치솟는 등 신용 위기에 몰렸다. 이 은행 대출 중 미국 상업용 부동산 비율이 높다는 이유로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고조됐기 때문이다. 도이체방크는 10분기 연속 흑자를 낼 정도로 재무 구조가 탄탄하지만, 이런 대형 은행마저 투자자들은 믿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던 미 국채가 도리어 위험 요인이 되고, 많이 유치한 예금이 부메랑이 돼 은행을 파산시키고 있다.
최근 세계 금융 불안의 요인이 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은 종전 금융 위기 공식을 깼다. 회수하지 못하는 부실 채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자산 절반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미 국채에 투자했다가 파국을 맞았다. 미 기준금리 급등으로 금리와 거꾸로 움직이는 국채 가격이 폭락해 장부상 평가 손실을 입었고, 이를 불안하게 여긴 예금주들이 일제히 예금 인출에 나섰다. 이 은행은 예금 지급을 위해 미 국채를 만기 전에 파는 바람에 큰 손실을 본 끝에 문을 닫고 말았다. 미 국채를 들고 있는 세계 금융회사들도 지금 당장 드러나지 않을 뿐 다들 평가상 손실을 보고 있다.
파산 직전에 몰렸던 크레디스위스 은행이 UBS에 인수되는 과정에서도 투자자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UBS가 크레디스위스가 보유한 ‘코코본드(조건부 자본증권)’의 지급 책임을 지지 않고 상각 처리하는 바람에 채권 22조원이 휴지 조각이 됐다. 채권이 주식보다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충격에 투자자들은 다른 은행들의 자본 구성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불똥이 도이체방크로 튀었다.
지난해 말 우리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흥국생명이 5년마다 관례적으로 조기 상환하는 신종 자본증권 5억달러를 무기한 상환 연기하겠다고 해 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언제 어떤 경로로 위기가 촉발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민간 부채가 GDP의 2.2배인 3700조원에 이르고, 제2 금융권 부동산 PF가 110조원에 이르는 상황에서 잘못 불이 붙으면 큰 위기로 비화할 수 있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은 새로운 양상의 금융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조선일보(23-03-28)-
_______________
SVB, CS 이어 도이체방크… 짙어지는 ‘뱅크데믹’ 그림자
3월 24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이체방크 본사 앞에 예술가가 만든 비누거품이 날아가고 있다. AP뉴시스
미국에서 시작된 은행 위기의 공포가 스위스를 거쳐 독일 최대 투자은행인 도이체방크까지 덮쳤다. 24일 장중 한때 14% 넘게 떨어졌던 주가는 어제 장 초반 반등세로 돌아섰지만 불안감은 남아 있다. 특별한 부실 징후가 없는 대형 은행까지 표적이 된 것은 그만큼 투자자들의 공포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은행 위기 공포가 전염병처럼 번진다는 뜻에서 ‘뱅크데믹’(은행과 팬데믹의 합성어)이란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다.
도이체방크 주가가 출렁인 데는 은행에 문제가 있다기보단 불안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 도이체방크는 지난해 순수익이 50억 유로(약 7조 원)에 이르고 유동성도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하지만 크레디트스위스(CS)가 UBS에 전격 인수되면서 신종자본증권인 코코본드가 휴지조각이 되자, 코코본드 비중이 높은 도이체방크로 불신의 불똥이 튀었다. 헤지펀드들이 시장 불안 심리를 이용해 은행주 하락에 집중 베팅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번 글로벌 은행 위기는 여러 면에서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주로 투자한 자산은 안전자산의 대명사인 미국 국채였다. 도이체방크는 재무 건전성이 탄탄한데도 시장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이번 위기 앞에선 절대적인 안전지대가 없는 셈이다. ‘디지털 뱅크런’에서 보듯 공포의 확산 속도 역시 빠르다. 40년 역사의 SVB가 무너지는 데는 이틀, 167년 전통의 CS가 몰락하는 데는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뱅크데믹 전염 가능성에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 국내 은행권에서 발행한 코코본드 잔액은 31조5000억 원에 이른다. 당장 영향은 작다지만 투자 심리가 불안해질 경우 자본 확충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다. 가뜩이나 한국 금융 시스템엔 지뢰밭이 널려 있는 상태다. 비(非)은행권을 중심으로 급증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부실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가계부채도 잠재적 위험 요인이다. 자산을 모두 처분해도 빚을 갚기 어려운 고위험 가구가 1년 새 갑절로 늘어 61만5000가구를 넘어섰다.
최근의 위기는 공포의 확산, 예측 불가능성, 빠른 전파 속도 등 여러 가지에서 전염병과 많이 닮았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잠재된 위기가 현실화할지 알 수 없다. 금융권의 건전성을 강화하고, 시장이 과도한 불안에 휘둘리지 않도록 위기 징후에 대한 철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 촘촘한 금융 방역망의 선제적 구축이 시급하다.
-동아일보(23-03-28)-
_______________
“금융 위기는 반드시 다시 온다, 겸손하라”
[朝鮮칼럼]
광풍이 공황으로 바뀐 ‘뱅크런’ 美 은행 둘이 순식간에 붕괴
금융위기 대가 버냉키는 말한다
“완벽한 화재 예방 불가능하듯 금융위기는 미리 막지 못한다
인간의 약점 인정하고 버티기 위한 시스템 만들어라”
미국 은행들의 연쇄 파산으로 관련주가 폭락한 지난 15일 미 뉴욕증권거래소의 트레이더가 긴박한 표정으로 지수를 살피고 있다. /UPI 연합뉴스
“광풍이 공황으로 언제 바뀔지는 절대 알 수 없다. 인간의 심리적 연약함을 없애기도 불가능하다.”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회고하며 쓴 책에 적힌 말이다. 유사 이래 금융 위기가 발생하는 과정은 대체로 닮았다고 그는 말한다. 불안이 번지면 앞다퉈 예금을 빼려는 ‘뱅크런’이 발생하고 은행이 쓰러지며 금융 시스템이 붕괴한다.
미국 만화 ‘심슨’엔 개구쟁이 주인공이 장난으로 “지급 불능!”이라 소리치자 뱅크런으로 치닫는 장면이 나온다. 이와 근본적으론 비슷한 일이 최근 현실에서 잇달아 발생했다. 소문이 불안으로, 불안이 뱅크런으로 번지며 사흘 사이 미국의 은행 둘이 잇달아 문을 닫았다. 그 직후 스위스의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스위스의 예금이 빠져나가며 파산설이 돌았다. 뱅크런이 멀쩡하던 은행을 하루면 무너뜨릴 수 있다는 충격에 은행주가 하루 80%씩 폭락하는 혼란이 발생했다.
많은 경제학자는 뱅크런이 은행의 속성과 맞닿아 앞으로도 반복되리라고 말한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은 버냉키 등이 받았는데 논문의 주요 소재가 바로 뱅크런이었다. 이들에 따르면 은행은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만기가 짧은) 예금을 받아 만기가 긴 대출에 빌려줘 돈을 번다. 이 사업 모델엔 ‘예금자가 한꺼번에 돈을 빼진 않겠지’란 믿음이 깔렸다. 하지만 그 어떤 충격이 발생해 이 전제가 무력화되고 동시다발적 예금 인출이 발생하면 은행은 무너진다.
버냉키가 공저한 금융 위기 회고록 ‘위기의 징조들’을 읽다 보면 좀 허망하다. 뱅크런과 금융 위기를 사전에 막을 방법은 없다고 거듭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불행히도 금융 위기를 완전히 예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융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데, 신뢰만큼 깨지기 쉬운 것은 없다.” 이 회고록의 원제는 ‘화재 진압(Firefighting)’이다. 저자들은 금융 위기를 화재에 빗대 설명한다. 읽다 보면 실제로 공통점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초기에 불씨를 잡지 않으면 큰불로 번지고, 불이 나면 잘잘못 따지기보단 진화(鎭火)부터 해야 한다는 식이다.
지난 10일 파산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의 한 지점에 지난 13일 예금을 찾으려는 이들이 긴 줄을 선 모습. 미 연방준비제도와 재무부는 예금자보호 한도를 초과하는 예금을 전액 지급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UPI 연합뉴스
불에 탈 연료가 있어야 재앙이 번진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공통점이다. 부실한 비우량 주택 대출이 2008년 금융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흔히들 여기지만 버냉키는 동의하지 않는다. 대학 강의에서 한 말이다. “당시 비우량 주택 대출의 전체 규모는 뉴욕 증시가 약간 하락한 날 줄어드는 시가총액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주택 대출의 손실은 불쏘시개 위로 던져진 성냥 역할을 했을 뿐, 바싹 마른 상당량의 가연성 소재가 주변에 없었다면 대형 화재는 나지 않았다.” 그는 과도한 대출, 얽히고설킨 금융 업계,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감독 당국 등이 ‘가연성 소재’였다고 말한다.
지금 한국은 어떤가. 조금만 방심하면 타오를 잠재적 ‘불쏘시개’가 산더미만큼 쌓여 있다. 가계 부채는 세계 최고로 불어났고, 상당수 대출의 담보인 부동산은 가격 거품이 꺼지는 중이다. 부동산 호황기에 시작한 수많은 건설 프로젝트는 PF(프로젝트 금융)라 불리는 복잡한 금융 상품으로 엉킨 상태다. 3년 전 105조원이었던 규모가 지난해 160조원 넘는 수준으로 불어나 있다.
금융 위기의 불씨를 조기에 막을 ‘해자’ 격인 예금자 보호 제도는 빈약하다. 미국의 예금자 보호 한도는 약 3억2000만원, 일본·캐나다도 1억원쯤 된다. 한국은 22년째 5000만원이다. 예금자 보호 한도를 넘어서는 예금은 2018년 말 825조원에서 지난해 1152조7000억원으로 불어나 있다. 뱅크런에 불을 붙일 ‘마른 장작’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한도 늘리자는 논의만 몇 년째인데 최근 문의하니 8월쯤 ‘개편 방안’을 낸다며 느긋하다.
‘금융(finance) 사인방’이라며 스스로를 ‘F4′라고 부른다는 금융 당국자들은 최근 회의를 하고 “한국 금융기관은 충분한 기초 체력을 가졌다.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발표했다. 불안을 조장할 필요야 없겠지만 모든 금융사의 체력이 정말 탄탄한가. 선진국 은행이 쓰러지는 판에 대형 은행 과점 해소가 필요하다며 중소형·특화 은행 추가 설립을 추진하는 정부의 자신감도 불안하다.
금융 위기 전문가 버냉키는 말한다. “상상력 부족과 기억력의 한계라는 인간 본성 탓에 금융 위기는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위험을 찾아내기 전에 위험이 우리를 찾아낼 것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버티기 위한 시스템의 강건함을 구축하기 위해 중앙은행과 정부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우리는 겸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나의 결론이다.” 지금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말이다.
-김신영 기자, 조선일보(23-03-18)-
________________
나치 침공도 막았던 스위스 은행의 굴욕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크레디스위스 은행이 파산설에 시달리고 있다. 사진은 스위스 베른시에 있는 크레디스위스 지점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는 독일의 침공을 피할 수 있었다. 40만 스위스 민병대의 결사 항전 의지도 한몫했지만 더 결정적인 전쟁 억제력은 스위스 돈 ‘프랑’과 스위스 은행이었다. 무역 결제에서 마르크, 달러를 쓸 수 없었던 독일은 석유 등 전쟁 물자를 구입하려면 스위스 프랑이 꼭 필요했다. 스위스 프랑 결제는 UBS, 크레디스위스(CS) 같은 스위스 은행의 국제 결제망이 있기에 가능했다.
▶스위스가 은행 강국이 된 비결은 신용과 비밀주의에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스위스 용병 786명은 루이 16세를 지키다 전원 전사했다. ‘스위스 용병은 계약을 죽어도 지킨다’는 신뢰가 있었다. 그래서 교황도 스위스 용병을 경호원으로 썼다. 이런 신뢰가 자본이 돼 스위스 은행업을 키웠다. 비밀주의란 누구든 돈만 갖고 오면 출처도 이름도 묻지 않고 계좌를 열어주는 것이다. 한 스위스 은행가는 “고객이 ‘내 이름은 헤네시(술 이름)입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군요. 여기 30만달러가 있습니다’라고 하면 이름 없는 계좌를 열어준다”고 했다. 스와치 시계 창업자는 “스위스의 위대한 가치는 난민에게 ‘돈의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했다. 2차 대전 중 유럽 유대인 부자들이 스위스 은행에 재산을 맡겼다. 나치 간부들도 비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맡겼다.
▶1998년 홀로코스트 희생자 유족들이 UBS, CS를 상대로 예금 반환 소송을 걸어 12억5000만달러를 돌려받았다. 철옹성 같던 비밀주의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2008년엔 미국 국세청의 압박에 굴복해 UBS가 미국인 고객 명단을 넘겨주고 벌금 7억8000만달러를 자진 납부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똘똘 뭉쳐 압박하자, 스위스 정부가 무릎을 꿇었다. 스위스 은행이 EU 고객에게 지급하는 이자에 대해 35%의 세금을 원천징수하고, 이 세금의 75%를 해당국 정부에 송금해 주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스위스 은행의 불패 신화를 깼다. 1위 은행 UBS가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이다. 정부의 구제금융 덕에 겨우 회생했다. 이번엔 미국 SVB 파산 사태가 5700억달러 자산을 가진 스위스 2위 은행 CS를 궁지로 몰고 있다.
▶CS는 2019년 미국 헤지펀드에 투자했다가 70억달러를 날린 이후 유동성 위기에 시달려 왔다. 작년 4분기 이후 예금이 150조원이나 빠져나갔다. 예금 인출 사태와 주가 폭락이 이어지자 스위스 정부가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망하게 두기에도, 살리기에도 너무 크다”(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게 걸림돌이라고 한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3-03-17)-
_______________
미·유럽 잇단 은행 위기, 우리도 ‘충당금 방파제’ 미리 더 쌓아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에 이어 글로벌 투자은행인 크레디스위스의 부실 우려로 유럽 은행들 주가가 폭락하는 등 한 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악재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고 있다. 미국발 금리 인상으로 촉발된 금융 불안이 국내로도 번져올 가능성이 우려된다. 현재 국내 은행의 건전성 지표는 우량한 편이나 그래도 안심할 수준은 아니다. 자본 건전성 지표인 자본비율이 지난해 9월 말 기준 12.26%로, 1년 새 0.73%포인트 낮아졌다.
특히 지난해 4분기 기준 가계대출이 1867조원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코로나 이후 빚으로 버텨온 자영업자의 상환 부담이 한계에 이르렀다. 지난해 3분기 말 사업자 대출을 받은 자영업자 가운데 3곳 이상 금융사에서 빚을 낸 다중 채무자가 169만명으로 1년 만에 22% 늘었다. 이들이 빌린 총대출금이 668조원에 달한다. 자영업자의 빚 폭탄이 터지는 것을 막느라 정부는 지난 3년 사이 만기 연장과 원리금 상환 유예를 5번이나 실시했다. 이 조치 대상 대출액은 141조원으로, 이 중 당장 16조여 원이 오는 9월 상환 시점이 도래한다. 빚을 못 갚는 자영업자들이 속출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그간 중소기업·자영업자의 대출 원리금 상환을 계속 미뤄줬던 은행들의 잠재 부실 가능성도 높아진 상태다. 사실상 연체 상태에 빠져 부실채권으로 분류돼야 할 대출까지도 거듭된 상환 유예로 장부상 정상채권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금융권의 ‘깜깜이 부실’이 그만큼 가중된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국내 은행에 자본과 충당금을 더 쌓게 하는 등 건전성 강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추가 자본을 최대 2.5%까지 적립토록 의무화하는 제도 등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한국 은행들은 예상치 못한 충격에 대비하는 제도적 대비책이 미흡하다. 단 하루 만에 거대 은행이 파산하고 휘청이는 시대다. 방파제를 미리, 더 두껍게 쌓아놓는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23-03-17)-
_______________
예금자보호 한도액 23년째 5000만
“미국인과 미국 기업은 필요할 때 예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다.” 10일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폐쇄의 불길이 은행 줄파산으로 이어지지 않은 데는 이틀 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성명이 큰 역할을 했다. 미국 정부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은 예금 전액 보증 카드까지 꺼냈다. 유럽까지 불똥이 튄 SVB 파산 쇼크는 여전하지만 초고속 ‘디지털 뱅크런(대량 예금 인출)’만큼이나 전격적인 미국의 조치는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예금자보호 수준은 두텁지 않다. 예금자보호법에 따르면 금융기관이 파산하면 예·적금 원금과 이자를 합쳐 1인당 최대 5000만 원까지만 돌려받을 수 있다. 2001년 2000만 원에서 5000만 원으로 오른 이후 23년째 그대로다. 지난해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001년 대비 2.9배로 커졌으니 말이 동결이지 오히려 줄어든 셈이다. 미국은 25만 달러(약 3억3000만 원), 영국 8만5000파운드(약 1억3000만 원), 일본은 1000만 엔(약 9700만 원)인 것과 비교해도 지나치게 낮다.
▷일각에선 한도를 올리면 금융회사가 내는 예금보험료가 올라 대출 금리 인상 등으로 소비자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한도를 높여봐야 소수의 고액 자산가만 혜택을 본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소득·자산과 물가 상승을 감안할 때 20년 넘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건 지나치다. 한도는 그대론데 예금만 늘다 보니 유사시 보호받지 못하는 예금 규모가 1152조7000억 원에 이른다. 원금과 이자를 보장받으려고 예금을 5000만 원 미만으로 쪼개 여러 은행으로 분산해야 하는 고객들의 불편도 무시할 수 없다.
▷예금자들의 대량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보호한도의 상향은 필요하다. SVB 사태에서 보듯 클릭 몇 번의 ‘디지털 뱅크런’으로 은행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온라인에서 돈의 쏠림이 얼마나 무서운지 한국도 경험한 바 있다. 지난해 말 일부 상호금융기관에서 고금리 특판 예금을 실수로 온라인에 공개했다가 순식간에 수천억 원이 몰려 ‘예금을 해지해 달라’고 읍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돈의 방향이 바뀌면 뱅크런이 된다. 밀물이 빨랐던 것처럼 썰물도 순식간이다.
▷평소 같으면 쉽게 넘어갈 악재도 공포로 번질 수 있는 위기의 시대다. 금융 소비자들이 소문에 동요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은 내 예금은 안전하다는 신뢰다. 국회에는 예금자 보호한도를 1억 원으로 상향하는 법안도 다수 발의돼 있다. 금융당국도 비상사태 발생 시 예금을 전액 보증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다고 한다. 경제 규모에 걸맞게 금융 소비자를 두텁게 보호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할 때가 된 것 아닌가.
-김재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3-03-17)-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經濟-家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굿바이 ‘태양신’ 할아버지] [‘다이노 베이비’] [적자인생 60세] (0) | 2023.04.03 |
---|---|
[대통령은 ‘노동시간’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 (1) | 2023.03.29 |
[한국 주식 저평가, 정부 때문이라는 소리 좀 그만 듣자] .... (0) | 2023.03.28 |
[“세계 경제 회복” 전망 OECD, 한국 성장률만 하향 조정] .... (1) | 2023.03.20 |
[‘동물의 세계’ 코드로 본 SVB 파산] [글로벌 돈 가뭄 닥쳐온다] (0) | 2023.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