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로 남극점 밟은 탐험가 아문센 ]
[위대한 실패]
[남극점에 선 韓 여성]
['매일 30㎞ 전진'의 기적]
인류 최초로 남극점 밟은 탐험가 아문센
이달 3일 칠레의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남미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남극점을 찾아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세계 정상으로는 세 번째 방문 사례입니다. 남극 대륙을 둘러싼 영유권 분쟁에서 칠레가 한발 앞서가려는 속셈으로 보입니다. 현재 영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 여러 국가가 남극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 남극 대륙에 대한 영유권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남극점을 최초로 밟은 사람은 노르웨이 출신 탐험가 로알 아문센(1872∼1928·사진)입니다. 아문센은 어린 시절부터 영국의 북극 탐험가 존 프랭클린의 탐험 보고를 읽으며 극지 탐험에 대한 열정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린란드 탐험 후 성공적으로 돌아온 프리드쇼프 난센을 평생의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18세에 아문센은 오슬로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1893년 자신이 의사가 되기를 바라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탐험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1897년 벨기에 탐험대에 일등항해사로 참가해 처음으로 남극권에서 겨울을 보냅니다. 이후 북극 횡단 탐험을 계획했다가 1909년 로버트 E 피어리가 이미 북극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목표를 바꿔 이듬해 남극으로 출발합니다.
아문센은 당시 자신의 경쟁자였던 영국의 로버트 스콧 탐험대보다 남극점으로부터 약 100km 더 가까운 위치에 기지를 설치했고, 이누이트족(에스키모)에게서 배운 개 썰매 운용법과 혹한 대비법을 활용해 팀의 생존력을 높였습니다. 마침내 1911년 12월 14일, 52마리의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네 명의 대원과 아문센은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이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합니다.
반면 스콧 탐험대는 과도한 장비와 준비 부족으로 한 달 뒤인 1912년 1월 18일에야 남극점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아문센이 남긴 노르웨이 국기와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기진맥진한 상태로 돌아가던 스콧 탐험대는 안타깝게도 눈보라에 갇혀 모두 사망했습니다.
이후 북극 탐험에도 나선 아문센은 1926년 비행선을 이용해 북극점을 횡단하며 지금의 스발바르 제도에서 출발해 알래스카에 도달하는 또 다른 위업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1928년 동료 노빌레를 구조하러 가던 중 실종되었고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노르웨이는 국장을 치러 자국의 영웅이자 위대한 탐험가 아문센을 추모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아문센해와 ‘아문센-스콧 남극점 기지’는 인류의 도전 정신과 탐험의 상징으로 아문센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의진 도선고 교사, 동아일보(25-01-14)-
_____________
위대한 실패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은 극지방 탐험을 두고 노르웨이와 경쟁했다. 첫 목표는 북극점이었다. 그런데 둘 다 허탕 쳤다. 1909년 4월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에 첫발을 디뎠다.
그러자 영국과 노르웨이는 남극점으로 방향을 틀었다. 1911년 10월 두 나라 탐험대가 엇비슷하게 남극 대륙에 도착했다. 장비는 완전히 달랐다. 로버트 스콧 해군 대령이 이끄는 영국 팀은 가벼운 모직 방한복을 준비하고 힘센 말이 썰매를 끌도록 했다. 반면 노르웨이의 아문센 팀은 묵직한 가죽 방한복을 입고, 땀을 흘리지 않는 개가 썰매를 끌도록 했다.
결과는 아문센의 승리였다. 1911년 12월 14일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국기를 꽂았다. 한 달 뒤 같은 장소에 도착한 영국 스콧 팀은 아문센 팀이 남겨 놓은 깃발과 텐트를 발견하고 좌절했다. 허탈한 마음으로 철수하다가 전원 얼어 죽었다.
스콧 팀의 비극적 최후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 경험이 아니라 장비를 믿었다. 영국 탐험대는 1909년 이미 남극점 100마일 부근까지 접근했었다. 그때도 말을 동원했지만, 남극에서 말은 비효율적이었다. 스콧은 전임자의 그 실패담을 무시했다. 둘째,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었다. 1909년의 실패는 탐험선이 얼음에 갇혔기 때문이다. 일정 지연으로 식량이 떨어지자 당시 탐험 대장 어니스트 섀클턴은 목표를 코앞에 두고도 후퇴를 결정했다. 불가능해진 목표 대신 무사 귀환을 택한 것이다. 후퇴를 불명예로 여겼던 스콧은 앞만 보고 달렸고, 자기가 뒤진 것을 깨닫자 무너졌다..
스콧이나, 섀클턴이나 실패자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늘날 섀클턴에 대한 평가는 다르다. 팀원을 살리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린 섀클턴의 포기는 ‘위대한 실패’라고 칭송받는다. 상황이 바뀌면 목표도 바뀌어야 한다. 그게 용기다.
-차현진 예금보험공사 이사, 조선일보(23-11-15)-
_____________
남극점에 선 韓 여성
산악인 김영미(노스페이스 애슬리트팀 소속) 대장이 어떤 보급도 받지 않고 홀로 남극점에 도달했다. '무보급 단독 원정 남극점 도달'은 한국인 최초다. 김영미 대장은 16일(현지 시각)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남극점 도전) 51일째인 마지막 날 27.43km를 걸어 오후 8시 55분에 남위 90도에 도달했다. 전체 누적 거리는 1186.5km, 운행 중 낮의 기온은 섭씨 영하 31도였다"고 남극점 도달을 알렸다. /연합뉴스
지구의 가장 남쪽, 남극점은 남위 90도 지점이다. 평균 기온이 여름에는 -28도, 겨울에는 -60도이고 해발 2840m에 있어서 끊임없는 오르막길이다. 남극점엔 장대에 은도금한 공을 얹어 놓은 구조물이 있고 남극조약에 최초 조인한 12개 국가 국기가 둘러싸고 있다. 구조물 등은 가혹한 남극 날씨에 오래 버티지 못해 주기적으로 교체할 수밖에 없다. 남극점 도착 인증샷을 찍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 여성 산악인 김영미(43)씨가 지난해 11월 27일 남극 대륙 서쪽 허큘리스 인렛을 출발한 지 51일 만에 1186km를 혼자 걸어 남극점에 도달했다. 중간 보급 없이 단독으로 남극점 완주에 성공한 것은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으로도 처음이다.
▶1911년 남극점 최초 도달을 놓고 노르웨이의 아문센 팀과 영국의 스콧 팀이 경쟁을 벌였다. 스콧 팀이 천신만고 끝에 남극점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이미 노르웨이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문센 팀이 한 달 전인 1911년 12월 14일에 다녀간 뒤였다. 낙담한 스콧 일행은 돌아오다 추위에 식량 고갈로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1909년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은 남위 88도 23분 지점까지 접근했다. 남극점을 155km 남겨둔 지점이었다. 그러나 식량 등을 계산한 섀클턴은 전진 대신 귀로를 택했다. 이 결단으로 혹한 속에서도 대원 28명이 모두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위대한 실패’라고 불렀다.
▶김영미의 도전도 사투였다. 그는 “화이트아웃(눈보라 등으로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보이는 현상)이 최대 훼방꾼이었다”고 했다. 추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잠시 겉장갑을 벗었다가 손가락 끝 뼈마디가 조각나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고 했다. 김씨가 두려워한 것은 손발 동상보다 허벅지 동상이었다. 바지 안쪽에 패딩 반바지를 넣고 패딩 치마를 덧입어도 부족했다고 한다. 극점 자기장 영향으로 나침반이 이상 작동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일도 많았다. 김씨는 태양과 그림자 위치, 풍향으로 방향을 잡았다. 다행히 남극에서는 바람이 일정한 방향으로 불었다.
▶김씨는 ‘세계 7대륙 최고봉 한국 최연소 완등’으로 유명한 산악인이다. 그는 남극점에서 “부상(동상) 없이 열 손가락, 열 발가락 짝 맞춰서 데려간다”며 “50여 일 여정이 하룻밤 꿈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김씨의 성공을 보며 이 순간 역경 속의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었을 것이다. ‘한 줌의 온기도 없는 51일’을 홀로 견뎌낸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
-김민철 논설위원, 조선일보(23-01-19)-
______________
'매일 30km 전진'의 기적
갤럭시노트7의 단종 사태를 보며 4년 전 세계적인 경영전문가 짐 콜린스를 인터뷰했을 때 사용했던 취재수첩을 다시 꺼내보았다. 기업의 흥망을 연구해온 그는 기자에게 대뜸 '남극점을 누가 최초로 정복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답이 아문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복 비사(秘史)는 그때 처음 알았다.
1911년 10월 인류사의 첫 남극점 정복을 놓고 로알 아문센과 로버트 스콧이 세기의 대결을 벌였다. 아문센은 1911년 12월 14일, 스콧은 아문센보다 한 달 늦은 1912년 1월 17일 남극점에 서는 데 성공했다. 패배한 스콧 팀엔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극점에 뒤늦게 도착한 후 지친 나머지 눈 속에 갇혀 전원 사망했다. 아문센 팀은 안전하게 복귀했다.
무엇이 둘의 운명을 갈랐을까. 콜린스가 내린 결론은 '하루 20마일(약 32km)의 꾸준한 행군'에 있었다. 스콧은 날씨 좋은 날은 체력이 고갈될 때까지 속도전을 펼치며 대원들을 혹사했다. 하루에 30마일도 전진했다가 날씨가 나빠지면 텐트 안에 있었다. 아문센은 날씨가 좋아도 매일 20마일, 날씨가 험해도 사투를 벌여가며 20마일을 전진했다. 스콧 팀은 날씨가 나쁘면 당연히 힘들었고 날씨가 좋아도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려다 보니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문센 팀은 날씨가 좋은 날은 자신감과 여유를 가지고 눈보라가 칠 때를 대비했다.
남극점 이야기는 기업의 흥망성쇠에도 적용된다고 본다. 1~2년의 단기가 아니라 30년 이상의 시간을 놓고 볼 때 살아남고 성공한 기업은 시장의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고 차세대 히트 상품을 계속해서 내놓는 '날쌘 돌격자'가 아니었다. 인텔·암젠·사우스웨스트항공 등과 같은 기업은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일정한 전진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은 호황기에도 불황기를 대비해 성장을 절제하는 원칙도 견지했다.
적어도 노트7 단종 사태만 보면 삼성전자는 아문센이 아니라 스콧을 닮아 있다. 삼성전자는 노트5에서 '6'을 건너뛰고 노트7로 신제품을 내놓았다. 아이폰7시리즈를 의식한 명칭이면서 그전 모델을 훌쩍 뛰어넘는 혁신 제품이라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삼성 내부에서도 "아이폰을 완전히 추월하기 위해 '무조건 전진'을 외쳤고, 그 바람에 이번 일이 터졌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삼성의 노트7 단종으로 말미암은 손실액은 7조원대라지만 실제론 그 이상이 되리라 전망한다. 삼성은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모든 제품에 대해 내부 품질 프로세스를 다시 점검한다고 발표했다. 신제품 출시에 앞서 기업의 사활을 걸고 원인 파악에 들어갔다. 삼성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번 사건이 스콧 경영에서 벗어나 '아문센 경영'으로 전환하는 기점이 되길 바라고 있다. 원칙에 바탕한 아문센의 20마일 행군은 비단 노트7에만 해당하는 경구(警句)는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 모두가 곱씹어봐야 한다.
-호경업 산업2부 차장, 조선일보(16-10-22)-
===========================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 > [世界-人文地理]' 카테고리의 다른 글
[“美 출생자에 시민권 안 주면 위헌”… ] [미국 성공회] (0) | 2025.01.25 |
---|---|
[사설 소방대] [보험] [보험사는 은행이 아니다] (0) | 2025.01.15 |
[국경분쟁 끝나니 '물 전쟁'.. 중국·인도 세계 최대 수력댐 건설 격돌] (0) | 2025.01.12 |
[괴로울 때면 '전쟁과 평화'] [백학의 노래] (0) | 2025.01.11 |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교황권(敎皇權)] [카노사의 굴욕.. ] (2) | 2025.01.02 |